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붉은악마와 치우천황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의 신화를 이룰 때 한국의 응원단 이름은 ‘붉은악마(Red Devils)’였다. 원래 ‘붉은악마’는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서포터스 그룹의 일원으로 1997년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가 그 시초인데 1998년 프랑스월드컵 1차 예선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붉은악마’란 이름은 1998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이 4강으로 올랐을 때 당시 외국 언론들이 우리 대표팀을 ‘붉은 악령(Red Furies)’ 등으로 지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이 다가오면서 점점 더 힘을 받아 국민들에게 크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독교계에서는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 ‘붉은악마가 설치는 한 한국 팀이 16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느니 ‘악마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한 16강은 불가능하다’라고까지 비난하면서 ‘붉은악마’를 규탄했고 외국에서도 악마를 상징으로 쓰는 한국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는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다.

일부 목사들은 ‘백의 천사’라는 응원단까지 조직했다. 종교적인 열정을 무기로 한 ‘백의천사’는 기독교계 중·고등학생들을 동원해 붉은악마의 응원에 방해가 되도록 엇박자로 응원을 펼치기도 했으나 결국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민중서관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악마란 ‘생명을 빼앗고 선법(善法)을 방해하는 나쁜 귀신’ 또는 ‘아주 흉악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고 그 반대말이 ‘천사’이다. 종교인들이 반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악마를 내세운다는 자체가 악마주의(惡魔主義)로서 인생의 암흑면(暗黑面)을 그리며 악을 찬미하는 퇴폐적인 경향을 조장한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붉은악마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창윤은 벨기에 국가대표팀과 영국의 유명 축구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도 붉은악마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우리나라에서 ‘악동(惡童)’ 혹은 ‘악당(惡黨)’이라고 타인을 지칭할 때 실제로 ‘성품이나 언행이 나쁜 아이’나 ‘악한 사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주 친한 친구한테 종종 ‘악당’이라는 말을 쓴다. ‘붉은악마’의 ‘악마’라는 단어도 이런 범주에 속하는 퍽 재미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거리 응원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붉은악마’를 상징하는 붉은 셔츠를 아무런 부담감 없이 입었던 것이다.

붉은악마의 응원도구는 대형태극기와 붉은 티셔츠, ‘대∼한민국’으로 통칭되는 응원구호이다. 붉은악마들의 응원은 다른 나라 서포터스(응원단)와 분명히 다르다. 강력한 응원무기는 ‘태극기’이다. 그 중에서도 2002년에 등장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던 대형태극기는 가로 60미터, 세로 40미터 무게 1.5톤이나 된다. 이를 펼치면 그 넓이가 무려 720평에 달한다. 한국 팀 경기에 앞서 애국가가 연주되면서 이 초대형 태극기가 관중석을 뒤덮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물결칠 때 한국인들은 짜릿한 감동을 느꼈다.

응원 소도구는 ‘COREA’와 붉은악마의 상징인 ‘치우천황’이 함께 새겨진 머플러, ‘탐탐이’로 불리는 작은 북, 꽹과리, 태극기 등이다. 2006년 월드컵에서는 아쉽게도 16강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응원문화는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빨간색 두건, 가면, 응원봉은 물론 밤 경기 응원용 악마뿔 머리띠, 손목 아대, 빨간색 투혼 팔찌, 축구공 귀걸이도 등장했다.

더욱이 국경일에나 사용되던 태극기를 국민들의 장식품으로 끌어내린 것은 상당 부분 ‘붉은악마’의 공으로 돌릴 수 있다. 응원가는 ‘오∼필승 코리아’, ‘아리랑’, ‘젊은 그대’ 등이 사용됐으며 ‘대∼한민국’ ‘한국’ 등의 구호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박자에 맞춰 다양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붉은악마’의 상징으로 ‘치우천황(蚩尤天王, Chi you)’을 내세웠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한다. 붉은악마 응원단이 처음 치우를 잘못 알고 악마로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지만 붉은악마가 치우천황을 내세운 것은 치우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황이 건국한 배달국(倍達國)의 14대 천황이기 때문으로 설명되었다.

또한 치우천황은 한국인의 선조로 알려진 동이족(東夷族)이며 그의 근거지가 고대 고조선의 영토이므로 그를 내세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조였다(중국 측에서는 치우(蚩尤)가 공손 헌원(軒轅)과 전쟁을 벌인 사실을 ‘동이전’이 아닌 ‘흉노전’에 기록하고 있음). 붉은악마와 치우천황에 대해 4회에 걸쳐 설명한다.

<지구를 들썩거리게 한 함성〉<지구를 들썩거리게 한 함성〉

2006년 월드컵이 진행되자 한국이 온통 월드컵 열기로 들끓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축구공 하나가 세계를 웃기고 울리는 요물이 된 것이다. 한국의 월드컵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길거리 응원이다.

그동안 2002년, 2006년 월드컵 기간 중에 나타난 놀라운 현상에 대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진단하고 평가했으므로 이곳에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우선 월드컵 때 한국인이 쏟은 에너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거리의 응원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수치로 풀어보자.

2002년 6월 25일, 독일과 결승전 진출을 가리는 준결승전, 월드컵이 열리는 한국의 심장부 광화문, 시청에는 무려 140만 명이 몰렸고 서울 시민의 1/4인 250여만 명이 거리 응원에 나섰으며 전국 450여 곳에 4천700만 전 인구의 17퍼센트에 달하는 800만 국민들이 모였다.

2006년 월드컵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역 예선전, 평가전서부터 붉은악마와 길거리 응원이 등장하더니 2006년 6월 1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토고와 예선 1차전을 벌일 때 한국의 곳곳에서 응원을 벌인 사람이 무려 218여 만명이나 되었다. 6월 19일에는 새벽 4시에 프랑스와의 예선전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70여 만명이 길거리 응원에 나섰고 6월 24일 같은 시간 스위스와의 예선전 마지막 경기에는 100여 만명이 전국 각 곳에서 길거리응원에 열중했다.

한국의 길거리 응원이 얼마나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는지는 한국의 응원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각국의 기자들이 몰려들었으며 관광객들이 방문하여 한국인들의 응원 실력을 현지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길거리 응원이 한국 내에서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미국, 영국은 물론 전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붉은악마 응원이 벌어졌다. 이들의 응원 열기에 자국인들도 휩쓸려 붉은악마와 함께 한국을 응원하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붉은악마의 응원문화를 한류로 이끌자는 주장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길거리 응원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2002년 6월 25일 한국인들이 내뿜은 에너지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1인당 1일 발산 에너지는 대략 2500㎉가 되는데 이날 많은 사람들이 정오부터 축구가 끝난 자정까지 쉬지 않고 ‘대∼한민국’이나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쳐댔다. 거의 12시간에 걸친 열띤 응원이었으나 이를 6시간으로 줄여 계산한다면 1인당 625킬로칼로리를 발산했다는 뜻으로 이날 800만 명의 한국민들이 거리에 분출한 에너지는 5,000,000,000 ㎉이다.

