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과학이 찾은 아틀란티스 대륙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과학이 찾은 아틀란티스 대륙

 

오늘날 인류는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지구 내에서는 세계 구석구석에 인간의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지구 밖으로는 새로운 행성을 정복하기 위해 우주 탐사에 나서고 있다. 콜럼버스가 1492년 신세계를 발견한 이후 유럽의 움직임과 흡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지상에서 그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변동(지각 격변, 빙하 등)으로 새로운 산맥이 형성되고 육지가 바다 밑으로 침몰하고 바다가 육지가 되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져 왔다. 재난이 시작되면 동굴에 숨거나 높은 산으로 피난하거나 뗏목을 타고 표류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생명을 건진 이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사람임을 자부하며 새로운 정착지에서 과거의 생활지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문명을 계속 발전시키거나 변형시켰다.

 

이 중에서 사람들의 가장 큰 호기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347)이 처음으로 언급한 아틀란티스 대륙이다. 플라톤이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 거론한 이후, 수많은 저자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의 위치를 놓고 다양한 주장을 펼쳤는데 이렇게 발간된 책만 해도 무려 5,000종이 넘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을 대서양이나 지중해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부분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있다는 설명도 있었고 심지어는 독일과 영국이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설까지 등장했다. 소련 학자 베렌진은 바크 부근의 카스피 해에 아틀란티스가 있었으며 앤드류 콜린스는 쿠바 지역이 아틀란티스라고 발표했다.

 

여하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므로 자신들이야말로 아틀란티스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민족도 스물이 넘는데 필자를 찾아온 한 독자는 한국인들도 아틀란티스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가장 친숙한 아틀란티스의 이미지는 쥴 베르느가 1869년에 발표한 소설 『해저의 2만리』에서 잘 나타난다. 소설의 주인공 피에르 아로낙스는 노틸러스 호의 네모 선장의 안내를 받아 바다 밑을 탐사한다. 네모 선장은 아로낙스에게 두꺼운 해조류의 숲에 뒤덮인 웅장한 건물의 폐허와 줄지어선 돌기둥들을 보여준다. 아로낙스는 선사시대에 존재했던, 발달된 문명의 유적을 보고 흥분하는데 그 유적은 사라진 대륙이 있다는 곳으로 알려진 대서양의 해저에 있었다.

 

2004년 6월에는 스페인 남부 해안을 촬영한 위성사진 속에서 수천 년 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기록된 전설 속의 섬 아틀란티스로 믿어지는 지상 구조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독일 부퍼탈 대학의 라이너 쾨네 박사는 “플라톤이 지상낙원으로 묘사한 아틀란티스 섬이 사실은 기원전 800년에서 500년 사이에 홍수로 휩쓸려 나간 카디스 부근 늪지대 마리스마 데 이노호스 일대”라며 위성사진에서 두 개의 장방형 구조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진에는 2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평평한 대지가 바다 속에 가라앉은 모습이 나오는데 이 정사각형 모양의 대지가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인들의 신전인 은의 신전과 금의 신전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두 유적의 면적은 대략 925제곱미터로 매우 작지만 플라톤이 말한 대로 주변을 동그란 원 모양의 구조물이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유적은 기원전 800년∼기원전 500년 사이에 건설된 것이므로 적어도 1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의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이름을 걸고 세계적인 토픽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아틀란티스 대륙이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사라진(잃어버린) 대륙의 문명’이 갖고 있는 특수함 때문이다. 이를 ‘문명을 갖고 있던 사라진 대륙’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이것은 지금껏 쌓아 놓은 문명이 갑자기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전쟁이나 질병, 기후의 변화, 식량의 결핍 등으로 기존에 유지되던 생활 모두가 생명력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경우 적어도 문명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살았던 대지는 남아 있고 그들의 흔적도 조금은 남아 있다. 가장 단적인 예가 사하라 사막이다. 사하라 사막의 기후가 바뀌어 현재는 불모의 사막지대이지만, 불과 몇 천 년 전만해도 고도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바위그림 등이 증명한다.

 

만일 거대한 섬이나 대륙이 갑자기 바다 속에 잠긴다면 거기에 꽃피었던 문명도 사라졌을 것이다. 그것도 단 하루 밤과 낮 사이에 사라진다면···. 이런 극적인 사건이 언젠가 지구 역사상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것이 바로 아틀란티스다.

 

대륙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 대륙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속물적인 근성으로 말하여 그들이 갖고 있었을 보물들은 어디에 있을까? 만약에 내가 그 보물들을 발견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이런 공상들을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진 대륙의 문명’이란 단어 자체에 인간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5,000권이 발간될 정도로 전 세계인들의 흥미를 끌었던 아틀란티스의 매력은 무엇이며 과학은 아틀란티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 12회에 걸쳐 설명한다.

 

〈플라톤이 적은 아틀란티스 대륙〉

 

아틀란티스 대륙은 기원전 335년경 플라톤이 쓴 『대화편』 중 「티마이오스」와 「크리아티스」라는 철학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플라톤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으로 정치가인 솔론(기원전 615∼535)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었다. 또 솔론도 역시 직접 아틀란티스 문명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성직자인 손치스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상 국가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틀란티스 대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솔론이 이집트의 사이스를 방문하자 이집트의 손치스 사제가 솔론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9,000(기원전 9570년)년 전에 아주 강력한 고대 국가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이상 국가였다. 아주 예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 동쪽 끝에 솟아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말한다) 뒤편에 큰 섬이 있었다. 이 큰 섬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불렀는데 이 섬을 지배하던 나라는 리비아(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항해자들이 다른 섬으로 가는 해로가 있으며, 그리고 그 섬들로부터 시작해서 진정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대양을 육지가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해역은 입구가 좁은 그야말로 하나의 만(灣)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다른 바다 그것은 진정한 대양으로 그 대양을 둘러싼 땅이야말로 대륙이라 이름 붙여 마땅하다.

 

이 국가는 당신의 나라(그리스)와 우리나라(이집트)의 해협에 이르는 리비아(이집트 서쪽에 위치한 아프리카 부분)와 티레니아(중서부 이탈리아) 지역도 점령하였다. 그러자 당신 국가에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그리스 전체를 총괄하는 동맹군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맹군 간의 이해가 서로 엇갈려 모두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당신 나라 혼자만 싸워 승리자가 되어 기념비를 세웠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단 하루의 밤과 낮 사이에, 당신들의 전사 모두가 땅 속에 묻혔고 아틀란티스 대륙 역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사라진 섬과 유적들이 수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배가 항해하기 불가능하다. 그것은 침몰한 섬이 남긴 많은 이토(泥土)가 배의 항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아티스」에서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와 아테네의 관계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아주 오랜 옛날에 신이 대지를 갈랐다.

 

아테나 여신은 그리스에 와서 아테네인들의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에 와서 국가를 건설하고 섬에 거주하고 있던 클레이토라는 여자에게서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아틀란티스는 큰아들 아틀란트(아틀라스)가 통치하였으며 그 섬과 대양도 그 이름을 따라 아틀란티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섬의 각지에 분산되어 국가를 통치하였으며 섬의 최고 통치자의 소집이 있을 때는 언제나 부름에 응하여 회의를 하였다.

 

섬에는 어떤 도시 또는 어떤 땅에서건 생산의 대상인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섬 자체에서 자급하고 있었으나 많은 것이 국외에서 반입되었다. 특히 오리칼크가 많았고 코끼리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섬에는 향료가 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이 섬의 수도는 직경이 22킬로미터나 되는 원형으로 되어 있었고 그 중앙에 포세이돈과 클레이토가 살았던 800미터 길이의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그곳은 포세이돈과 클레이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곳으로 항상 따뜻한 물과 찬물이 나오는 목욕탕이 있었다. 또한 포세이돈 개인에게만 봉헌된 신전도 있었는데 신전 전체가 금, 은과 오리칼크로 덮여 있었다. 신전 내부에는 금으로 된 원주들이 있었는데, 이 원주는 6마리의 말이 견인하는 전차를 타고 있는 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섬의 중심부는 폭 360미터의 환상운하(環狀運河)에 둘러싸여 있고 폭 360미터쯤 되는 육환대(陸環帶)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다시 그 둘레는 역시 폭 360미터의 수로가 에워싸고 있었다. 이 수로는 또 한 번 폭 540미터의 육환대에 둘러싸이고 마지막으로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같은 폭의 수로가 이 땅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도크에는 3단노가 설치된 군선이 가득하여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아크로폴리스 주위에는 물이 채워진 같은 모양의 통이 3개, 흙이 채워진 통이 2개 있었는데 이것은 터널과 우물이 연결되는 통로에 놓여 있었다. 이 통들은 신전, 정원, 체육관, 기숙사, 경마장에도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여러 겹의 성벽이 주민들과 해안에 정박하고 있는 상선과 전함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군대는 전시에 구역별로 징집이 행해졌고, 한 구역의 인구는 6만 명에 달했다. 육군은 중전차 1만 대, 경전차 6만 대, 병사 100만이며 해군은 수병 24만 명의 대군이었다.

 

각 구역 지휘관은 전쟁에 대비하여 전차 한 대 비용의 6분의 1을 부담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지휘관은 이 밖에도 말 두 마리와 기병 두 명, 좌석이 없는 경전차 한 대, 작은 방패를 들고 전차를 따르는 보병 한 명, 경전차에 타서 말을 몰 전차병 한 명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중무장병 둘, 사격수 둘, 투석기 조종병 둘, 투석병 셋, 소규모 전투를 수행할 투창병 셋, 그리고 1,200척의 함선에 태울 선원 넷도 조달해야 했다. 이는 왕도(王都) 직속의 병사들이며 다른 아홉 왕국에도 각각 군대가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통치자는 10명이며 포세이돈 신전에 5∼6년마다 모여서 법을 위반한 자들을 재판하였다. 최종 선고를 내리기 전에 신전 안에 있는 소를 금속 도구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매듭과 몽둥이만으로 죽여 제물로 바쳤다.

 

아틀란티스 사람들은 지금의 아테네인들과 같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정치 이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욕심이 너무 많아서 제우스신은 이들을 징계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 까닭 없이 중단되어 있다.

 

〈레무리아 대륙〉

 

아틀란티스 대륙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가설에 수많은 추측이 가미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원래 ‘사라진 대륙’이란 말은 아틀란티스 대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질학의 발전과정에서 학문적인 연구로부터 나온 말이다.

 

17세기 만해도 사람들은 물활론(物活論)을 믿었다. 땅에서 나오는 돌멩이들이 생물처럼 스스로 자란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광산에서 금을 캐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광산을 폐쇄하고 금이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학자들을 가장 골머리 아프게 만드는 것은 도처에서 발견되는 화석이었다. 산 정상에서 조개나 물고기 화석이 나오기도 하며 인간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도 화석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화석은 생물의 유해가 돌처럼 굳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많은 학자들이 알고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부정했다. 사람들은 화석이 동식물의 유해가 아니라, 우연히 생물체의 모양을 닮은 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뭉친 중세 유럽에서는 ‘과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표현에 걸맞게 화석도 ‘성경의 말씀’에 적합한 설명으로 풀이되어야 했다. 즉 산에서 발견된 조개의 화석은 노아의 홍수 때 산까지 떠밀려간 조개들이 죽어서 남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한 이미 멸종되고 없는 기이한 동물들의 화석은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서 창조하려다가 실수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잊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악마가 사람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화석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1859년에 출간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학자들에게 여러 가지 연구 과제를 주었다. 그의 학설대로 서로 비슷한 종(種)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라면 그 증거가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확신을 갖고 있던 독일의 동물학자 에른스트 H. 헤켈은 지구가 격심한 변혁기를 거쳐 현재와 같이 되었는데, 그 여파로 생물의 진화와 적응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지구는 계속 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구의 여러 곳에서 어느 때는 천천히, 또 어느 때는 격심하게 지표의 침강과 상승이 일어났으며 대륙이나 섬들이 함몰되고 새로운 산맥이 출현했다. 섬들이 산맥이 되고 반도가 섬이 되었으며 섬이 대륙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헤켈은 영장류의 분포 상태를 조사한 결과, 각 대륙의 일부 생물들이 유사한 것을 보고 생물들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인도양을 건널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헤켈은 ‘어떻게 생물들이 인도양이라는 대양을 건널 수 없는데도 현실적으로 여러 대륙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가장 명쾌한 대답은 이들 지역이 과거에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헤켈은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입증해 줄 만한, 즉 그 연관성을 증명할 만한 화석이 아무 데서나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사라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류가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헤켈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원인(猿人) 화석이 두 대륙에서 틀림없이 발견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그 원인을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라고 사전에 명명하기까지 했다.