이 에너지를 태양에너지로 흡수하려면 한국의 경우 집열기 1㎡ 당 평균 2500㎉를 획득할 수 있으므로 무려 2,000,000㎡ 즉 60만6천여 평의 집열기가 하루 종일 태양열을 흡수한 양이 된다. 태양에너지를 집열하는 집열기의 가격을 400,000원/㎡으로 산정 하더라도 무려 8천억 원이 소요된다.

인간이 이와 같은 에너지를 방출하려면 음식으로 흡수해야 하는데 이를 계산한다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달걀은 66,667,000개, 자장면은 무려 11,363,000그릇에 해당한다. 이를 소고기로 환산하면 3,731,343킬로그램(134㎉/100g)이 소요되며 돼지고기로 환산할 경우 3,546,099킬로그램(141㎉/100g)이 필요하다. 황소 한 마리를 400킬로그램으로 볼 때 9,328마리, 돼지 한 마리를 150킬로그램이라고 볼 때 무려 23,640마리가 소요되어야 하는 양이다.

함성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의 세기는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의 세기의 1,000,000,000,000배까지이다. 그러나 소리의 크기의 차이는 이보다 훨씬 적다.

귀가 듣는 상대적 소리의 크기를 음량이라 하고 데시벨(db) 단위로 측정한다. 데시벨은 로그눈금을 사용하므로 10데시벨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소리인 0데시벨보다 10배, 20데시벨은 100배이다. 일반적으로 집에서의 라디오 소리를 40데시벨, 집에서의 대화소리를 65데시벨, 귀에 장애를 주는 소리를 85데시벨, 매우 혼잡한 교차로는 90데시벨, 도로 공사시 굴착기의 소음은 100데시벨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큰 소음은 제트기 이륙 때 나는 소리로 140데시벨로 본다. 인간은 120데시벨에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고 140데시벨에서 고막에 통증을 느끼며 방향감각을 일시 잃는다.

전문가들은 2002년 6월 25일 광화문에서 국민들이 한꺼번에 터뜨린 함성을 150데시벨로 보았다. 150데시벨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가는 일반 소음계(sound level meter)의 측정 범위가 30∼130데시벨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800만 명이 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면 200데시벨도 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엄밀한 계산을 한다면 이보다 훨씬 낮은 수치가 되지만 전 세계에서 아직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프리미엄까지 붙여 적어도 제트기의 소음보다 100만 배는 된다고 가정해도 무리는 아닐 성 싶다.

이들의 함성으로 지구가 들썩들썩했을 것이라는 데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한국민이 마음껏 동시에 터뜨린 함성으로 고막이 터지거나 귀에 병이 들었다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세계인들이 TV에서 한국민들이 지르는 함성을 보고 기가 질렸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치우천황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붉은악마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치우천황(일명 자우지 환웅)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치우천황은 기원전 2707년부터 2598년까지 109년 간 전쟁에 나가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신화를 가진 고대 조선의 군신(軍神)으로 ‘천하융사지주(天下戎士之主)란 명성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단군을 신화로 배운 젊은 세대들은 단군과 거의 동시대에 있었다는 치우천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설사 부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치우는 중국에서 건너 온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치우천황은 중국의 전설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史記』〈오제본기 제1편〉에 나온다.

‘황제는 유능국의 임금 소전의 아들이다.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고 백일이 못 되어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어릴 때부터 재지(才智)가 번뜩였다. 자라면서는 돈후·민첩했고 성장해서는 총명했다.

(중략)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종했는데 오직 치우만이 난폭해서 헌원도 징벌할 수 없었다. (중략) 그러나 치우가 천하를 어지럽혀 황제의 명을 듣지 않았으므로 황제는 군사를 제후에게서 징집해 치우와 탁록의 야(野, 현재의 河北省)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사마천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주(註)를 적었다.

① 응소가 말하기를, 蚩尤, 古天子(치우는 옛 천자이다)
② 관자가 말하기를, 蚩尤受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치우가 노산의 금으로 오병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사람은 아니다)
③ 용어하도가 말하기를, 黃帝攝政 有蚩尤兄弟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組立兵仗刀戟大弓 威振天下(황제(헌원)가 섭정할 때 형제가 81명 있었으며 짐승의 몸으로 말을 하고 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했으며 모래를 먹고 칼, 창, 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만들어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
④ 공안국이 말하기를, 句黎君號蚩尤(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불렀다)
⑤ 황람이 말하기를, 蚩尤塚在東平郡壽張縣(치우의 무덤이 동평군 수장현에 있다)

그런데 황제와 치우가 전투를 벌인 탁록은 지금의 북경 근방이므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랑하는 중원은 한족(漢族)의 땅이 아니라 동이족의 땅이라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사마천은 오제(황제·전욱·제곡·요·순) 앞에 있다고 알려진 ‘삼황(三皇)’을 신화로 보고 오제 때부터 역사시대로 들어갔다고 보았다. 우리나라 상고사와 대비해보면 환웅시대는 중국의 삼황과 오제 양 시대에 걸쳐 있고 단군시대 역시 오제시대 끝자락인 요·순시대와 같은 시기이다(단군의 건국을 기원전 2333년으로 기준할 경우). 즉 치우천황은 중국의 황제와 동시대 인물이고 우리의 단군은 요·순과 동시대 인물인 것이다.

여하튼 중국의 정사로 인정되는 사마천의 기록에 설명된 치우천황을 박선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우선 치우가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 수준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측 기록에 의하면 치우는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병(作兵), 연병(鍊兵)과 뛰어난 숭생중물(崇生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하며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이다. 『史記』에는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다고 적었는데 이때 치우는 구야(九冶)라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용했다고 한다.

연병이란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으며 숭생중물이란 살아있는 생명체와 모든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고대 사회에서 야금 즉 금속의 생산은 매우 중요한데 철(鐵)의 옛글자가 금(金)과 이(夷)를 합친 글자였음에 비추어 금속의 생산기술이 동이족으로부터 나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마천은 치우천황이 마치 악당인 것처럼 기술하고 반대로 황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훌륭한 사람이요 중국의 통치자인 것처럼 기술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을 엄밀하게 해석한다면 치우는 황제, 즉 헌원보다 먼저 천하를 다스리던 천황이었다. 그러므로 치우가 반역자가 아니고 헌원이 반역자인 셈이다. 또한 중국의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지는 『산해경』에도 헌원이 치우천황에 대한 반역자로 기술되어 있다.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 이에 황제는 치우를 기주의 들에서 공격했다.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불러 크게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퍼붓게 하였다. 이에 황제는 천녀를 불러 비를 멈추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살해했다.’