 

헤켈이 추론한 사라진 미스터리의 대륙을 영국의 박물학자 필립 L. 스크레이터는 ‘레무리아 대륙’이라고 명명했다. 레무리아 대륙은 약 2억 년 전에 현재의 아프리카·남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극 대륙을 한데 묶는 거대한 곤드와나 대륙이 있었다는 지역과 거의 일치하므로 일반적으로 레무리아 대륙으로 설명된다.

 

스크레이터가 사라진 대륙을 레무리아 대륙으로 명명한 이유는 여우원숭이 즉 마다가스카르 섬에 살고 있는 레무르의 진화과정을 조사한 결과 헤켈이 주장했던 대륙에 레무르가 살았다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스크레이터는 레무르가 마다가스카르 섬에 인접한 아프리카(근래에 아프리카에도 레무르류의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음)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고 인도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수마트라에는 서식하고 있는 점을 발견, 마다가스카르에서 수마트라에 이르는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큰 대륙이 있었다고 추정했다. 마다가스카르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이그너도 아프리카에는 없지만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 안틸 제도, 피지 제도 및 남아메리카에서는 발견된다. 이 외에도 프테로프스는 마다가스카르와 인도에는 살고 있지만 아프리카에는 살고 있지 않다.

 

동식물의 분포를 보면 마다가스카르 섬의 동식물은 인도의 동식물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인도에서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동식물이 유입되었든, 그 반대가 되었든 바다를 건너야 하는 문제가 있다. 더욱이 마다가스카르 섬의 동식물은 오스트레일리아, 나아가서는 남미의 그것과도 매우 유사하다. 스크레이터는 이에 대해 명쾌한 가설을 제시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흔적도 없이 물밑으로 사라져버린 ‘육교’가 있어야만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크레이터의 주장은 고생물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의 주장은 헤켈 등이 주장한 고생물의 진화분포를 비교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무리아 대륙이 현재의 마다가스카르 섬, 모리셔츠 제도, 세이셜 제도, 코모로 제도를 포함한다는 가설은 프랑스의 에밀 프랑샬, 독일의 오스칼 페셜, 다윈과 진화론의 공동 발견자인 알프레드 윌리스 등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구소련의 지질학자인 리세톱은 인도양 해저 조사를 통하여 대륙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지질상의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1972년 마다가스카르 섬의 남쪽 약 700마일에 걸친 해령을 조사한 학술조사선 ‘그로머찰렌지’호는 최근 2000만 년 사이에 이 지역이 1600미터 이상이 가라앉았다고 발표했다. 또한 세이셜 제도와 샤드마리아의 얕은 해양에서는 해저가 그 전 높이에서 2000미터나 침하한 것도 발견했다.

 

더욱이 마다가스카르 섬 북서부의 해저에서 10∼11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아랍인들이 건축한 건축물의 폐허가 발견되었다. 이는 불과 수 세기 전에도 육지의 침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인도의 전설은 해저에 가라앉은 몇몇 도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텍스트인 ‘마하바라타’, ‘마스쳐 프러너’ 등에는 신들의 적, 악마인 아르스가 살고 있던 도시인 트리플이 ‘바다 속에 가라앉았으며 신들의 눈에서 모습을 감추었다’고 적혀 있다. (계속)

 

〈인간의 문명권으로 들어온 레무리아 대륙〉

 

레무리아 대륙이라는 명칭이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고생물학적인 견지에서 태어났지만, 일부 사람들은 레무리아 대륙에 사라진 초고대 문명이 틀림없이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의 대표적인 인물은 루이스 스펜서이다.

 

그는 하나의 대륙이 인도양에서 태평양으로 뻗어 있고 또 다른 대륙이 비스듬히 태평양을 향해 뻗어 있는데 이 두 대륙이 레무리아 대륙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증거로 고대 하와이인들의 전설을 지목했다. 전설에 따르면 하와이에서 뉴질랜드까지 연결된 하나의 대륙이 있었는데 이 대륙은 카네 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스터 섬도 홍수로 인해 섬의 서쪽에 있던 마라에 롱가라는 대륙이 함몰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으며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은 그들의 선조가 살던 땅 하와이키에 대분화(大墳火)가 일어나 하와이키가 순식간에 침몰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맥미란 브라운은 『태평양의 수수께끼』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올레아이 섬의 주민은 그 섬으로부터 100마일 떨어진 작은 섬과 종속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종속 관계는 야프 섬과 수백 마일 떨어진 작은 섬과도 맺고 있었는데 작은 섬의 주민들은 야프 섬의 추장에게 해마다 공물을 바쳤다. 만약 공물을 제때에 바치지 않으면 추장이 폭풍우의 신이나 지진의 신을 동원하여 작은 섬들을 뒤흔든다고 믿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브라운은 폴리네시아 전 국토가 한 사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는데 지각의 변동에 의해 땅이 가라앉았다고 주장했다.

 

과정이야 어떻든 일단 레무리아 대륙이 인간들의 문명권 시각 안에 들어오자 레무리아 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무리아 대륙의 주민들은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종족이라고 설명된다. 현재 폴리네시아인들은 대륙이 침몰할 때 겨우 재앙을 면한 사람들로 선주민(先住民)들의 문화유산을 계승했다. 일부 주민들은 참변이 일어날 때 다른 대륙으로 피신하여 아시아 대륙을 거쳐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이르러 북부 유럽인종의 기원이 되었다. 신대륙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티티카카호 주변에 정착하여 티아우와나코의 유적을 남겼다. 이 신대륙의 문화에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여 멕시코·유카탄·콜롬비아·페루의 고대문명은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의 혼합문명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레무리아인의 존재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자 신비주의자들은 레무리아인들이 아예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엘레나 브레버스키(1831∼1891)라는 여자는 신지학협회(神智學協會)를 창설한 후 자신의 저서 『비밀의 가르침』에서 인간은 일곱 종족의 조상을 거쳐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신지학이란 기독교 및 불교의 가르침에다 티베트에 사는 은자들로부터 직접 전수 받았다는 신비한 계시를 혼합한 것으로 그녀는 인류의 세 번째 종족이 레무리아인이라고 주장했다.

 

‘레무리아인은 남반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륙에서 살고 있었다. 모습은 거대한 원숭이와 유사하며 4개의 손을 지닌 것도 있고 머리 뒤에 제3의 눈을 지닌 것도 있었다. 언어는 갖지 못했으며 텔레파시로 의사를 전달했고 지능이랄 것은 없었으나 의지의 훈련으로써 산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후일 레무리아는 붕괴되어 아틀란티스가 되었다. 레무리아인의 후예는 오늘날에도 살고 있으며 애버리지니(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나 호텐토트나 파푸아인이 이에 해당한다.’

 

황당한 이야기일수록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마련으로 브레버스키의 주장은 윌리엄 스코트 엘리어트에 의해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 이야기』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제니퍼 웨스트우드의 글을 주로 인용한다.

 

‘레무리아인은 키가 약 4.5미터이며, 갈색 피부를 지녔고 얼굴에는 이마라고 할 만한 데가 없으며 턱이 앞으로 돌출해 있었다. 눈은 양미간이 매우 떨어져 있어서 새처럼 앞을 보는 동시에 옆쪽도 볼 수 있었다. 가장 기묘한 것은 발뒤꿈치가 대단히 튀어나와 있었기에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쪽으로도 쉽게 걸을 수가 있었다는 점이다. 파충류의 껍질을 벗겨 옷을 만들었고 한 손에는 나무 창, 한 손에는 애완용 공룡을 개처럼 끌고 다녔다.’

 

레무리아인들은 과거에는 알을 낳는 양성구유자(兩性具有者)였으나 이후 사람과 마찬가지로 성별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는데 아틀란티스 민족은 무려 100만 년 전부터 80만 년 전에 걸쳐 이미 그 문명의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6,500만 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공룡이 100만 년 전에 나타나 레무리아인들의 애완동물이 되었다니 인류학자들이 머리가 돌겠다고 말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여하튼 제니퍼 웨스트우드는 레무리아인들이 동물과 섞여 원숭이를 낳았을 때 진화를 도우러 왔던 신들은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신을 대신해서 그들을 도운 것은 금성에서 온 ‘불꽃의 왕’이었으며 그 덕분에 레무리아인들은 불사의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문명을 이룩하고 사람과 비슷해졌을 때 레무리아는 바닷속에 잠기고 말았다.’

 

엘리어트는 레무리아 대륙이 네 번에 걸쳐 사라졌는데 첫 번째는 80만 년 전, 두 번째는 20만 년 전, 세 번째는 8만 년 전에 일어났으며 마지막은 아틀란티스라는 이름으로 침몰한 기원전 9564년(솔론이 말한 연대)이라고 했다.

 

침몰된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은 5종족으로 나뉘어졌는데 첫째 종족은 인도에 살았던 아리안 족으로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 정도로 첨단 문명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종족이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를 건설했으며 세 번째 종족은 이란과 페르시아를 건설했다. 네 번째 종족은 셀틱 족이며 다섯 번째가 역사시대를 찬란하게 만든 그리스인과 로마인이라고 설명했다. 남·북 아메리카인들도 빠뜨리지 않아 그들을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라고 추가했다. 엘리어트의 주장은 한마디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인을 제외하고 모든 민족이 아틀란티스인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레무리아 대륙에서 허무맹랑한 내용이 많이 사라지고 다소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설들도 제기된다. 가장 주목받는 설은 레무리아 대륙이 아틀란티스 대륙과 거의 대부분 중복되는데 위치는 인도, 말레지아 반도와 인도네시아가 합쳐지는 태평양이라는 주장이다.

 

‘레무리아’란 말도 과학자들이 명명한, 레무리 원숭이가 살고 있던 대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과 인간의 원천지인 에덴동산 즉 낙원과 같은 뜻으로 풀이하며 연대도 매우 축소되어 약 2만년 정도로 상정한다. 이들은 레무리아-인도가 있던 곳은 모든 문명이 시작한 아버지 대지이며 레무리아-인도네시아 지역은 어머니와 같은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매우 황당무계한 내용 같지만 아직도 레무리아 대륙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은 사라진 레무리아 대륙이라는 단어가 갖는 매력 때문이다. 레무리아라는 거대한 대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면 그 속에 있었던 모든 보물도 함께 수장되어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그 보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로 인간이 그런 꿈을 포기할 리는 없는 일이다.(계속)

 

레무리아 대륙과는 달리 무 대륙은 비교적 근세인 1만 2000년 전에 태평양상에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대륙을 지칭한다. 지도를 보면 태평양상에 드문드문 섬들이 분산되어 있는데 이 섬들이 과거에 한 대륙으로 구성되어 있다가 갑작스런 격변에 의해 침몰되고 일부 섬들이 남아 있다는 설이다.

 

먼 옛날, 태평양상에 무라는 대륙이 있었다. 동쪽 끝은 현재의 하와이 섬, 서쪽 끝은 마리아나 군도, 남쪽은 파노베, 피지 등 여러 섬, 그리고 최동남단은 이스트 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동서의 길이는 8천 킬로미터, 남북이 5천 킬로미터로 태평양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며 중국 대륙의 40여 배에 달한다.

 

무 대륙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앙아메리카 고고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오귀스트 르 프롱종(Auguste Le Plongeon)과 브라쉐르 드 부르부르(Brasseur de Bourbourg)이다. 그들은 고대 마야인들의 기록인 『트로안느 서』에 의하면 마야인들이 아틀란티스의 ‘무 여왕’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했다.