『산해경』은 일반적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으로 추정한다. 이 책은 중국의 자연관을 아는 데 귀중하며 신화의 기록이 적은 중국 고전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원래는 23권이 있었으나 전한(前漢) 말에 유수(劉秀)가 교정한 18편만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중국에서는 한민족(漢民族)과 이민족(異民族) 간의 최초의 전쟁을 바로 헌원과 치우 간의 탁록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한다. 헌원은 한족(漢族)의 수장이며 치우는 구려(句黎) 즉 묘족(苗族)의 수장이다(박성수 교수는 황제와 치우 모두 동이족이라고 설명함).

헌원과 치우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대결, 70여 회나 전투를 했는데 한국측 자료인 「삼성기전 하편」에는 치우가 탁록의 벌판에서 헌원을 격파하고 신하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에서도 치우와 황제가 싸워 이 싸움에서 치우가 이겨 먼저 제위에 올랐다고 적었다. 또한 『한단고기』에서는 배달나라(환웅시대) 영토를 중국의 산동반도 이남에 있는 희대 땅까지 넓혔다고 기록했다.

한편 치우가 헌원에게 살해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치우의 형제 81인이 쇠 이마로 된 똑같은 복식을 했기 때문에, 치우를 살해했다고 기록한 것은 81명 중의 한 장수가 죽었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설명도 있다(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는 주장도 있음). (계속)
<기원전 1733년의 오행성 결집 현상을 적은 『단군세기』>
 
일부학자들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들 책에 설명되어 있는 환웅과 단군 시대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규원사화』를 『두산세계대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자는 북애노인(北崖老人)으로 청평(淸平)이라는 사람이 지은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읽어보니, 삼국 이전의 역사는 항간에 전하는 여러 가지 설에 비하여 자세하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기개(氣槪)가 있었으므로, 이에 따라 저술한 것이 이 책이다.
 
상권은 조판기(肇判紀)ㆍ태시기(太時紀)ㆍ단군기(檀君紀)로 나누어 상고사를 서술한 다음, 만설이라 하여 여러 경전(經典)에서 느낀 바와 저자 자신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상고사를 특이하게 서술한 점과 압록강 이북을 차지하지 못한 강개(慷慨)가 엿보이는 책이다.
 
책머리에 ‘상지이년을묘북애노인(上之二年乙卯北崖老人)…’이라 쓴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1년(1675)에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단고기』는 1911년 묘향산 단군암에서 선천 사람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 『태백일사』라는 각기 다른 4종류의 책을 필사한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두산세계대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중략) 상하 2편으로 이루어진 『삼성기(三聖記)』는 신라의 승려인 안함로(安含老)와 행적을 알 수 없는 원동중(元董仲)이 쓴 것이다.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중심으로 민족의 기원부터 단군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였는데, 1421년에 세조가 전국에 수집 명령을 내린 『삼성기』와 책명이 일치한다.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 문정공 이암(李喦)이 전한 내용으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칭한 단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대 단군 왕검부터 47대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에 걸친 단군 조선의 시기별 역사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학자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것으로, 상ㆍ하ㆍ가섭원부여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조 해모수에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년과 가섭원부여 108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단군세기』의 속편이다.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했는데, 한국(桓國)ㆍ신시시대ㆍ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삼신오제(三神五帝)를 중심으로 한 천지만물의 생성으로부터 단군과 광명숭배, 3조선, 단군 경전, 민족을 드높인 고구려ㆍ발해ㆍ고려의 대외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단군 이래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둔 고유신앙을 정신적 기반으로 민족의 자주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실려 있다.
 
『태백일사』에는 1923년에 중국 뤄양(洛陽)에서 천남생(泉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실려 있다. 나아가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영향까지 받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 책을 계승했다는 이유립이 편찬자이며 40년대 후반에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지적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 책들은 편찬 년대가 너무나 늦은 면이 있어 사료로서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주대학교의 박창범 교수는 『단군세기(檀君世紀)』에 특히 주목했다.
 
『단군세기』와 『단기고사(檀紀古事)』에는 기원전 1733년의 오행성 결집 현상 등 천문현상이 적혀 있는데 이를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 기록보다 1년 전인 기원전 1734년에 오행성 결집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1년의 오차는 3700년 전과 현재의 시간계산법의 차이로 생기는 오차로 거의 정확한 수치이다. 박 교수는 천문현상 기록을 근거로 이들 책의 신빙성을 지지했다.
 
독립기념관장 김삼웅도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에서 『한단고기』의 경우 비록 내용과 용어의 일부가 후세의 것이라 해도 책 자체를 완전히 위서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적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관련 학자들이 모든 한국인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낼 것으로 생각되므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부활되는 치우>
 
중국에서는 그동안 황제만 시조로 모시다가 1980년대부터 염제(炎帝)를 포함해 중국인은 염·황(炎黃)의 자손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더니 1990년대에 와서는 탁록현 반산진의 황제성과 황제천이 인접한 평원에 있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부터 황제·염제·치우제의 삼시조시대(三始祖時代)를 선전하고 있다.
 
치우천황의 능은 1997년, 중국 산동성의 문상현 남왕진에서 발견되었다. 탁록현의 탑사촌에도 치우릉이 있는데 이곳에는 치우의 머리 부분이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사기집해』와 『漢書』에는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감행성에 있으며 높이는 일곱 길(70자)이고, 백성들이 매년 음력 10월에 제사를 지낸다. (중략) 팔다리 무덤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고 적었다. 진태하 박사는 ‘치우는 신체부위별로 3곳에 분산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진 것을 근거로 치우릉이 문상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치우릉을 복원하는 등 이민족으로 여기던 치우를 시조로 거론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족(漢族)외에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다원적 중국을 이끌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관 즉 한족 위주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다민족 역사를 포함시켜야 한다.
 