 

‘무(MU)라는 진흙 언덕의 땅은 지금부터 8,060년 전에 6400만 주민과 더불어 대양 속으로···. ’

 

그들은 태평양에 무라는 대륙이 있었는데 ‘대양 속으로’라는 말은 지진에 의해 침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 대륙인은 마야뿐만 아니라 이집트인의 조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주장은 곧바로 학계로부터 반박을 받았다. 역사가 로버트 실버버그는 그들의 해석을 ‘이쑤시개로 거대한 다리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혹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영국의 제임스 처치워드 대령이 무 대륙은 실존했던 대륙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다소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그는 무 대륙에 관계하게 된 연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868년, 처치워드가 주둔한 지역에 대기근이 닥치자 난민들에게 영국 정부의 구호양곡을 배급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대가 주둔한 힌두교 사원의 고승(高僧)이 그에게 오래된 원반 형태의 점토판 2개를 보여 주었다. 고승은 아득히 오래 전 인류의 본고장에서 자신들을 가르치기 위해 찾아온 나아카루스 형제가 인간의 말을 새긴 점토판이라고 설명했지만 처치워드는 해독할 수 없었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처치워드 대령이 점토판을 해석하는 도중에 멕시코에서 미국의 지질학자인 윌리엄 니벤이 무 문자와 매우 비슷한 문자판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후 똑같은 문자가 마야의 고대 신전과 달력, 티세크의 돌기둥 및 아스코 파사르코의 「돌로 된 테이블」에서 발견되었고 이스터 섬에서도 유사한 문자가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처치워드는 무 문자로 된 점토판의 해석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트로안느 서』는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살았던 마야인들이 썼다고 여겨지는데 이 안에 ‘무’라는 설명이 있다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이다.

 

‘MU(무 또는 뮤)’란 말은 그리스어 알파벳 12번째 단어이다. 이 말은 원래 1864년 프랑스인 신부 샤를 브라쇠르가 마드리드 왕립역사학회 도서관에서, 스페인이 중앙아메리카를 정복할 때 참여했던 신부 디에고 데 란다가 작성한 『유카탄 사물기』를 발견하고, 그(샤를 브라쇠르)가 해득한 ‘마야 알파벳’을 기반으로 『트로안느 서』도 해독했다고 발표한 데서 출발한다. 그는 화산 폭발과 재앙에 의해 함몰된 나라의 이름에 해당하는 두 개의 마야 그림문자를 보고 ‘MU’라고 읽었다.

 

정통학자들은 란다가 해득했다는 마야 알파벳표 자체가 신빙성이 없으므로 오귀스트 르 프롱종과 브라쉐르 드 부르부르가 『트로안느 서』에서 ‘무(MU) 대륙’이라고 해석한 것은 물론 처치워드가 무 대륙이라고 주장한 것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정통학자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처치워드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 무 대륙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무 대륙은 낙원이었다. 무 대륙에는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무 제국이 번영하고 있었으며 황제는 라무라는 제관이다. ‘태양의 제국’이라고 불리는 무 제국은 건축과 항해술이 뛰어나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넓혔는데 식민지의 지배자들은 무 제국의 자손임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처치워드는 무 대륙의 후손이 이집트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졌다며 기염을 토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안데스의 잉카 제국에서 태양의 아들임을 뜻하는 것도 무 대륙에서 연유했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마야 것과 유사한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인도 역시 무 제국의 식민지였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처치우드가 자기 주장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책이 예기치 못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처치워드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다면서 세계 각지를 직접 답사한 후 1931년 뉴욕에서 잃어버린 무 대륙을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그의 발표에 학자들은 냉담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의 저서 『잃어버린 무 대륙』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계속하여 『무의 자손들』, 『무의 신성한 표상』, 『무의 우주력 1, 2』 등이 시리즈물로 발간되자 사람들은 무 대륙의 신화는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원래 논문이 아닌 대중지의 속성상 어떤 주제에 대해 과학적인 증빙이나 검증자료를 갖고 있어야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처치우드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일반인들에게 처치우드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에 편승한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무 대륙을 과거에 존재했던 대륙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처치워드는 격변이 생긴 이유도 설명했다. 무 대륙의 땅 밑에 있는 무서운 함정 즉 여러 층에 걸쳐 발달한 가스 구멍이 재난의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지각 내에 종횡으로 발달한 벌집 모양의 공동(空洞)에는 매우 폭발하기 쉬운 가스가 충만해 있으므로 이 가스가 폭발하면서 가스 구멍의 상층부가 허물어져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진과는 완전히 다른 재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무리아 대륙이나 무 대륙은 과학적 잣대만 대기만 하면 곧바로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데 오히려 묘미가 있다. 지질 연대상으로 보아 가장 최근의 알프스의 조산(造山) 운동은 적어도 6000만 년 전이다. 더구나 지각의 변화는 아직도 계속되어 지금도 조산기의 후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근년에 와서 첨단 과학 기술에 의해 무 대륙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중앙태평양 해저를 탐험했는데, 이들은 현무암질로 구성돼 있고 적어도 5억 년 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태평양의 섬들은 고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관되는 유적들이 많은 것을 근거로 무 대륙이라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태평양 제도의 역사는 대체로 3000년에 불과하다고 추정한다.

 

1846년 폴란드의 요한 크바리가 태평양상에서 수많은 유적을 수집한 후 선박에 싣고 귀국하는 도중 1874년 마샬 제도의 산호초에 좌초하여 모든 자료를 분실했다고 알려졌다. 무 대륙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들이 이때 모두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크바리가 수집했던 지역의 유적들의 추정연대는 겨우 1000년 전이었다.

 

결국 레무리아 대륙이나 무 대륙에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무리아 대륙과 무 대륙이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대륙’과 ‘초고대 문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계속)

 

〈대륙이 이동한다〉

 

위의 설명들은 대륙이 이동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딱딱하기 짝이 없는 지구의 대륙이 이동한다는 생각을 떠올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학교에서 지구 대륙이 움직인다는 것을 배운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지구 대륙이 움직인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 반하는 내용을 이야기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약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경시하기 마련이다. 학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거의 지식에 반하는 새로운 이론을 처음으로 주장할 때 대부분의 학자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유명한 다윈의 진화론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들로부터 당대에 가장 경원 받은 이론이라면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Lother Wegener, 1880∼1930)의 대륙이동설도 빠지지 않는다.

 

대륙이동설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내용을 포함하므로 매우 복잡한 이론이라 볼 수 있지만 이 이론의 시작은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는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지구의(地球儀)를 살펴보면 누구나 곧바로 마주보는 대륙들의 끝 부분의 윤곽이 조각 그림을 맞추는 식으로 맞추면 꼭 맞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까지만 해도 지질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가 지구 표면을 형성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전 세계에 걸친 재앙이 급격하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일으켰고 현재의 지형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17세기의 박물학자 안토니오 스니데 펠레그리니(Antonio Snider-Pellegrini)는 노아의 홍수로 지구 내부에 있던 물질들이 밀려 올라오자 대륙이 쪼개져 양쪽으로 밀려나면서 대서양이 형성되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1756년 테오도르 릴리엔탈(Theodor Christoph Lilienthal)이란 신학자는 성경에 근거하여 대륙의 해안선이 유사한 것은 지구의 표면이 노아의 홍수 때 지어졌음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

 

지구 내부를 이용해서 지구 표면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학자들도 있었다. 19세기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는 지구 내부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어 이 불이 영구적인 열원의 역할을 하며 산화를 끊임없이 일으킨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무엇 때문에 지구 속에 있는 불이 꺼지지 않는지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비가 대답하지 못했던 문제는 19세기 말에 방사능이 발견되면서 풀렸다. 우라늄, 토륨, 방사성 칼륨과 같은 방사성 원소가 여러 종류의 바위에서 발견되고, 이 방사성 원소가 다른 원소로 서서히 붕괴하면서 열을 내놓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20세기가 시작되자 성경에 씌어진 가설과 기존에 제시되던 지각변동의 이론들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것이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이 제기한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이다. 동일과정설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은 지난 세월에도 같은 크기로 지속되었으며 이 힘으로 과거에 일어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가설도 화석 형태의 과학적 증거가 나타나자 의심받기 시작했다. 지질학자들이 극지방의 만년설에서 카리브해 제도와 같은 적도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군과 동물군의 화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미국의 과학자 프랭크 테일러(FRank Bursley Taylor)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1억 년 전인 백악기 무렵에 달이 지구에 아주 가까이 접근해서 지구의 중력장에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조수의 힘으로 대륙이 적도 쪽으로 끌려왔으며, 이 과정에서 히말라야나 알프스 같은 거대한 산맥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가설로 미국의 하워드 베이커(Howard B. Baker)는 수억 년 전 금성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지구의 암석을 끌어 당겨서 달이 생겼고 이때 대륙이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육교가 있어야 한다〉

 

대륙의 이동이 레무리아 대륙의 근거가 되었으나 이 이론은 현대에 와서 오히려 레무리아 대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설명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이동설이라고도 불리는 복잡한 이론은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는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즉 마주보는 대륙들의 끝 부분의 윤곽이 조각 그림을 맞추는 식으로 맞추면 꼭 맞는다는 것이다. 당시의 과학적 정설을 뒤집고 지각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방법을 최초로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인 사람이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880∼1930)이다. 그런데 그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비과학자로 거명될 만큼 당대에 극심한 비난을 받았다.

 

베게너는 1880년 11월 1일 베를린에서 목사 리하르트 베게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스포츠를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극한 환경을 탐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자연과학 중에서도 천문학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다. 그 당시의 천문학이란 수학의 도움을 받아 천체의 구조나 물리학적 성질을 해명하는 것이다.

 

24세인 1904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자 당시로서는 새로운 과학 분야인 기상학 분야에 눈을 돌렸다. 마침 베게너는 형인 쿠르트 베게너가 근무하던 항공연구소에 들어가 형의 조수가 되었는데 이 연구소에서는 기구를 사용하여 고층 기상을 연구하고 있었다. 1906년에 형과 함께 최초로 기구를 이용해 북극 대기를 관측하여 용감한 연구원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이 당시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베게너 형제는 1906년 고든 베넷 비행기구 대회에 참가하여 독일과 덴마크를 가로지르고 카테갓 해협(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해협)을 건너서 다시 독일로 돌아오는 52시간 기구비행을 했는데 그것은 당시의 최장 체공 기록인 35시간을 크게 웃도는 세계기록이었다. 같은 해 덴마크 탐험대의 그린란드 북동부를 조사하는 일원으로 참가하였고 북위 77도에 있는 비스마르크곶의 기지에서 2년간 근무했다.

 

베게너는 그곳에서 동식물과 지질, 빙하, 기상 등을 조사했다. 베게너는 후에 극지의 얼음이 분열하여 빙산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초대륙의 분열과 대륙의 이동이라는 그의 이론을 떠올리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1909년부터 독일의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천문학과 기상학을 가르쳤다.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매우 머리가 좋고 명쾌한 강의를 하는 수재였다고 한다. 베게너는 31살인 1911년, 마르부르그대학 도서관에서 우연히 브라질과 아프리카 사이에 옛날에 육교가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스크레터의 논문을 발견했다. 두 대륙이 예전에는 하나로 붙어 있었다는 육교설은 그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다.

 

그는 곧바로 반문했다. 대체 어떤 육교란 말인가? 베게너는 육교가 아니라 대륙이 한때 붙어있다 떨어졌다면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확신한 후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마치 찢어진 신문지의 가장자리를 맞춰놓고 인쇄된 부분이 부드럽게 만나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 이것들이 실제로 일치한다면 이 두 곳이 실제로 이런 식으로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곧바로 그의 가설을 지지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가든스네일(garden snail)의 일종인 헬릭스 포마티아(Helix pomatia) 달팽이는 유럽 서부와 북아메리카 동부에만 생존한다. 상식적으로 지렁이나 달팽이 무리들이 몇 천 킬로미터나 되는 대서양을 건너 대안(對岸)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생물의 분포를 감안하면 대서양은 예전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단열(斷裂)이 생겨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두 대륙이 붙어 있다는 가설에 대한 증거는 지렁이나 달팽이뿐만 아니다. 지층 속에 묻혀 있는 수많은 고생물의 화석들도 이러한 교류가 가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 제도에서는 양치류나 소철처럼 열대지방에서 사는 식물의 화석이 발견되었고 남극에서 석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한편 남아프리카에서는 모래, 자갈, 둥근돌, 점토가 뒤섞여 나왔는데 이는 빙하가 녹은 흔적으로 이 지역이 한때 베게너가 살던 시절보다 훨씬 추웠다는 것을 암시했다. 아이오와, 텍사스, 캔사스주의 거대한 석고 퇴적층은 2억 5천만 년 전인 페름기에 이 지역이 아주 덥고 건조한 기후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캔자스나 유럽같이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소금퇴적층에서도 모두 같은 결론을 얻었다.

 

뭍과 뭍을 잇는 다리라는 뜻에서 육교(陸橋, land bridge)라고 부른다. 더구나 베게너는 대륙이 지구의 둘레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지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모순점들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비과학자>

 

1912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열린 독일지질학회에서 베게너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대륙의 위치이동’이란 용어로 폭탄을 터뜨렸다. 이 용어는 추후에 ‘대륙이동설’로 변경된다. 베게너는 하나의 판게아(Pangaea, 그리스어로 ‘모든 육지’ 라는 뜻)라는 초대륙이 있었기 때문에 식물과 동물들이 서로 섞일 수 있었고 그 후에 대륙이 분열하여 오늘과 같은 각 대륙이 생겼다고 했다.

 

베게너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제시했으나 그의 말을 들은 학자들은 냉담했다. 그가 얼마나 혹독한 비난을 받았는지는 다음과 같은 비판자의 글로도 알 수 있다.

 

‘우리 지구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비약적이고도 이상하고 구차스런 사실로 묶여진 것이 지나지 않는다. 이 가설은 연구자가 아니라 종교 맹신자가 주장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의 가설은 과학적이 아니다. 가설에 반대되는 대부분의 사실은 무시하고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골라서 쓰고 있으며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적 현실인 것처럼 다루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그의 설명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은 그의 논문을 과학으로 다루는 것조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비판도 나왔다.

 

‘이 가설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지지하는 유서 갚은 생각에 대해 털끝만큼의 존경심도 보이지 않는다. 이 가설은 도전적이고 화려한 모양새로 보통 사람들이나 과학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의 기본법칙에 합치하는 가설이라면 상상력에 호소해서는 안 되며 건전한 기초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전문가도 아닌 기상학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며 심한 비아냥거림까지 들은 것은 물론 그가 지질학에 대해 논문을 제출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결국 그의 논문은 베게너의 기대와는 달리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계속)

 

<베스트 작가가 된 베게너>

 

베게너도 자신의 이론을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고 답보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행운이라면 행운이 그에게 따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 기상예보장교로 복무하다 머리에 탄환을 맞은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심장의 결함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까지 각지의 측후소에서 기상 관계 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대륙이동설의 이론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15년에도 그에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행운이 다가갔다. 대륙이동설이 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하자 자신의 이론을 논문이 아니라 『대륙과 대양의 기원』이란 책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그의 책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이 많은 비판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책을 비판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논지를 펼쳤다.

 

‘지구의 초기 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지구에 관련된 모든 분야의 과학적 증거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직도 이 문제는 이 모든 증거를 통합해서 바라볼 때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지구에 관련된 모든 과학 분야에서 제공되는 증거를 통합해야만 ‘진실’을 알 수 있다. 알려진 모든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논리를 찾아내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또 우리는 새로운 과학적 증거를 발견하면 그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이론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진실이든 아니든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학자들도 그의 책에 있는 내용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3억 년 전 지구는 판게아라고 하는 거대한 하나의 대륙이었으나 점차 균열을 일으켜 이동함으로써 오늘날의 대륙들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을 이해하기 쉽도록 보다 이른 시기의 지구에 대한 최덕근 교수의 글을 참조하여 간략하게 설명한다.

 

학자들은 10억 년 전 지구상의 모든 땅덩어리는 초대륙 로디니아(Rodinia)를 이루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로디니아 대륙은 현재 태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대륙들이 모두 모인 거대한 대륙이었다. 이 당시는 태평양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 초대륙이 7∼8억 년 전에 두 개로 분리되기 시작했는데 이 갈라짐으로 인하여 현재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지형의 하나인 태평양이 탄생했다.

 

태평양의 탄생과 더불어 생성된 대륙의 하나는 오스트레일리아, 남극대륙, 인도를 포함했고 다른 하나는 북아메리카의 대부분(로렌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북유럽(발티카), 시베리아 그리고 동아시아의 일부(중한지괴)로 이루어졌다.

 

한편 8억 5천만 년에서 6억 년 전 사이에 대규모 빙하활동이 있었다. 특히 6억 년 전 빙하퇴적물의 규모와 범위는 엄청나게 커서 거의 적도지방까지도 빙하로 덮였다고 추정한다(이 때의 지구를 눈덩이지구(snowball Earth)라고 함). 이 빙하기가 끝난 직후 전 세계적으로 거의 동시에 에디아카라 생물군이라고 하는 다세포 동물이 등장한다.

 

5억 4천만 년 전에 시작된 고생대는, 로디니아 초대륙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개의 작은 대륙들이 또 다른 초대륙 판게아(Pangaea)를 형성한다. 초대륙 로디니아의 분리와 태평양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대륙의 분포를 바꾸어 곤드와나 대륙이 형성된다. 곤드와나 대륙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극대륙을 합친 대륙을 말한다.

 

그러므로 5억 년 전 대륙은 곤드와나, 시베리아, 발티카, 로렌시아 등 크게 4개로 나뉘어져 대부분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렌시아와 시베리아 대륙은 적도지방에 있었고 발티카는 남반구의 고위도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계속 지구는 변화되어 새로운 형태가 되었는데 베게너는 현재의 대륙들이 당시에 어떤 모양으로 붙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대륙은 연달아 분리되었다. 남극대륙,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아프리카가 약 1억 5천만 년 전인 쥐라기에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다음의 백악기에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얼음덩이가 갈라지듯 분리되었다. 중요한 것은 약 3백만 년 전에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가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그린란드, 캐나다가 약 100만 년 전 빙하기가 시작될 무렵에 분리되었다.

 

또한 베게너는 아이슬란드나 아조레스 군도를 이루고 있는 대서양 중앙 해령은, 지금은 대서양 가장자리에 있는 양 대륙이 찢어질 때 남은 물질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캥거루와 주머니쥐 같은 유대류가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에만 살고 있다는 사실도 베게너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멀리 떨어진 남아메리카와 연결 짓는 근거가 되었다.

 

베게너는 옛 시대의 기후로부터 대륙의 이동을 증명하는 사실을 찾아내는 동시에 북극이나 남극 또한 이동한 것도 발견했다. 더욱이 그는 오래된 지질 시대의 생물을 조사하여 고생물의 분포로부터도 대륙 이동설을 증명할 수 있었다. 베게너의 결론은 명쾌했다. 지구의 대륙이 거대한 바지선(barge船)과 같다는 것이다.

 

배에 짐을 실으면 바지선은 가라앉고 배 아래에 있던 물은 옆으로 밀려 올라와서 바지선이 좀 더 잠기게 된다. 바지선에서 짐을 내리면 바지선이 무게가 감소한 만큼 더 큰 부력을 받아 떠오르도록 물이 다시 이동한다. 베게너는 해양저는 지각보다 한 층 아래의 것으로 대륙이 그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층을 이루는 물질은 마치 빙산이 밀도가 더 큰 물에 떠 있듯이 대륙의 암석보다 밀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이는 해양저가 대륙과는 다른 재료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대륙을 잇는 육교가 있었더라면 이것은 이제 해양저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해양저의 밀도와 중력을 측정하거나 충분히 깊은 곳의 암석 견본을 채취할 방법이 없었다.

 

베게너의 가설의 장점은 산의 융기와 침강에 관련된 오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작 뉴턴은 지구 전체가 쪼그라들면서 산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구 표면이 굳기 시작하는 때, 지구 전체가 완전히 고정된 형태로 수축되기 전에 산이 지각에서 돌출했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지구의 내부는 한때 불지옥과 같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냉각되었으며 이런 냉각으로 인해 지구의 표면이 수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지구가 상당한 수준까지 냉각된 적이 없음을 발견했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당대에도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던 이유이다.

 

<적절한 이론 제시에 실패한 베게너>

 

1923년 <영국왕립지리학회>에서는 베게너를 지질학의 ‘지’자도 모르는 맹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물론 퍼즐에서 모양을 임의대로 바꾸어 조각들을 맞추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학자들로부터 극심한 비난을 받은 것은 당연히 제시되는 질문 즉 대륙이동의 원동력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의 움직임을 분석하면 인도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움직임과 같은 적도를 향한 운동과 남·북아메리카대륙에서 보여주는, 서쪽으로 향하는 운동으로 구분된다. 즉 대륙들은 서진했거나 또는 적도를 향해 운동하였다는 것이다.

 

베게너는 첫째 운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구는 거의 구형이지만 자전에 의한 원심력 때문에 약간 타원체(橢圓體)이다. 즉 남북방향의 지름보다 적도면의 지름이 약 20킬로미터 정도 더 길다. 그리고 지구 표면에서의 중력(인력과 원심력을 합친 것)은 엄밀한 뜻에서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지 않고 약간 벗어나 있다. 이러한 중력의 방향을 연직선(鉛直線)의 방향이라고 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대륙은 바다에 떠 있는 빙산에 비유된다. 그는 중력이 대륙괴(大陸塊)의 중심(重心)에서 연직선의 방향으로 작용하는데 이것이 적도방향 즉 극에서부터 대륙을 적도 쪽으로 움직이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 힘을 이극력(離極力, pole-fleeing force)이라 하며 헝가리의 외트뵈스가 처음으로 주장했다. 문제는 이극력의 세기였다.

 

베게너의 설을 근거로 몇몇 학자들이 이 힘을 계산했는데 이것은 중력의 크기의 수백 만 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작은 힘에 의해 대륙이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되었다. 베게너는 이 힘이 아무리 작더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작용하므로 대륙을 이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대륙을 움직이게 하려면 큰 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비판했다.

 

두 번째, 대륙이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더욱 학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첫째로 달이나 태양에 의한 조석력(潮汐力, tidal force)을 제시했다. 간단하게 말해 조석력 때문에 지각도 이동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각부분에 작용하는 조석력은 그 힘이 매우 작은 것은 물론 힘의 방향이 조석의 주기(週期)와 같은 주기로 변화하기 때문에 한 방향만의 힘이 되기 어렵다. 즉 조석운동으로 지각을 당기고 서쪽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영국의 지구물리학자 제프리즈 경은 대륙을 움직일 정도의 조석력이라면 지구의 자전은 1년도 못되어 멈추게 된다고 주장했다. 제프리즈 박사의 주장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공감을 받아 아예 베게너를 상대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학자들이 베게너의 가설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베게너가 대륙이동설이 일어나게 만든 힘을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고생물의 분포 등을 감안하면 과거에 대륙이 붙어있었다는 가설 자체를 무턱대고 폐기처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의 동식물 분포를 설명하는 데 있어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적어도 육교설보다는 보다 합리적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특히 네덜란드의 판 데르 그라흐트 박사는 1928년 뉴욕에서 열린 학회에서 대륙이동설이 학자들을 충분하게 이해시키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이동을 일으키는 힘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두둔했다.

 

여하튼 베게너가 대륙이동의 원인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데다가 1930년 그린랜드 탐험대의 탐험대장으로 참가한 후 조난당하자 그의 이론은 완전히 잊혀졌다.(계속)

 

<살아있는 지자기>

 

선원들이 나침반으로 항로의 방향을 파악하고 등산이나 하이킹을 갈 때 자석으로 북쪽을 알 수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방향을 알기 위해 사용되는 자침과 말굽 모양을 한 쇠를 끌어당기는 보통 자석의 원리는 같은 것이다. 또한 두 개의 자석은 N극, S극을 서로 대면 반발하고 N극과 S극을 대면 끌어당긴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자침의 N극은 왜 항상 북쪽을 가리킬까.

 

정답은 간단하다.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므로 자석의 S극과 N극의 위치가 각각 지리학적인 북극과 남극에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침이 엄밀히 정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소에 따라 약간 다르다. 이 벗어난 각을 편각(偏角, declination)이라고 하는데 서울에서는 진북에서 서로 6˚ 52’ 벗어나고 부산에서는 6˚ 18’ 기울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자침이 진북을 가리키는 곳은 적도(0˚)라는 선뿐이다.

 

자침은 또(만약 그 중심(重心)에서 받쳐주면) 수평이 되지 않고 북반구에서는 자침의 북을 가리키는 끝이 아래로 쳐지고 남반구에서는 남을 가리키는 끝이 아래로 쳐지게 된다. 이 수평에서 쳐진 각을 복각(伏角, magnetic dip, inclination)이라고 한다. 복각도 지구상의 장소에 따라 다른데 적도부근에서는 거의 0˚이며 고위도로 올라갈수록 커진다.