이에 대해 주변 국가들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박성수 교수는 중국이 황제는 물론 치우까지 자기네 조상이라고 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가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강원대학교의 박정학 교수는 치우가 중국의 조상이라면 그가 다스린 ‘구려’와 그 후신인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중국 역사에 편입되고, 치우의 영역과 법통을 이어받은 고조선 역사마저 중국에 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중국학자 모두 갑작스러운 역사관의 전환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문자학자 이경재는 치우를 놓고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왜곡에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무공 방면에서는 제하(諸夏)가 승리했으나 문화 방면에서는 동이에 동화되었다. (중략) 대저 동이는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곧 화목 자상하고 무력보다 예술을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대표적 인물을 들면 순(舜) 임금이다(맹자는 순임금을 동이인(東夷人)이라 말했다). 지인(至仁) 지효(至孝)해 남에게 천하를 양위한 것은 참으로 고금 중외에 다시 없는 지극히 성스러움인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中國) 문자는 동이인이 다 창조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설(契)이 널리 보급했기 때문에 조자의 공이 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동토와 서토의 고문을 대략 비교해보면 곧 동이가 문자의 지혜에 대해서는 서하(西夏)보다 우수하고, 동이인이 먼저 교육권을 장악했으므로 제하(諸夏)가 모두 동이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한편 송호정 교수는 치우천황에 대한 한국인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경계했다. 중국의 시조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을 우리 민족과 관련된 실제 역사로 인식하게 된 배경에는 우리 역사를 오래 되고 우월한 것으로 보고 싶어 하는 국수주의적 역사인식이 밑바탕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송교수는 치우가 한국인인가 중국인인가라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실재하지도 않은 인물을 놓고 민족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박정학 교수는 치우를 한(漢)족의 시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중화족’ 속에 포함된 동이와 묘족의 조상인 것은 분명하므로 치우는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조상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치우가 중국인들의 본류라는 헌원과 전쟁을 한 동이족의 시조라 하더라도 시기가 기원전 27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다가, 치우를 진시황제 이후에 나오는 동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는 없다는 의견과도 일견 상통하는 면이 있다.
 
여하튼 우리나라에서 치우천황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문이기는 하지만 치우에 대한 믿음은 생각보다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는 설명도 있다.
 
우선 한강 ‘뚝섬’의 경우, 본래 치우 사당을 모셨기 때문에 ‘치우기(旗)’를 뜻하는 둑(쇠꼬리나 꿩꽁지로 꾸민 깃발을 의미)자를 써서 ’둑도‘ 즉 ’둑섬‘이라고 불렀던 것이 경음화되어 ’뚝섬‘으로 변했다고 설명한다.
 
조자용 박사에 의하면 근래까지 뚝섬에 있는 둑신사에 대형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이 두루마리에 치우와 황제의 탁록대전을 그린 대형 벽화가 있었다고 적었다. 두루마리의 높이는 6척, 길이는 무려 36척이나 되지만 이 벽화는 광복 전까지는 전해 내려왔으나 지금은 보관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8세기경의 녹유귀면와(綠油鬼面瓦)도 치우상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장승에도 치우상이 변형된 것이 있다고 하며 치우부적, 도깨비, 치우투구, 치우깃발, 기우제신 등은 모두 치우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설명도 있다.
 
육군사관학교에 보관된 옛날 투구에도 치우상이 그려져 있는데 전투에 출전하기 전에 치우를 군신으로 모셨던 치우사당에서 먼저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데서 연원한다고 한다.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치우천황을 그려 넣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치우천황은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인 데다가 사악한 기운을 쫓고 강렬한 투쟁 정신을 돋우는 이미지를 갖고 있으므로 붉은 악마 응원단에서 그를 한국 축구의 승리를 지켜주는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동이는 누구인가〉
 
치우천황을 이야기하면 동이(東夷)가 반드시 따라다니므로 동이가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동이(東夷)’를 한자로 풀이하면 ‘동쪽 오랑캐’란 의미로 고대 중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하여 그들의 동방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한 별칭이다. 중국 동북부에 살던 민족들이 스스로 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나, 중국인들에 의해 동이라 불려졌기 때문에 동이는 우리의 고대사를 거론하려면 반드시 등장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중국사에서 동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광의의 동이는 고대 중원의 동쪽인 산동 반도와 회하(准河)유역 일대의 종족을 가리키며 협의의 동이는 한족(漢族)의 세력이 확대된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를 의미한다.
 
광의의 동이보다 후대에 나오는 협의의 동이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동쪽인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민족을 총칭한다. 협의의 동이일 경우 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연경(燕京) 즉 오늘의 북경에서 조금 동쪽인 만리장성이 끝난 곳, 즉 산해관부터 동이지역이다. 물론 동이를 종족의 칭호가 아니라 정치적인 용어의 개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는 것을 첨언한다.
 
중국인들이 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된다. 중국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는 은의 무정(武丁, 기원전 1324∼1266)이 동이를 정벌하느냐 마느냐로 그 가부를 점친 갑문(甲文)이 있으므로 동이족이 무정(武丁)시대 이전에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좌전(左傳)』에 의할 경우 상(商)의 멸망은 결국 동이족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갑골문, 청동기 명문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상(商, 은)이 기원전 11세기경 주족(周族)이 중심된 여러 종족의 연맹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서주(西周)시대가 열렸다. 동이는 끊임없이 중국 역사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공(周公) 단(旦)은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단(旦)은 동이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주(周)왕실의 친척과 공신을 대규모로 분봉하였다. 이때 봉해진 나라가 산동(山東)과 강소(江蘇) 지역의 노(魯), 제(齊), 초(楚) 등의 나라이다. 노나라에 살았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등을 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후 서주(西周)시대의 동이는 그들 지역에 분봉된 제후국들과 치열한 병탈의 과정을 겪었다. 서주(西周)시대에 주(周)의 제후국과 토착민 동이 사이에 있었던 대표적인 대결이 제(齊)와 래이(萊夷), 주(周)와 회이(准夷)와의 전쟁이다. 래이(萊夷)는 중국 동부 연해 지역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한 지파로서 산동에 거주했던 토착민(주로 목축업과 농사를 지었음)이며 회이(准夷)란 준수(準水) 유역에 위치했던 종족이다.
 
제와 혈전을 벌였던 래이(萊夷)는 제나라 영공(靈公) 15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회이(准夷)도 노(魯)와 대립적인 관계에서 점점 밀접한 관계로 변화되며 동화되었다. 춘추(春秋)시대에는 서이(徐夷)가 등장하는데 서이(徐夷)는 산동에 존재하던 동이 중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서이(徐夷)가 한민족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서언왕(徐堰王)의 설화가 고구려 주몽의 난생설화(서군(徐君) )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설화의 내용을 보면,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으므로 상스럽지 못하다 하여 강가에 버렸더니 독고모(獨孤母)의 개가 물고 들어왔다. 그가 알을 따뜻하게 하였더니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언왕이라는 내용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서주(西周) 강왕(康王) 때 서이(徐夷)가 스스로 왕임을 천명했다. 그는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황하의 상류까지 이르렀으며 국토가 사방 500리에 달했고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을 볼 때 당시에 매우 강성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임승국은 서언왕이 주나라 목왕(穆王, 기원전 1001∼947)과 일대 결전을 벌였는데 이 당시 서언왕이 할거한 곳은 회수(淮水)와 대산(垈山) 사이의 회대(淮垈) 지역으로 중원 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라고 설명했다.
 
중국 문헌에서 동이는 ‘이(夷)’, ‘동북이(東北夷)’, ‘구이(九夷)’, ‘구려(九黎)’, ‘사이(四夷)’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동이보다 이(夷)가 먼저 일반화한 것은 이(夷)가 어떤 특정한 민족을 가리킨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이질집단을 통틀어 부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인들은 문화가 높은 지역을 ‘하(夏)’, 문화가 높은 사람 혹은 종족을 ‘화(華)’라 칭하고 화하(華夏)를 합해서 중국이라 칭했다.
 
여하튼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산동의 동이들은 점점 중국인들에게 밀려 제후국에 예속되면서 그들 고유의 문화는 중국 문화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과정을 완성시킨 사람이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이다.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시켜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키면서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이전까지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통일 제국을 세웠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중국 영역은 동으로는 조선(朝鮮), 서로는 임·조·강중(臨·洮·羌中), 남으로는 북향호(北嚮戶), 북으로는 황하의 북단, 동북은 요동과 국경을 접하는 거대한 영토로 오늘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서주(西周)시대부터 중국인들에게 동화하기 시작한 중국 대륙 안의 동이들은 진나라의 출현으로 중국민족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중국이 자랑하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동이족이라고 추정한다. 요임금도 순과 같은 산동 출신인 데다 둘이 한 동네 사람으로 자신의 아들이 능력 부족이므로 치수에 능한 순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자가 『서경』에서 ‘순임금은 중국에는 전혀 없던 신명(神明)에 제찬보본하는 예식을 마련했다’고 기술했고 맹자도 ‘순임금은 동이 사람이다’라고 썼다.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인의(仁義) 사상의 원천이 요순이고 이들이 동이라면 공자와 맹자가 이상으로 삼은 국가는 동이국가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유승국은 중국의 『산해경』에서 조선이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고조선은 중국 요ㆍ순시대와 은ㆍ주시대에 중국 본토의 일부 지역과 만주, 한반도 전역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이 주력이 된 한(韓)족과 주(周)가 주력이 된 한(漢)족 간에 대립이 생겼고 결론적으로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제압했다. 당연히 주나라는 동이족을 정복했으므로 동이족이 주력인 은나라를 한(漢)족의 역사로 간주했는데 공자도 그 설명에 동조했다. 공자는 『춘추』에서 은나라와 동이족을 밀어내고 중국의 정통은 동이가 아니라 한(漢)족 중심의 주나라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매우 모순적인 발언을 했다. 공자는 자기의 주장이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구이(九夷, 조선)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공자의 말에 “고루하면 어쩌겠느냐”고 질문하자 “조선은 군자불사지국”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이 고루한 곳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다면 동이가 군자의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주나라는 중심세력이라고 주장한 공자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에 의아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언론인 최태영은 공자 시대에 비로소 한(漢)족 중심의 중국 역사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애도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자 시절에는 주나라가 이미 쇠퇴하고 여러 외족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고 그 중에서 동이인 한족(韓族)의 위세가 자못 강했다. 그러므로 공자는 외족을 물리치고 주나라를 높이기 위해 『춘추』를 저술했다. 만약 공자가 당시에 동이의 주력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동이를 중심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국대학교의 기수연 박사는 한대(漢代) 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하와 은나라를 동이족이 원류인 한민족이 세웠고 한자도 동이가 살던 산동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자 역시 ‘한민족이 만든 것과 다름 아니다’라는 비약도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후대에 중국에 동화되어 중국인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이들 모두를 한민족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리한 설명이라는 지적이다. 공자와 맹자가 동이이기 때문에 한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동이(東夷)가 동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이(夷)자는 원래 활은 평상시에 활줄을 빼놓았다가 유사시에 걸어서 쏘는 생활을 한 사람들의 상형자라는 것이다. (계속)
<치우의 후예들>
 
동이와 묘족의 시조인 치우가 헌원과 탁록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족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헌원이 중국을 차지하자 치우의 일부 일파는 중국에 동화되고 나머지 일파는 동이로 계속 활동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므로 치우는 우리 조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인의 조상도 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연히 동이와 묘족이 어떤 관계이기에 이러한 주장이 나오며 이들이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정확한 기록이 없는 시대의 역사를 정확하게 구성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우리나라의 일부 역사가 왜곡된 곳이 많다고 지적되는 것도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단원은 KBS-TV 이동식 기자가 쓴 『길이 멀어 못갈 곳 없네』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강은 양자강과 황하이다. 양자강 남부를 고대 중국인들은 월(越)이라 부르면서 자신들과는 다른 민족이 사는 땅으로 간주했다.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발상지는 황하이므로 일반적으로 염황족 또는 화하족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양자강 남쪽의 오늘날 절강성 일대는 화하족의 손이 미치지 않는 땅이므로 ‘백월(百越)’ 또는 ‘백오(百奧)’라고도 불렀다. 이는 중국 중원에서 볼 때 너무 멀고 외지라는 뜻이다.
 
중국과 다르다고 중국인조차 인정한 월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조차 이견이 많은데 가장 근접한 대답은 월족이 워낙 다양하므로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월족은 중국인들로부터 물 위에서 잘 다니고 금속 제련기술이 뛰어났으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는 문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풍습은 중국의 화하족과는 생활습관이나 언어, 문화 등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월족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태평양 인종이 해안을 타고 올라왔다는 설, 남방족의 일족인 삼묘족(三苗族)의 후예, 본래부터 그 땅에 살아왔을 것이라는 토착설이 있고 이들이 모두 합쳐진 혼합설 등이다.
 
그런데 월족의 조상으로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는 우(禹)의 후손이라는 설명이 사마천이 쓴 『월왕구천세가』에 나온다.
 
‘월왕 구천의 조상은 우의 후예이며 하왕조의 후제 소강의 아들로서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의 사당을 지켜왔다.’
 
절강성의 소흥 남쪽에 회계산(會稽山, 주 봉우리는 1,195미터의 동백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지금도 우임금이 중국의 홍수를 다스렸고 제후들에게 논공행상을 했으며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요, 순, 우가 다스리던 그 시대에 홍수가 문제가 된 곳은 양자강이 아니라 황하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일대이다. 반면에 우의 사당이 있다는 소흥과 회계산은 모두 양자강 남쪽이다.
 
학자들이 위의 설명에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시의 교통 여건 등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황하에서 수천 리 남쪽인 양자강 남쪽까지 우가 내려와 제후들을 다독거리고 이곳에 묻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 시대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論衡)』에서 왕충은 우임금이 회계에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고 중국인 임화동 박사는 『관자』와 『사기』에서 ‘우는 태산에서 제후를 봉하고 회계에서 왕위를 물려주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초기의 회계산은 산동 태산 근처에 있었으며 소흥의 회계산은 산동에서부터 그 이름이 옮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의 『사기』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사마천이 그렇게 적은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을 중국의 양쇠도(梁釗謟)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 월족은 산동성과 절강성 일대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우가 건국할 때에 동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월족이 화하민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 하나라를 건설했으므로 동이월족의 전설 중에 그들이 하의 후예라는 얘기가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문자로 기록할 때에 월왕 구천의 조상이 우의 후손이라고 쓰게 된 것이다.’
 