 

또한 학자들은 지구자기장이 시간적으로 일정불변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지자기는 근소하지만 매일같이 거의 규칙적으로 변화한다. 변화의 크기는 편각에서는 몇 분이고 자기장의 세기에서는 몇 만 분의 몇 가우스 정도라고 다께우찌 히도시 박사는 적었다. 이러한 규칙적인 변화를 지자기의 일변화(daily variation)라고 한다. 또한 지자기의 느린 변동을 영년변화(永年變化, secular vari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지자기의 영년변화는 서방으로 이동한다고 알려졌다. 이 서방이동 속도는 1년에 경도 0.18˚ 정도이므로 약 2000년 동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것이 자기풍(磁氣風)과 같은 빠른 변화는 지구의 외부에 있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지자기이상(非雙極子磁氣場)과 서방이동은 지구 내부에 원인이 있다고 추정하는 이유이다.

 

지자기는 학자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드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19세기 초 가우스가 처음으로 전 세계의 지자기를 측정하여 지구자석의 세기를 계산했을 때는 8.5(자기의 세기를 1025cgs 단위로 측정했을 때의 크기)였는데 이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1960년대에는 8.0 정도였다. 이 감소비율로 계속된다면 앞으로 2000년 후에는 지구자기장이 사라진다는 전망이다. 이 감소의 원인이나 또는 감소가 계속될 것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하튼 지자기가 살아있다는 데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지자기의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에 학자들이 도전했다. 이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 우주선 연구로 1948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블래킷(Patrick Maynard Stuart Blackett) 교수이다. 그는 지구나 태양 같은 거대한 물질의 덩어리 즉 천체가 회전하면 강자성체이건 아니건 반드시 자기를 띤다고 주장했다. 브래킷 교수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대학자이므로 그의 회전기원설은 학계에서 널리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곧바로 반박을 받았다.

 

만약 블래킷의 이론대로 물질의 회전이 자기의 발생을 가져온다고 하면 지구 전체가 지구자기를 일으킬 것이므로 지자기의 세기는 지하로 깊이 들어갈수록 감소되어야 한다. 덴마크의 해양관측선이 그의 가설을 증빙하기 위해 바다에서 엄밀한 실험을 거쳤는데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블래킷 교수는 여러 학자들이 자신의 가설 증명에 실패했다고 하자 자신이 직접 극히 미소한 자기장 즉 1000만분의 1 가우스 정도의 자기장을 측정하는 기기를 직접 제작했다. 이를 무정위자력계(無定位磁力計, astatic magnetometer)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실험 역시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륙이동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이론 검증에 실패한 무정위자력계 때문이다. 즉 그가 제작한 무정위자력계가 바로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결론을 말한다면 그가 완성한 초고감도자력계가 지리학에서 극히 중요한 분야가 되는 암석자기학(rock magnetism)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고고지자기법 등장>

 

고고학자들이 유적의 발굴 등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인간의 흔적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의 발자취를 찾는 것인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유물이 언제 만들어졌는가를 추정하는 작업이다. 이때 일단 살아있던 동식물의 잔해가 발견될 경우에는 C14 탄소연대측정법, 연륜연대측정법, 화학반응을 이용한 타조알 측정 등을 사용하여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려면 매우 특별한 환경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국 유기물의 존재가 없더라도 인간의 흔적을 갖고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은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방사선의 손상에 의해 시료를 측정하는 것이다. 방사선이 물질에 닿으면 그 물질에 어떤 흠집을 남긴다. 그런 흠집은 연대측정뿐만 아니라 방사선의 계측에도 많이 사용되는데 대표적으로 열형광측정법(TL법), 전자상자성공명법(ESR법), 피션트랙법(FT법)이 있다.

 

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토기이다. 이때에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이 유명한 열형광연대측정법으로 토기나 화산재 등이 흡수한 자연 방사선량을 측정하여 연대로 환산하는 것이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단군릉 유골 어떻게 측정했나?(1), (2)」, 사이언스타임스, 2005. 11.22-11.29)를 참조하기 바란다.

 

근래에 각광받고 있는 측정법이 고고지자기법(考古地磁氣法)이다. 학자들은 자석이 남북을 가리키는 이유로 지구가 커다란 자석으로 되어 있다고 추정한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지구의 자석은 정북 방향에서 다소 벗어나 있다. 또한 편각과 복각(伏角)은 일정하지 않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 그런데 과거의 가마터에서 탄 흙이나 화산이 폭발하여 멀리 날아간 화산재 속의 자성광물은 당시의 편각과 복각이 기록되어 있다. 즉 과거의 자기장이 일종의 ‘화석’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단원은 다께우찌 히도시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다.

 

연대를 알고 있는 시료를 이용하여 편각과 복각이 변화하는 것을 나타내는 ‘지자기의 영년변화도(永年變化圖)’와 대비하면 언제라는 시기를 알 수 있다. 연대를 알고 싶은 시료의 편각과 복각을 측정하여 영년변화도에 맞춰 보면 그 시료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암석이나 소토(燒土)가 지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며 이 분야를 암석자기학이라고 한다.

 

암석이 강한 잔류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화산에서 분출되어 냉각된 용암에서 처음 발견했다. 이를 열잔류자기(熱殘溜磁氣, thermo-remnant magnetization)라 하는데 이런 자기는 단순히 강한 것뿐만 아니라 안정도도 매우 높다. 그런데 모든 암석이 강자성(强磁性)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의 암석은 주로 규산염광물로 되어 있다. 많은 암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석(長石)이나 운모(雲母)들이 규산염광물의 예이다. 이들 모두 비강자성인에 암석에는 극히 소량의 철산화물도 포함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철석(磁鐵石, magnetitie)과 적철석(赤鐵石, hematite) 두 종류로 화학식은 Fe3O4와 Fe2O3이다. 그런데 천연에서 산출되는 암석 중에서 발견되는 자철석과 적철석은 흔히 소량의 철원자들이 다른 광물의 원자와 교대(交代)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철산화물을 함티탄자철석(titano-magnetite) 또는 함티탄적철석(titano-hematite)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함량이 미량이지만 감도가 높은 측정장치로 잔류자기를 측정할 수 있다.

 

여하튼 암석이나 소토의 자연잔류자기의 방향을 측정하여 먼 과거의 지자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고지자기학(paleomagnetism)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지질학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연의 암석 중에서 현재의 지자기방향과 아주 반대로 향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남북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최근 340만 년 사이에 세 번 역전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영년변화도를 사용하는 고고지자기법으로는 수천 년 전이 한계이나 학자들은 이를 보다 발전시켜 몇 십만 년 전은 물론 몇 억 년의 지자기 기록도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부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대륙이동설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에 고지자기학이라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연구 분야의 등장은 베게너에게 그야말로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의 학자들은 기존의 통설과는 달리 지각판의 구조와 성분이 균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양 바닥의 지각판은 두께가 대략 6∼7킬로미터이다. 대륙 지각판은 사실상 해양지각판 위에 얹혀 있는데 그 평균 두께는 대략 32킬로미터이다. 두 지각판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해양지각판에는 대륙지각판에 존재하는 화강암층이 없다. 따라서 대륙의 형성은 단순히 육괴(陸塊)의 상승과 하강으로만 볼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953년 중앙해령 사이에서 발견된 열극(해저산맥 사이로 기다랗게 벌어진 틈새)을 바탕으로 미국 프린스턴대학 해리 헤스(Harry Hammond Hess) 교수가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을 창고 속에서 끄집어냈다.

 

현대적인 지형측정법과 지구 중심부 샘플을 조사한 결과 지각은 종래와는 달리 매우 동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캠브리지 대학의 란콘은 여러 지질 시대에 걸친 유럽의 암석을 측정한 결과 신생대 제3기 이전에 자극의 위치가 시간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러한 자극의 경로는 북미에서의 암석과도 유사한 모습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질 시대에 따른 대륙이동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헤스는 동부 태평양에서 남북 방향으로 연속되는 특이한 자장 이상대(고지자기 줄무늬)가 존재하는 사실을 발견하여 해저확장설을 내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헤스 교수는 맨틀 대류가 위로 치솟는 지대가 대양저산맥이며 그 정선(頂線)의 V자곡(字谷) 아래로는 맨틀에서 상승하는 현무암의 마그마가 계속 공급되어 대류로 인하여 좌우로 벌어지는 틈을 메우며 굳어지기 때문에 대양지각은 새로이 창조되고 해저는 좌우로 확장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런 현상이 여러 해양에서도 관측되자 바인과 매튜스는 1963년 자장 이상대는 해저 확장의 결과라고 발표했다. 해양저가 확장하고 지자기의 반전이 일어난다면 현무암질 마그마는 해령축에서 상승하여 암맥으로 변하게 되며 이것이 축으로부터 떨어져 옆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대륙이동설로부터 출발한 해저확장설은 판구조론이라는 새로운 지구과학을 유도한다. 종래의 관점이라면 지구의 횡단면에 보이는 지구의 중심부는 용융된 납과 완전히 용해되지 않은 암석층에 둘러싸여 있고 그 표면을 얇고 견고한 지각이 감싸고 있다. 현대에도 이런 지각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으나 과거의 이론과는 달리 지각 그 자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판구조론이다.

 

대륙이나 거대한 섬 같은 지각층 윗부분의 지괴(地塊)는 지각층 아랫부분의 플레이트 같은 판상(板床) 위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 세계적으로 암석권으로 알려진 이런 지각판은 취약권이라 불리는 반 액체 상태의 광대한 맨틀 위에 떠 있다. 그 결과 취약권을 뚫고 나온 용암이 두 개의 지각판을 갈라놓는 틈새로 흘러들어 가면서 이 지각판과 대륙이 분리된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대서양에는 중부 대서양 해령(海嶺)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해저 분지가 존재한다. 이는 동서 양쪽의 해저 분지가 분출된 용암이 양쪽으로 흘러내려 응고하면서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의 거대한 지각판은 이런 광대한 분지의 점진적인 확대로 인해 계속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이론은 레무리아 대륙의 존재를 믿는 연구가들에게 치명적인 사망선고를 내렸다. 결론은 대륙 규모의 땅덩이가 대서양 해저 분지에서는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대서양의 함몰지대라고는 카리브해 근처에 있는 작은 규모의 지대 하나 뿐인데 그 역할 또한 남·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지각판의 장력을 조절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대륙 규모의 레무리아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 또한 지각판 위에 있어야 하는데 거대한 지각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륙의 이동은 무려 2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억 년 전이라면 지구를 석권했던 공룡들의 세상이며 인간이 속한 포유류는 지구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시대이다. 레무리아 대륙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데 문명이 있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다.

 

판구조론을 도입하면 대양의 바닥이 왜 상대적으로 육지보다 젊은 편인가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다. 대양의 바닥 중에서 1억7,500만 년보다 오래된 곳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대륙의 암석들이 수십억 년씩 된 것과 비교하면 수수께끼와 같은 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헤스는 판구조론을 도입하여 이 질문을 매끄럽게 해결했다. 그는 바다 밑에 있는 암석들은 해변에 도달할 때까지만 존재한다고 보았다.(계속)

 

<아직도 풀리지 않는 지구>

 

지구는 암석으로 된 행성들 중에서 유일하게 판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구가 그런 구조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금성은 크기나 밀도가 지구와 거의 같은데도 불구하고 판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지구의 크기나 밀도 때문은 아니라고 인식한다.

 

학자들이 판구조 자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지만 판구조가 지구에 있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는 공감한다. 물리학자인 제임스 트레필은 ‘지질학적 판들의 연속적인 움직임이 지구 생명체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판구조에 의해서 나타나는 기후의 변화를 비롯한 변화들이 생물의 지능을 발달시킨 중요한 요인일 것이라고 적었다. 지구에서 일어났던 몇 차례의 멸종 사태 중에서 일부는 대륙의 이동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토니 딕슨은 암석의 역사와 생명체의 역사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5억 년 동안에 바닷물의 화학적 조성이 갑자기 크게 변했는데 그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들은 대부분 생물학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관계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설명은 가끔씩 바닷물의 화학적 조성이 크게 바뀌는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저 산맥이 열리고 닫혔던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판구조론으로도 아직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점은 많이 있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 덴버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덴버의 고도는 1천600미터이지만 그런 융기는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다. 공룡들이 지구를 활보하고 있을 때 덴버는 수심 수백 미터 아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버의 암석에서는 판들의 충돌이 일어났을 때 예상되는 균열이나 변형을 찾을 수 없다.