양쇠도의 설명은 동이족과 월족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치우천황이 헌원과 전투할 때 동이에 월족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요ㆍ순이 원래 동이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점도 있다. 즉 하나라 때의 회계산은 지금의 절강성 소흥 근처가 아니라 산동성 태산 부근이라는 설명이다. 회계산은 산동에 있으면서 동이월족이 숭배하던 곳인데 후에 산동지구가 화하족에 융합되어 더 이상 월인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고 동이지역에서 절강지역으로 내려 간 월족이 그들의 조상을 생각해서 절강지역에 회계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에서 발견되는 동이족의 풍습>
 
이동식 기자는 위와 같은 설명이라면 중국 남방 지역의 월족과 한국인이 같은 부류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고인돌이 한국인과 월족과의 유대 관계를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은 세계의 3분의 2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특히 동이족의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대형 고인돌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소형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자들은 고인돌 1톤을 옮기는 데 약 10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계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판만 해도 200톤이 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세울 당시에 2천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 2천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한 마을의 거주 인원을 150여 명 정도로 간주하므로 장정 2천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적어도 40여 개 마을이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 마을에서 50여 명의 장정이 동원된다는 것으로 가정).
 
고인돌을 고고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인돌에 부장품이 없더라고 청동기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학자들은 청동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국가라는 구조 형태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장정 2천명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위계질서나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의 건립 상한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 전역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5∼6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자강 남쪽의 절강성에서 2004년까지 50여 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고 중국학자 소석(昭晰)은 발표했다.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온주(溫州) 서안시(瑞安市) 강변의 구릉과 산중턱 해발 90∼120m의 높은 대지에 분포하고 있다. 절강성의 고인돌은 덮개돌의 한쪽 면 밑으로만 지석이 받치고 있거나, 묘문(墓門)이 마련되어 있는 등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는 색다른 모습도 있지만 형태상 우리나라의 남방식과 유사하다. 이들의 연대는 우리나라 고인돌의 초창기 연대보다는 다소 늦은 서주(西周, 기원전 1046~771년) 초기부터 춘추시대 말기로 추정한다.
 
지역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유형의 고인돌 문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같은 생각과 풍습을 갖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인 사자를 매장하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쉽사리 도입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풍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같은 형태의 고인돌이 절강성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오히려 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한반도에서 절강성으로 가려면 과거에 동이지역이라고 간주되는 산동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들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동성에서 동이족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산동성을 동이족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에도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자들이 산동성에서 분명히 고인돌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애태우던 차에 1993년 신화통신은 산동성 문등시 고촌진에서 2미터 크기의 고인돌이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이 발견은 우리나라부터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 남쪽으로의 고인돌까지 연계될 수 있다는 자연스런 설명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더욱 큰 중요성이 있다. 중국의 원리(苑利) 교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한반도와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관계 비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황하 중심의 염황족에 밀려난 묘족(苗族)의 선조다. 이 묘족은 4000년 전 발해 북쪽 연안에 살다가 남쪽 하북성 삼하현으로 쫓겨간 민족으로 오늘날 중국 남쪽의 5개 성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예맥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중략) 이들은 한반도 일대의 북맥(北貊)과 회하(淮河, 지금의 강소성 일대) 지방에 살던 남맥(南貊)으로 북맥은 3500여 년 전에 한반도로 건너갔다. 반면에 남맥은 진나라가 망하면서 그 유민들 중 한 부류는 한반도로 건너갔으며 또 한 부류는 운귀고원(雲貴高原, 오늘날의 운남성과 귀주성 일대의 고원)으로 쫒겨가 백족(白族)이 되었다. 이 민족을 중국에서 백월민(白越民) 또는 월족(越族)이라 부른다.’
 
윈리 교수의 설명은 중국에서 백이(白夷)라고 부르는 일족이 맥족인데 북맥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했고 회하와 양자강 일대에 살던 남맥은 일부가 한반도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운남성으로 들어가 이들이 백족 또는 월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양자강 일대에 살다가 운남성으로 들어간 백족과 우리나라로 들어간 북맥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토템도 달라>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경우 민족의 기원을 찾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들의 토템(totem)이 무엇이냐도 중요한 관건이다. 고대 사회에서 같은 민족끼리 어떤 상징적인 동물을 숭상한 것을 토템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하족인 중국민족은 용을 토템으로 삼았고 동이족인 한민족은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지금도 용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으며 용은 곧 중국인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황하문명의 상징이라고 간주한다(이형구 박사는 가장 오래된 용의 형상이 발해연안 북부의 대릉하 유역과 서요하 유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동식은 과거에는 월족이 뱀을 토템으로 하고 있었지만 근래에는 월족의 토템도 새라고 발표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중국의 임화동 박사는 월나라 하모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 등 여러 자료를 근거로 월족의 토템은 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월의 땅 심산에는 새가 있는데 비둘기와 같고 푸른색으로서 아조라고 부른다. (중략) 월나라 사람들은 이 새를 월축의 조상이라고 한다.’
 
월족이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절강성 여향현 양저에서 발견된 양저유적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연대는 기원전 3300~2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곳에서 벼농사를 위주로 했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삼베옷은 물론 누에로 만든 옷도 나왔다.
 
그런데 이들 문화유적 중에서도 동이족 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는 유물들이 발견됐다. 종(琮)과 벽(壁)이라는 옥기이다. 벽은 옥을 편편하고 둥글게 깎은 것이고 종은 가운데 동그란 구명을 뚫고 측면을 사각형인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벽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사용하고 종은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사용된다고 『주례』에도 적혀 있다.
 
그런데 옥으로 만든 종의 상부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 형상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있는 솟대와 꼭 같은 그림이다. 산동성의 용산문화에서도 새가 발견되는데 용산문화는 곧 동이족의 문화이다. 동이족의 풍습으로 간주하는 솟대가 양저문화의 유적에서도 발견된 것이다.
 
양저문화에서 나온 옥은 2004년까지 중국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이다. 옥은 양저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산동지방에서 발달했던 동이족의 이른바 대문구문화유적에서도 발견됐고 추후에 동이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진 은나라 유적에서도 나왔지만 선사시대에는 양저문화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영험스런 새로 인식하는 봉황에 대해서도 『설문해자(說文垓字)』에서 ‘봉(鳳)은 신조(神鳥)로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서 나왔다’고 적혀 있다. 동방의 나라란 동이족을 뜻한다. 봉황은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는데 수컷을 봉(鳳)이라하고, 암컷을 황(凰)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는 암수를 구분하지 않고 ‘鳳’자만을 사용하였다.
 