 

학자들은 덴버는 판의 충돌에 따른 영향을 받기에는 그 경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추정한다. 만약 그런 일이 생겼다면 양탄자의 한쪽 끝을 밀었더니 다른 쪽에 주름이 생겼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즉 덴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지난 수백만 년 동안 빵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밀려 올라간 것이다.

 

아프리카 남부도 판구조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폭이 1천600킬로미터나 되는 지역이 지난 1억 년 동안 거의 1천600미터나 밀려 올라갔지만 판들의 활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보인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는 기울어지면서 가라앉고 있다. 그 지역의 판은 지난 1억 년 동안 아시아를 향해 북쪽으로 움직였고, 앞부분은 180미터나 아래로 꺼져버렸다. 인도네시아는 아주 느리게 가라앉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를 함께 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들은 모두 판구조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판구조론도 엄밀한 의미에서 완벽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베게너의 이론을 도입하지 않고는 지구 과학의 어떤 문제도 논할 수 없다. 50년 앞서서 세운 지구 과학의 기초가 현대 지구과학의 전체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도출할 것으로 생각된다. 베게너로 돌아간다.

 

1929년 베게너는 다시 그린란드를 탐험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는 그가 대장이 되어 내륙 빙하를 조사하여 1930년에는 내륙 빙하의 두께가 무려 1천800미터나 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1930년 11월 1일 50세의 생일에 기지를 나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다음해 5월, 대원들은 그의 스키와 잠든 채로 사망한 유체를 발견했다. 심장마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원들은 그를 얼음 속에 장사 지냈다. 그가 심혈을 기울려 주장한 대륙 이동설이 새로운 학문에 의하여 증명되기 20년 전의 일이다. 레슬리 앨런 호비츠는 그가 보통 사람의 수명인 70살까지만 살았더라도 한때 욕을 먹었던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인정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비무장지대는 다이아몬드의 보고〉

 

지구가 만든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보석. 단단함과 희소성으로 보석의 왕자로 군림하는 다이아몬드는 매우 값이 비싸기 때문에 수많은 전설을 갖고 있다. 다이아몬드로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사랑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동화책에도 나오며, 영국 국왕의 왕관에 박혀 있거나 터키 황제나 무굴 황제가 소유했던 다이아몬드는 수많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소장한 사람마다 불행을 겪는다는 호프(Hope) 다이아몬드는 20여 명이 불의의 사고 등으로 사망했지만 이 보석을 사들여 미국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 기증한 사람만은 죽음을 면했다는 전설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원석은 1905년 쿨리난이 발견했는데 무게가 3,106 캐럿, 0.6킬로그램으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왕홀에 장식되어 있다.

 

다이아몬드의 생산지는 인도, 브라질, 오스트레일리아 및 아프리카 몇 몇 국가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더욱더 희소성을 높여주는데 이런 다이아몬드가 한국에서도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놀라운 추정이 나오게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판구조론(Plate tectonics) 때문이다.

 

어떤 방법이든 대륙과 대륙이 충돌하면서 그 사이에 있던 바다가 닫히는 현상을 대륙충돌이라고 부른다. 가장 잘 알려진 대륙충돌은 인도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유라시아 대륙과 충돌한 것이다. 히말라야 산맥 및 알프스 산맥이 바로 이들 각각의 대륙충돌에 따라 생긴 것이며 티벳 지방에서 자주 일어나는 대규모 지진은 지금도 충돌 현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판구조론에 따르면 곤드와나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중에서 북중한판과 남중한판이 있는데 이 두 개의 판에 한반도를 구성하는 3개의 작은 조각이 들어 있었다. 북중한판에는 한반도의 남동쪽에 해당하는 영남지괴, 북한에 해당하는 앙림지괴가 있고 이중에 북중국지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남중한판에는 남중국을 포함해 한반도의 가운데 부분인 경기지괴가 있다.

 

2천만 년이 지난 2억4천만 년 전, 먼저 출발한 북중한판은 서쪽 귀퉁이에서 로라시아대륙과 부딪친다. 이때 북상하던 남중한판이 다가와 둘이 충돌한다. 이 충돌로 북중한판은 북중국지괴(낭림지괴I)와 영남지괴(서남일본지괴II)의 두 조각으로 나눠진다. 이때 남중한판이 속해있는 경기지괴가 이들 사이에 끼게 되면서 점차 오늘날과 같은 한반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때가 잘 알려진 공룡시대의 쥐라기 중기로 약 1억8천만 년 전이다. 이상과 같은 시나리오는 1950년부터 등장한 고지자기 자료를 토대로 계산한 시뮬레이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대륙충돌에 의해 한반도의 임진강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한국에서 다이아몬드 생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높여준다.

 

두 개의 대륙이 충돌했다면 충돌부가 압축된다. 충돌한 두 대륙의 지각물질은 히말라야와 같은 거대한 산이 형성되며 땅 아래로는 이보다 훨씬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이때 지각물질이 들어가는 깊이는 약 100킬로미터 이상의 맨틀 깊이 수준인데 이곳에서 다이아몬드나 코어사이트(coesite)와 같은 고밀도 광물과 에클로자이트(eclogite)라고 하는 암석 등 초고압 광물이 형성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이아몬드는 그 성분이 탄소(C)이다. 탄소는 낮은 압력에서 흑연이라는 광물로 존재하지만 아주 높은 압력에선 결정구조를 바꾸어 지구상에서 가장 단단한 천연 광물이 다이아몬드로 변한다.

 

한편 코어사이트는 그 성분이 SiO2로 우리가 흔히 보석으로 쓰는 수정과 같은 성분이다. 보석명인 수정의 광물명은 석영인데 흑연이 다이아몬드로 바뀌는 것처럼 아주 높은 압력에서는 그 구조를 바꾸어 코어사이트가 된다. 땅속 깊은 곳에서 형성된 이들 초고압 광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지표로 올라올 수도 있기 때문에 다이아몬드를 비교적 낮은 지층에서 채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한반도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올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한반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중국대륙과의 연계성 때문이다. 중국의 충돌대는 중국 중앙부에 동서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오피올라이트, 에클로자이트, 다이아몬드, 코어사이트 등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중국 대륙에서 확인된 대륙충돌대의 동쪽 연장이 바로 임진강대라는 점이다.

 

서울대학교의 조문섭 교수는 임진강대에 있는 암석의 변성조건이 중국 충돌대에서 흔히 관찰되는 온도-압력 조건과 유사하며 임진강대 암석이 변성 작용을 받은 시기가 중국 충돌대에서 충돌 시기를 나타내는 변성암의 변성 나이인 삼첩기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한국에서 대륙충돌의 확실한 증거인 에클로자이트, 다이아몬드, 코어사이트 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이들 초고압 변성광물이 한반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초고압 변성광물이 지표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변성작용을 받아 흑연이나 석영으로 완전히 다시 변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한반도는 충돌시기 이후인 쥐라기와 백악기 동안에 판의 경계부에 위치하면서 많은 화성활동을 받은 흔적을 갖고 있는데(불국사 화강암 등) 이 화성활동이 공급하는 열로 인해 초고압 변성작용 흔적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지질현상과 관련 없는 것으로 아직 인간이 어딘가에 있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임진강대는 비무장지대를 포함하므로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여하튼 우리나라에서 에클로자이트 등 초고압광물을 찾지는 못했지만 석류석으로 이뤄진 각섬암은 임진강대와 춘천 및 홍성-청양 부근의 서부 경기육괴에서 발견되었다. 석류석 각섬암은 중국의 대륙충돌대에서도 흔히 발견되며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에클로자이트가 지표 쪽으로 올라올 때 각섬암으로 바뀌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석류석 각섬암 역시 초고압 조건을 경험했을 것으로 인식한다.

 

타 지역의 다이아몬드가 대륙의 충돌대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을 감안할 때 한반도 지역에서도 고압광물인 다이아몬드가 생산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의 일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예가 있기는 하다. 1935년 2월, 지질학자 박동길 교수가 사금과 석류석을 감정하는 도중에 0.1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것이다. 이 다이아몬드는 현재 서울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되살린 아틀란티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아틀란티스가 실존한 대륙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이 아틀란티스를 찾는데 열중했지만 그들조차 아틀란티스 대륙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 대륙을 상상의 대륙(이상향) 즉 플라톤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대륙으로 인식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 발견된 서쪽의 거대한 대륙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믿었다. 서인도 제도나 아조레스 제도, 카나리아 군도, 그 밖의 대서양 섬들이 오리칼크와 원형들의 섬, 항구와 운하로 가득 찬 플라톤의 사라진 대륙의 잔재로 보기도 했다.

 

그러므로 1553년 후란시스코 로페스는 신대륙은 아틀란티스로 재명명(再命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고대에 유럽 및 아프리카 사람들과 활발한 무역을 했을 것이며 이집트인들이 이 사실을 목격했을 것이라고 로페스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 사라졌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높은 수준의 문명인도 아니었고 유럽이나 아프리카와 교역할 정도의 항해술조차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16~19세기에 아틀란티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고조되어 이론가들은 성서와 고전 문헌, 옛 신화와 아마추어 고고학의 지식 등을 동원하여 아틀란티스의 위치가 대서양뿐만 아니라 스웨덴, 북해, 지중해, 심지어는 사하라 사막이라고 주장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열기에 불이 붙은 것은 1871년 독일의 거부 슐레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견했고 1901년 아디 에반스가 크레타 섬에서 미노아 문명을 발견했을 때였다. 슐레이만의 트로이 발굴은 그야말로 동화와 같은 이야기이다. 그리스 신화를 적은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진 슐레이만은 주변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트로이의 유적 발굴에 집착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슐레이만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그가 고고학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전설만 믿고 주먹구구식으로 엄청난 자금을 들여 트로이 발굴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슐레이만이 무모하게 트로이라고 단정한 히살리크 언덕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영 엉뚱한 장소였다.

 

전문가들은 트로이로 추정되는 위치를 바닷가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부나르바시 마을 근처라고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슐레이만은 『일리아드』에 의하면 트로이는 바닷가에 있으므로 히살리크 언덕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발굴에 대한 모든 자금을 발굴 책임자가 부담하고 관계 정부와 발굴되는 유물을 분배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발굴 위치를 잘못 선정한다는 것은 도박보다 더 위험한 투기로 비춰질 때였다.

 

그러나 결과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조롱 받아야 할 사람은 슐레이만이 아니었다. 유명한 ‘프리암의 보물’이 들어있는 상자를 열자 팔찌, 브로치, 목걸이, 접시, 단추 등등 금으로 만든 보물들이 쏟아졌다. 슐레이만이 예측한 장소에서 무려 8700점이나 되는 보물이 나왔고 1만6000개의 순금 조각으로 된 금관이 나왔다. 호머의 이야기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트로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 것임이 증명된 것이었다.

 

미노아 문명의 황소 숭상 역시 전설로만 알려졌으나 에반스가 크레타 섬에서 찬란한 색채의 벽화 및 미로를 발견함으로써 그 역시 실존하였던 문명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고대 신화로만 인식되었던 전설들이 실제로 세상에 나타내기 시작하자 아틀란티스 대륙도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스의 미카엘 공은 이렇게 말하였다.

 

“호머의 명예 회복과 그를 믿었던 사람들의 늦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아틀란티스의 실존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마련해 주게 될 것이다.” (계속)

 

<논란 있는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은 레무리아나 무 대륙과 같이 허황된 것은 아니지만 트로이의 전설과도 큰 차이점이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플라톤이 최초로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서는 플라톤이 살아 있을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당시 유명한 지질학자인 스트라본이 플라톤의 이야기는 모두 상상에 의해 꾸며진 것이라고 믿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의 이야기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반면 플라톤의 증조부인 크레이토스를 비롯한 많은 로마인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실존하였던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였다. 특히 지리학자 포세이도니우스는 자신의 저서 『지리(地理)』에서 아틀란티스의 실존을 기록했고 로마의 역사학자 프린느도 서기 77년에 발간된 『자연 역사』라는 책에서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대륙이 대서양 부근에서 사라졌다고 쓰기도 했다. 그리스의 크라스톨은 이집트의 사이스 신전에서 아틀란티스에 관련된 기록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더구나 5세기의 철학자 프로클루스는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마루셀루스의 필사본 내용을 들어 아틀란티스에 관한 전설이 먼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집되었으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아카데미에서 아틀란티스의 진위에 대해 오랫동안 활발하게 토론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집트의 중왕조시대(기원전 2000∼1750)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큰 증거로 삼는다.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있는 파피루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콜린 윌슨은 적었다.

 

“어느 날 파라오의 광산을 향하던 배가 큰 파도를 만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들 중 한 이집트 선원만이 나무 조각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섬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한 마리의 황금용이 살고 있었다. 용은 곧 그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다. 용의 말에 의하면 그 섬에는 지난날 75마리의 용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멀리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동료들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용은 이어서 미래를 예언했다. ‘당신은 이집트의 배가 와서 구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 섬은 바다에 잠길 운명이므로 당신은 두 번 다시 이 섬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만의 트로이 발견과 에반스의 크레타 문명 발굴로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을 때 미국의 정치가이며 국회의원이었던 이그나티스 도넬리(1831∼1901)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도넬리는 28세의 나이에 미네소타주의 부지사로 당선될 정도로 정치적인 역량이 있었는데 그 후 계속 국회의원으로 종사하면서 의회에 소장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그는 『위대한 암호』라는 책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모두가 프란시스 베이컨(Sir Francis Bacon) 경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 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가 발표한 『노아 홍수 이전의 아틀란티스 대륙』(1882)과 『신들의 황혼, 불과 돌의 시대』(1883)가 현재까지 50회 이상 재판(再版)됐을 정도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심한 지진과 홍수로 인해 하룻밤과 낮 사이에 없어졌다’라는 플라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전설을 수집·정리하여 아틀란티스에 대한 13개의 명제를 발표했다. 고이즈미 겐다로의 설명을 인용한다.

 

① 옛날에 지중해 저편 대서양에 큰 섬이 있었다. 고대인들은 그 섬을 아틀란티스라 불렀다.

 

② 플라톤이 묘사한 이 섬은 오랫동안 우화로 취급되었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③ 미개 상태의 인류가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곳은 아틀란티스이다.

 

④ 세월이 흘러 아틀란티스는 많은 인구를 거느린 강국이 되었다. 인구가 많아지자 그들이 각지로 퍼져 멕시코 만, 미시시피 강, 아마존 강, 남미 태평양, 지중해, 유럽, 아프리카의 서안, 발트해, 흑해, 카스피 해 등의 주변에 문명 국가를 건설했다.

 

⑤ 아틀란티스인들이 세운 국가들은 ‘대홍수 이전’이다. 에덴 동산, 헤스페리데스의 나라, 엘리시온의 들판, 알키누스의 나라, 올림푸스 등등 전설상의 낙원은 먼 옛날에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행복한 가운데 세웠던 국가들에 대한 기억의 일부분이다.

 

⑥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인도인,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숭배하던 신과 여신은 아틀란티스의 왕이나 영웅들의 이름이다. 신화 속에서 이러한 신과 여신들이 한 일들은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⑦ 이집트나 페루의 태양 숭배 신화는 아틀란티스에서 기원한다.

 

⑧ 아틀란티스인에 의해 건설된 가장 오래된 식민지는 아마도 이집트로 보인다. 이집트 문명은 아틀란티스 섬의 문명을 그대로 답습했다.

 

⑨ 유럽의 ‘청동기 시대’의 기물은 아틀란티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틀란티스인들은 최초의 철기 제조자이기도 하다.

 

⑩ 유럽 알파벳의 기본이 된 페니키아의 알파벳은 아틀란티스의 알파벳에서 유래한다. 이 알파벳은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인에게도 전해졌다.

 

⑪ 아리아계, 즉 인도 유럽어족, 셈어족, 투란계(우랄 알타이어족)의 발상지도 아틀란티스이다.

 

⑫ 아틀란티스는 자연의 큰 변동에 의해 섬 전체, 주민들과 함께 물 속에 수장되었다.

 

⑬ 극히 일부 사람만이 배나 뗏목을 타고 난을 피해 아틀란티스의 대재앙을 동과 서에 알렸다. 이 이야기가 구세계와 신세계(동반구와 서반구) 각 지역의 대홍수의 전설로 내려온다.

 

도넬리의 견해는 아틀란티스가 모든 인류 문명의 근원으로 모든 고대문명은 아틀란티스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모든 고대 문명의 기원은 아틀란티스이므로 그들이 전파한 문명의 범위는 전 세계에 걸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대서양 한가운데 존재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증거로 각 대륙에 퍼져 있는 피라미드, 미라의 보존 기술, 태양력, 그리고 대홍수의 전설 등을 예시했다. 즉 아틀란티스 대륙이 대홍수로 가라앉은 후 두 문화권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제각기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은 앞에서 설명한 무대륙과 거의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무대륙은 태평양에 있다고 주장되는 반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대서양에 위치한다는 것이 다소 다르지만 도넬리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거론한 지역을 거의 모두 답사한 후 방대한 자료로 자신의 주장을 발표했다.

 

그의 주장 중에서 특이한 것은 흥미로운 생태계의 수수께끼도 아틀란티스 대륙의 증거로 제시할 정도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유럽에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한 후 사르가소 해에서 산란하는 뱀장어의 번식 습관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강들에서 지낸 과거의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넬리는 아틀란티스 제국의 주민은 3개 인종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개화된 인종은 체격이 작은 적갈색 피부의 종족으로 오늘날의 중앙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베르베르족, 이집트인들과 다소 비슷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 인종은 셈의 후손들로서 황색인 또는 우랄알타이어족일 가능성이 많다. 세 번째가 체격이 크고 피부가 흰 인종으로서 오늘날의 그리스인이나 스칸디나비아 또는 켈트족과 유사하다. 이들 세 인종이 서로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다투기도 했으나 서로 협조하여 매우 세련된 청동기 문화를 창조했으며 대재난이 이들을 덮칠 때에는 철기시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러 시대를 거쳐 아틀란티스는 인구수가 많은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멕시코만, 미시시피 강, 아마존 유역,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지역, 지중해, 유럽의 서부 지역 및 아프리카 등, 이 모든 지역으로 번져 나가 이들 지역은 문명인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다.”

 

도넬리의 신생 독립국가인 미국이 아틀란티스의 식민지라는 주장이 미국인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도넬리는 추측하기를 “가장 오래된 아틀란티스의 식민지는 아마도 이집트일 것이며, 이집트 문명은 아틀란티스에서 번성했던 문명의 복제판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도넬리의 주장은 미국 전역을 아틀란티스 열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1883년 뉴올리언즈에서는 아틀란티스를 주제로 한 사육제(Mardi Gras)를 기획할 정도였다.

 

여하튼 도넬리는 방대한 자료로 대홍수 이전의 인류 문명의 근원이 되었던 대륙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했으나 플라톤의 이야기에 너무나도 집착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수긍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내용을 많이 첨가하여 신뢰성을 훼손하기도 했다.

 

도넬리부터 비로소 아틀란티스 연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루이스 스펜스는 도넬리의 가정에다 좀 더 과학적인 근거를 보완하였다. 스펜스는 『아틀란티스 대륙의 문제점』이라는 책에서 북대서양의 가장 큰 부분이던 광대한 대지의 지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고 발표하였다. 그 대지가 분열되어 2개의 다른 섬으로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쪽에 위치한 서인도 제도이며 나머지가 지브롤터 해협, 즉 스페인 반도 옆에 존재했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인도 제도의 마야 문명은 아틀란티스 문명이 신대륙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펜스와 도넬리의 큰 차이점은 스펜스가 아틀란티스인이란 유럽 석기 시대의 크로마뇽인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틀란티스 문명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도의 문명이라고 설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으며 아틀란티스가 하룻밤과 낮 사이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 지각의 변동에 따라 점점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면서 마침 UFO 신드롬도 가세하며 햅굿, 플렘-아스 부부, 핸콕 등이 가세한다. 특히 찰스 벌리츠(Charles Berlitz)가 아틀란티스 대륙과 버뮤다 삼각지대의 수수께끼들을 절묘하게 버무려 『아틀란티스의 미스터리』, 『잃어버린 세계의 미스터리』, 『버뮤다 삼각지대』 등을 발간했는데 이들 모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통에 아틀란티스는 실존해야 하는 고대문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벌리츠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초고대문명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희미하게 존재했다는 근거로 이스탄불에서 발견된 피리 레이스의 남극 지도를 들었다. 이 지도에는 현재 수천 미터에 달하는, 얼음 밑에 묻혀 있는 남극 대륙의 해안선이나 오지의 지형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아틀란티스인들의 작품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적었고 과거에도 전기가 사용되었으며 확대용 렌즈가 있었고, 톱니바퀴가 있는 태엽 장치도 발견되었으며 화약도 기원전에 사용했음이 분명한 증거들이 발견되었다며 첨단 지식들이 미세하나마 세계 각지에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 기록된 지식 중에서 현재 1/10도 남아있지 않은데 그 이유를 광신적인 종교인들이 무자비하게 파괴한 것은 물론 첨삭하거나 왜곡시켰기 때문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면서도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이 남긴 거석 문화 유물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집트는 아틀란티스인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도입할 수 있었고 이집트의 후예들이 영국의 스톤헨지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나 잉카 문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유명한 이스터 섬의 석상이나 나스카 문양도 거석 문화에 포함시키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루이스 스펜스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하룻밤과 낮 사이에 대륙이 사라졌다는’ 설명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1만 2000년경에 최후의 빙하가 급격히 녹았을 때 해수면이 상승하여(120∼160미터) 대륙 연안의 평지와 섬들이 물 속에 잠겼는데 그 때문에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초고대문명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가 예언했던 비미니에서 사라진 건축구조물들이 갑자기 발견된 사실을 들어 이들 지역이야말로 아틀란티스 대륙의 일부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계속)

 

근래 아틀란티스가 쿠바 지역이라는 색다른 주장이 세계를 강타했다.

 

앤드류 콜린스는 『아틀란티스로 가는 길』에서 전 세계 각지의 고대문명 유적지 탐사를 통해 아틀란티스가 ‘신화’가 아닌 ‘실재’였다고 주장했다. 그가 기존의 저자들과 달리 주목을 받은 것은 이제까지 불변의 것으로 여겨졌던 플라톤의 세 가지 설명에 대해 수정을 가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선 플라톤이 말한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거대한 대륙이란 아틀란티스 제국의 실제 크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력이 미친 범위를 말한다고 해석했다. 사실 그리스어의 ‘보다 큰’이라는 낱말은 ‘중간에’라는 낱말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아틀란티스는 리비아와 아시아 ‘보다 큰’ 것이 아니라 리비아와 아시아의 ‘중간’에 있었던 것으로도 설명되곤 했다.

 

또한 지금까지 아틀란티스를 찾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명제인 기원전 1만년경이라는 시기도, 실제 아틀란티스가 존재했던 연도가 아니라 이집트인보다 자기 종족(아테네인)의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아틀란티스의 멸망에 대한 기술도 당시 아테네의 부패한 정치가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의미가 짙다고 설명했다.

 

그의 새로운 해석대로라면 시기나 규모 면에서 사라진 제국이 실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플라톤의 설명대로라면 아틀란티스가 존재했던 시기는 대체로 신석기시대로 볼 수 있으므로 아틀란티스가 초고도의 문명을 갖고 있어야 하는 모순점을 상당히 완화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지금의 카리브해 쿠바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저자는 신화·전설·고고학·문헌·과학·상상력·추리력 등을 모두 동원했다.

 

그는 쿠바가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하게 된 첫 번째 실마리를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에서 발견된 담배식물 흔적과 독일 뮌헨 박물관의 미라에서 발견된 코카인에서 찾는다. 그는 이를 통해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훨씬 앞서 고대 문명 간 교역이 이뤄졌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는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의 탁월한 항해 능력이 이 같은 교역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대 대서양 교역의 증거는 계속해서 제시된다. 1976년 브라질 구아나바라 만에서 발굴된 커다란 항아리는 1500년 전 모로코 지방에서 만들어진 항아리인 것으로 판정됐다. 1397년 베네치아의 지도 제작자가 제작한 항해도에는 ‘안틸리아’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콜럼버스가 신대륙 항해를 떠나기 이전에도 유럽과 신대륙의 접촉이 있었음을 뜻한다. 콜럼버스도 항해 중 `안틸리아`를 찾을 것으로 예상했다고 적었다. 해상왕으로 유명한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가 ‘사라진 일곱 개의 도시’를 찾아 지속적으로 원정단을 파견한 것도 이와 같은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콜린스는 멕시코 신화에 ‘뱀의 사람들’이 기이한 배를 타고 메소아메리카로 건너와 멕시코를 지배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신화에 다르면 ‘뱀의 사람들’이 동쪽의 ‘아스틀란’에서 건너와 일곱 개의 동굴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는데, 콜린스는 이 동굴에 해당하는 지역이 바로 쿠바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푼타델에스테 1호 동굴이라고 주장한다.