양저문화보다 최소한 2000년 앞선 하모도문화에서도 새가 나온다. 하모도문화도 새를 토템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이는 절강성 북부를 대표하는 두 고대문화가 모두 새를 토템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신석기시대의 양자강에서도 동이족의 토템을 지키는 부족이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큰 틀에서 동이족 전체가 토템으로 새만 신봉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계속)
<동이족의 순장(殉葬)과 사각형 제단>
 
양저문화와 한 계통인 상해의 복천산(福泉山) 145호 묘는 양저문화가 동이족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를 갖고 있다. 그것은 순장 제도인데 동양에서 이 제도는 중국인과는 달리 동이족의 풍습으로 인식한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행동은 살인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살인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살을 엄밀한 의미에서 살인으로 간주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일단 태어난 생명은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들의 상식적인 생각이 과거에도 통용된 것은 아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무덤에 묻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순장 풍습을 지역에 따라 아름다운 미풍 양식으로 여기기도 했다. 앞에서 설명한 결초보은이나 미망인이란 말은 사람을 죽여 무덤에 묻는 것을 당연시하는 순장의 풍습을 다소 미화시킨 에피소드라고 볼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사람을 함께 매장한다는 것은 죽은 뒤에도 피장자(被葬者)의 평상시 생활이 재현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고대 세계에서는 매우 익숙한 풍습이다.
 
순장의 원래 발상지는 고대 오리엔트로 추정한다.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7000년경의 예리코(Jericho) 유적에서 발견된 남자 시체가 순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추정한다. 예를 들어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우르(Ur) 유적의 왕묘에서는 59인의 순장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6인은 완전무장한 병사, 9인은 화려한 장신구를 가진 여자였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조세르 왕묘 주변에서 궁녀 273인, 신하 43인을 순장한 묘가 발견되었다.
 
오리엔트의 고대문명은 다른 지역으로도 파급되었는데 유럽에서는 고대 갈리아(현 프랑스)·아일랜드인·불가리아인·슬라브인들에게서도 순장 또는 순사(자원하여 묻히는 것)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순장제도가 지도자에 따라 생겼다가 없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순장이 성행한 시기는 동이족이 건설한 것으로 인식하는 은나라로 보통 한 무덤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순장됐는데 순장자의 수만큼이나 묻힌 방법이 다양하다. 두개골만 매장된 구덩이가 있는가 하면 꿇어앉은 채 살해된 순장자들도 있다. 한 구덩이 안에서 수십 명씩 포개져 매장된 순장자도 발견된다.
 
순장 풍습은 은나라를 대치한 화하족의 서주(西周) 이후 급격히 감소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진(秦)나라 무공 20년(기원전 698∼678) 66명을 순장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학자들에 따라 이 기록을 순장 기록의 시초라고 간주하지만 중국의 하건민(何健民) 박사는 서주 선왕(宣王, 기원전 827∼781) 대에도 순장의 기록이 있다고 적었다.
 
진나라 목공이 사망한 기원전 621년에도 177명이 순장됐는데 그 가운데는 엄식, 중항, 침호 등 충신들이 포함돼 있었다. 순장제도는 진 헌공 원년인 기원전 385년에 폐지됐는데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즉위한 2세 황제 호해 때 다시 등장했다.
 
그 후 한나라부터 원나라까지는 순장제가 사라졌는데 명대에 부활한다. 명나라 태조 때 많은 궁인들이 순사했고 성조ㆍ인종ㆍ선종 때도 순장했고 청나라 때도 세조가 사망하자 후궁 30명이 순장되었고 성조(聖祖) 때도 40명의 궁녀를 순장하려다 성조가 심히 싫어하여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순장이 성행했다. 『고사기』에 죽은 사람이 능묘 주위에 담 구실을 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일본서기』에는 순사자들을 생매장하였는데 이를 고풍(古風)이라고 적었다. 순장이 일본에 매우 성행했다는 뜻이다.
 
한국의 순장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순장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다. 가야지역인 양산군 양산읍 북정리 부부총, 1982년 우연하게 발견된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의성 탑리, 창녕 계성리, 순흥 읍내리 등에서 순장의 증거가 발견된다.
 
유명한 경주의 황남대총의 경우 고분의 구조상 적석목곽분은 추가장이 불가능한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150센티미터 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다. 반면에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다. 그것은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다.
 
여하튼 동이족의 풍습으로 알려진 순장이 양저문화에서 발견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배장제도도 유사하다는 점이다. 절강성 여항현 요산(瑤山)에서 서로 다른 흙을 사용하여 둘레를 자갈과 잘게 자른 돌을 두른 3층의 제단 유적이 발견됐다. 길이는 약 20미터, 면적 400제곱미터로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유적으로 보이는데 부장품을 고려할 때 순장의 흔적도 보인다. 즉 사각형 제단이 있고 그 제단 주위에 순장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동식은 중국에서 피라미드식으로 된 4각형의 제단이나 무덤은 모두 중국민족의 것이 아니라는 데 주목했다. 그는 절강성의 요산을 포함하여 4각형으로 된 구조물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김천씨의 능과 만주 길림성 집안현의 장군총, 서하왕국(당항족이 세운 유목국가)의 왕릉, 북방식 신석기문화유적인 요령성 건평현에 있는 우하량(牛河梁) 유적 등에서 발견된다고 적었다.
 
소호김천씨는 가야의 김수로와 신라 김알지의 선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산동성 곡부는 공자의 고향이지만 공자 이전에는 산동성 동이족의 중심지이다.
 
장군총은 큰 돌을 잘라서 4각형 피라미드 형식으로 쌓은 것으로 동이족 문화의 큰 특징으로 분류되는 고분형식이다. 그 무덤이 백제를 따라 한강까지 내려와 석촌동에 고분군을 만들기도 했다.
 
우하량 제단 유적은 만주지방의 신석기시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제단양식으로 ‘홍산문화’로 불리는 문화 중 하나이다. 홍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등을 사용한 대표적인 북방인들의 문화이다.
 
결론적으로 사각형 피라미드식의 유적은 모두 중화민족의 것이 아닌데 절강성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중국인인 화화족(염황족)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절강성에 살았던 사람이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되면 그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한다. 가장 비근한 예가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벼농사이다. 벼농사가 남방에 적합하며 동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이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남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근래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문화와 같거나 비슷한 문화 요소들이 외부에서 발견된다고 그 문화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외부지역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절강성의 고인돌 같은 경우 약 3천여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동이 지역의 고인돌은 5∼6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윤내현 박사는 오히려 동이 지역에서 고인돌 풍습이 중국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기원전 3천여 년 전에 동이족이 주나라의 공격에 패배한 후 분지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동이족의 대이동>
 
근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에 대해 설명하는 요지는 분명하다. 고대 중원지방에 살던 동이족이 치우천황 때는 물론 주나라와 보다 후대인 진시황에 밀려 남ㆍ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북쪽으로 간 부류는 부여인 등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운남성이나 귀주로 가서 오늘날 묘족(苗族) 또는 요족(瑤族)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으로 절강성의 월족들이 이루어 놓은 양저문화와 하모도문화가 동이문화와 유사한 문신 등의 풍습들을 갖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게 설명된다. 이동식은 월족 즉 절강성의 고대인들이 산동성의 동이족과 본질적으로 같은 계통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송편과 월병도 한 예로 들었다.
 
한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송편으로 일반적으로 달의 모양을 흉내 낸 것이라고 설명된다. 반면에 중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월병으로 달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일종의 떡이자 과자이다. 한국의 송편은 상현달을 본뜬 것이며 중국의 월병은 보름달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월병은 고대 월국의 중심지인 항주이다. 강남에 살고 있던 월족은 과거부터 떡을 만들어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나눠먹는 습속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 은나라까지 올라간다.
 
월(越)은 월(月)과 발음이 같다. 한국의 한자 독음과도 같다. 이것은 월병(月餠, 달떡)은 원래 월병(越餠, 월나라 떡)이었는데 달을 숭상하는 풍속과 결합이 되어 월병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월병에는 또 다른 유래가 있다. 원나라 말에 관가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태주(천태산이 있는 곳)의 장사성(張士誠)이 ‘몽고족을 죽여 원나라를 멸망시키려니 8월 15일에 거사하자’라고 쓴 종이쪽지를 둥근 떡 속에 넣어 전했다. 8월 보름 예상대로 의거가 시작되어 결국 원나라는 멸망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5일 월병을 먹으며 장사성의 공훈을 기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무대도 월나라의 근거지인 항주 일대이다.
 
추석날 한국도 달떡을 만들어 먹는다. 물론 달떡의 모양은 다르다. 중국 것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한국에서는 상현달 같은 반달이다. 이 차이는 지역과 시대를 내려오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이동식은 설명했다.
 
월 지방에는 우리의 무당과 같은 무속인들이 후대까지 전해진다는 것도 제시됐다. 명나라의 방효유는 월무(越巫)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월의 무당은 스스로 귀신을 부릴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람이 병이 나면 단을 세우고 호각을 불고 방울을 흔들며 뛰고 소리를 지른다. 둥글둥글 호무를 추며 귀신을 쫓는다. 요행스럽게 병이 나으면 술과 음식을 먹은 뒤 상 위에 놓인 돌을 가지고 가고 혹 환자가 죽게 되면 귀신이 요망을 부렸다며 자신의 기술이야말로 요망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동식 기자는 월무라는 무당이 우리나라의 무당과 큰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무당은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민속 중에 하나인데 월지방에도 있었고 그 무당의 형태가 오늘날 한국의 무당과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역사가 삼황오제로부터 ‘하-은-주’로 일직선으로 내려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우월주의를 버리고 다원성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학자 서북문(徐北文)은 신석기시대 말기 이후 중국대륙에는 서부지역의 화하문화와 동부지역의 동이문화가 함께 병존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화하문화는 하나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우임금으로부터 시작해 주나라로 이어지고 동이문화는 치우천황을 거쳐 요순시대 이후 은나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큰 문화의 흐름 즉 이질적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중국 측의 변화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일련의 사건을 볼 때 진의를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가 자신과는 다른 이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도 포함하게 되자 그들 역사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설명이다.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동이문화의 뿌리가 산동성뿐만 아니라 양자강 일대까지 확산돼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설명도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한국 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안겨 주었던 신라 말 최치원의 글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해하고 북으로 연(燕)ㆍ제(齊)ㆍ노(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거적(巨賊)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쪽으로 침범했다는 오·월은 절강성 일대인데 최치원의 짧은 이 말 한마디가 그동안 잊혀졌던 한국의 과거사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우천황과 헌원이 탁록에서 전투하여 치우천황이 패배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치우천황이 패배했기 때문에 동이족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헌원의 포로가 되었고 다른 부류는 도망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포로가 된 많은 동이족들이 중국의 화하족에 동화되었을 것은 이해가 되며 중국이 강조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점을 기수연 박사는 분명히 했다. 한대(漢代) 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 대립하는 상대적인 개념의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배한 이후 상당수의 동이족들이 화하족에게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포로가 되지 않고 탈출한 사람들은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동이족의 전통과 풍습을 계속 유지해 내려왔다고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 대목이 한국민이 강조하는 것으로 한민족은 헌원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하족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 동이족으로 내려와 현재의 한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윤명철 박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문화전통을 유지 발전시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치우천황을 바라보는 각도가 중국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치우천황이 중국의 헌원에게 패배한 후 일부 부류는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한민족은 동화되지 않은 채 그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했으므로 치우천황의 맥을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는 것은 한민족이다.’
 
동이족이 헌원에게 패배하면서 도망갈 때 반드시 중국의 동북방으로만 진로를 잡았다고 볼 수는 없다. 동이족인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배할 때도 같은 정황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했지만 동북방의 동이족 후예인 한민족과 중국 남부의 월족이 같은 부류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실크로드의 관문인 난주(蘭州)에서 돈황까지 가는 유일한 통로가 ‘하서주랑(河西走廊)’이다. 남쪽으로는 기련산맥(祁連山脈)이 우뚝하고, 북쪽으로는 몽골고원과 사막이 펼쳐진 가운데, 좁은 곳은 10km, 넓은 곳은 100km에 이르는 회랑(回廊)이 1000km 정도 길게 뻗어 있다.
 
하서주랑은 옛 주인이었던 삼묘족(三苗族)과 흉노족(匈奴族) 때문에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소여림(邵如林)은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삼묘족을 구려족(九黎族)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속문명을 지녔던 치우(蚩尤)의 구려족이 황제족(黃帝族)과 탁록 전투에서 패한 후 이 고원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구려족은 동이족의 한 갈래이므로 하서주랑의 삼묘족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중국 길림성의 송호상 교수는 1990년을 기준으로 중국에 있는 동이족의 후예를 조선족 200만 명, 만족 1000만 명, 묘족 750만 명, 리족(黎族) 100여 만 명이며 묘족의 해외교포만 100만 명이 넘는다고 적었다. 물론 묘족을 포함하여 만족, 리족이 동이족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한민족과 동일 선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하다는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여하튼 10여 년 전 만해도 역사학자들이 치우천황과 한민족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현재와 같이 한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이름을 잘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국 고대사에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치우천황이 스포츠를 통해 가까워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과거를 찾아주는 고대사가 앞으로 스포츠를 비롯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계속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끝.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b%8f%99%ec%9d%b4%ec%a1%b1%ec%9d%98-%ec%a0%81%ec%9e%90%eb%8a%94-%ed%95%9c%ea%b5%ad%ec%9d%b8/?cat=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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