 

아틀란티스가 쿠바라고 할 때 대륙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저자는 이에 대한 해답 역시 전설에서 찾는다. 바하마와 카리브 해의 아메리카 인디언 홍수신화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격렬한 폭풍우로 인해 땅이 가라앉았고…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오랜 달이 부서지고… 바다가 몰려들었다.’

 

저자는 이 대목이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가 멸망하는 장면과 아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며 ‘오랜 달’이란 말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랜 달을 외계의 물체, 즉 운석으로 간주한다. 이 운석으로 인해 지구 역사상 마지막 빙하시대가 도래했고, 이 시기에 아틀란티스 문명 또한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1991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 끝에서 직경 160킬로미터의 운석구덩이가 발견됐다. 카리브해 일대에서 ‘베디아사이트’가 다량 발견됐다는 점도 그에게 힘을 실어준다. 베디사이트는 운석이 충돌하면서 용해돼 대기 중에 분출된 바위조각을 말한다. 그러나 콜린스의 설명에 고고학계는 크게 반발했다.

 

우선 콜린스가 신화나 전설, 그것도 카리브 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말했다는 것을 토대로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비판한다. 아틀란티스인들이 1만 년 동안 계속 쿠바에 살면서 전설을 남겼다는 것인가.

 

고고학자들은 또한 운석 충돌에 의해 아틀란티스가 하루 만에 사라졌다는 주장은 작위적이라고 꼬집는다. 버뮤다 삼각지대를 포함해 인근 쿠바 지역이 해수면의 상승으로 수몰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 하룻밤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적어도 7000∼8000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더구나 유카탄 반도에서 발견된 운석구덩이는 6500만 년 전의 것이며(일반적으로 이 당시의 충돌로 인해 공룡이 멸종했다고 추정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설도 많음) 카리브 해에 떨어졌다는 운석이 결정적인 재앙을 갖고 왔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도 콜린스의 주장에 문제점을 제기한다.

 

또한 카리브 해 인근에 인간이 1만 년 전에도 살았을 가능성은 있으나 초고대문명이라고 알려진 아틀란티스 문명과는 거리가 멀고 그가 구대륙과 연결되었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흔적들도 기원전 2000∼1500년의 것이라 시간상 맞지 않는다.

 

콜린스가 쿠바 지역을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하자 “카스트로 수상이 아틀란티스인이냐”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아틀란티스 탐험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을 안겨주었던 절대 명제를 타파해 주었다는 점에서 『아틀란티스로 가는 길』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아틀란티스에 대해서는 부정확한 논제를 대입시켜 비난을 받았지만 아메리카 대륙과 구대륙 사이에 콜럼버스 이전에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 구대륙과 신대륙의 역사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계속)

 

아틀란티스 대륙이 크게 주목을 받는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기원전 1만2000년 전에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가설 때문이다. 속물적인 근성으로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에 엄청난 재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다면 금, 은 등 여타 지역의 고대인들이 중요시했던 귀금속들을 당연히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인류문명사에 의하면 최초의 문명다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현재의 이라크)의 수메르에서 시작되었고 이집트, 인도, 중국에서 꽃을 피웠다고 설명한다. 정통학자들과 아틀란티스 신봉자들 간에 가장 큰 차이점은 대체로 이집트나 수메르에서 문명다운 문명의 시작은 높게 보아야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의 문명은 적어도 기원전 1만2000년경에 멸망했다고 한다. 단순 계산으로도 8500년의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초고대문명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아틀란티스에 어떤 이유로 초고대문명이 있었다고 추정하는가? 일반적으로 문명의 역사는 인류가 태어난 이래 수백만 년에 걸쳐 석기를 사용하다가 불의 사용법을 알았고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는 구석기 시대를 거쳐 돌을 갈아 도구를 생산하는 신석기시대로 진입하였다. 신석기시대에 약간의 진보를 보이다가 합금을 제조할 수 있는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며 철기시대로 접어들어 비로소 현대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설명된다.

 

정통학자들 중에서는 이집트에서 대피라미드가 건설되었던 기원전 2700년경일지라도 이집트에서 청동기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을 근거로 신석기 후반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초고대문명이라면 적어도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나 수메르의 고대 문명을 추월할 수 있는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초고대문명을 증빙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가? 초고대문명의 신봉자들은 바로 이런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한다.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고대 유물임이 분명한데 동시대를 감안할 때 고대인들이 사용했다고 생각하기에 너무나 앞선 기술을 갖고 있는 경우가 첫 번째이고, 둘째는 남극대륙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의문점이며 셋째는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거석 문명이다.

 

그러나 첫째와 세 번째는 연대에 있어 아틀란티스가 존재했다는 기원전 1만2000년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므로 이곳에서는 남극대륙이 아틀란티스라고 발표하여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던 내용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남극지도 발견>

 

151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가죽에 그린 한 장의 지도가 1929년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의 토카피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제작자는 터키의 제독인 피리 레이 이븐 하지 메무드였다. 그는 이 지도의 여백에다 이십여 개의 고지도와 8장의 마파문디스를 이용했다고 기록하였는데 마파문디스란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제작된 세계 지도를 말한다. 지도에 사용한 척도의 단위가 당시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인들이 사용하던 것과 거의 유사한 것은 물론이다.

 

피리 레이는 “금세기에 이 정도의 지도를 소유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자신의 저서에 적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참조한 고지도에는 문명의 여명기보다 더 오랜 시대로부터 전해진 세계 지리에 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는 것이 된다.

 

그가 만든 지도는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다소 난삽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고대 해군이 사용하던 지도를 조각조각 붙여 만들었으므로 척도가 일정하지 않은 탓이다. 현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만들었으므로 방향이 잘못된 것도 있었다. 이 지도는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모로코에서 코트 디부아르에 이르는 북아프리카의 일부와 남미 전체를 나타낸 대서양의 지도이다. 그러나 대서양과 그 주위를 감싸는 남북미 대륙, 유럽의 일부, 아프리카 서부 등이 기입되어 있지만 육지 그 자체의 모양이 실제 지형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마존은 지도에 2번이나 나왔으며 대륙의 서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지형들은 매우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마존의 입구에 있는 거대한 마라조 섬의 경우 그 지역은 1543년에 발견되었고 16세기 말에 지도로 그려진 곳인데도 1513년에 제작된 이 지도에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안데스 산맥 역시 구체적으로 그려졌는데 피리 레이 시대에는 안데스 산맥이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이 지역의 전형적인 동물인 라마의 그림도 있었는데 그 동물은 유럽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그린 부분은 더욱 놀랄 정도로 정확하다. 그러나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위도와 경도가 0.5도 이내에서 실제의 위치와 일치했다는 점이다. 지도상의 세로선(경도)은 동서 방향의 거리를 알려 주므로 매우 중요하다. 위도는 별을 봄으로써 비교적 간단하게 알 수 있지만 경도는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필요로 한다. 크로노미터(천문. 항해용의 정밀 시계)가 발명된 것은 피리 레이 시대로부터 200년 이상 뒤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1500년대 초에는 경도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지도는 대륙의 동서 방향의 오차가 매우 컸다. 콜럼버스는 당시에 제작된 최신의 지도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지까지 1000마일이나 남아 있는데도 카나리아 제도를 아시아라고 착각했던 것은 바로 정확한 경도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리 레이의 지도는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해안선을 매우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브라질 남쪽의 해안선이 연장되어 아프리카 쪽으로 뻗어 있는 듯이 보인다. 알링턴 멜로리는 이 지도를 연구하여 지도의 중심점이 카이로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미국의 햅굿 교수는 현대적인 투사법을 이용하여 재작성했더니 이 지도가 남미 대륙 남쪽에 기다랗게 뻗어 있는 해안선, 즉 웨델해에서 퀸 모드랜드에 걸친 남극 대륙의 해안선을 그린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까지 알려져 있었던 문명보다 훨씬 이전에 진보된 다른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고대의 항해자들은 극에서 극으로 여행을 했다.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여러 자료를 조사해 본 결과 고대에 살았던 어떤 사람들은 남극 해변이 아직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 않았던 시기에 그곳을 탐색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항해에 이용한 도구는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인간들이 사용했던 그 어떤 도구보다 뛰어났다.”

 

미국 정찰기술대에 소속되어 있던 해럴드 Z. 올메이어 중령은 피리 레이의 지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지도 아래쪽에 그려진 해안선은 1949년에 스웨덴. 영국. 노르웨이 합동 남극 조사대가 지진 탐사를 통해 발표한 남극의 해안선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이 점은 해안선이 얼음으로 덮이기 전에 지도에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지역의 빙괴 두께는 1마일에 달한다. 이 지도에 실린 데이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1513년 당시의 지리에 관한 지식수준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남극 대륙의 존재는 이 지도의 작성일자보다 거의 300년이나 지난 1818년에 발견되었다. 고대 지도에 종종 남극 부근에 거대한 대륙이 그려져 있었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랜 동안 공상의 산물로서 정확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피리 레이 보다 18년 후인 1531년에 그려진 오론테우스 피니우스의 지도는 피리 레이 지도보다 남극 부분이 더욱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남극의 상세한 해안선뿐만 아니라 산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까지 그려져 있다. 내륙부가 공백인 것은 아마도 그 지도를 그렸을 당시에도 이미 얼음에 덮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극의 얼음 밑에 있는 산맥과 섬을 그린 것인데 그런 사실은 1958년에야 알려진 것이다.

 

피리 레이 지도보다 200년이나 앞서 1339년에 제작된 〈둘세르트 항해 안내서〉는 지도 제작자가 골웨이에서 러시아의 돈 바신 강까지의 지역을 정확히 알고 그렸다. 동시대의 다른 항해 안내서 중에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여러 섬이 에게 해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섬들은 오래 전에 바다 속에 가라앉았음이 틀림없다. 한 지도에는 남부 영국 섬이 지도상에 정확히 그려져 있었으나 스코틀랜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빙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피리 레이 시대나 그 이전의 지도 제작 기술은 단순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원본을 베끼고 짜깁기해서 제작하는 정도였다. 지리상의 발견 시대는 그때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보통 1492년의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을 출발점으로 한다) 대륙의 전체적인 형태는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각 지형의 정확도에서는 큰 오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지도는 남극이 얼음에 덮이기 전에 그려졌거나 아니면 지진파 탐사로 1마일이나 되는 만년설 아래의 지질을 탐사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던 문명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계속)

 

1만5000년 전 남극대륙은 얼음으로 덮인 황무지가 아니라 초목이 우거지고 다양한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었고 사람들도 살고 있었다.

 

이곳에 세계 최초의 초고대문명이 건설되었고 그들은 토목과 천문학, 항해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들은 지구 전역을 탐험하면서 이집트, 아메리카, 유럽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던 중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 대재앙이 일어나 남극대륙에 있었던 위대한 문명은 현재와 같이 두꺼운 얼음과 눈 속에 묻혔다. 그러나 남극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고대문명이 멸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각지로 분지될 수 있었다. 이들 중에 가장 앞선 지식을 갖고 있던 후예들이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건설했고 볼리비아에서는 티아우아나코의 태양신전을 건설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아틀란티스인들도 남극 대륙에서 갖고 있던 지식들을 이용하여 거석 문화를 이루었으며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들이 계속해서 전수될 수 있도록 신화, 전설, 역법 속에 숨겨놓았다.

 

이런 가설은 공상과학(SF)이 아니라 영국의 언론인 출신 작가인 그레이엄 핸콕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신들의 지문』에서 진지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곧바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이제 조금이라도 불가사의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상식으로 되어 있다.

 

핸콕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몇 장의 지도이다. 이들 지도를 자세히 분석하면 남극 대륙을 그렸음이 분명한데 현재는 남극대륙이 두꺼운 얼음 속에 묻혀 있으므로 이 지도는 남극대륙이 빙하에 덮이기 전에 존재했던 문명이 남긴 유산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핸콕의 가설의 진원지는 앞에서 설명한 햅굿 교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뉴햄프셔 킨 주립대학의 챨스 H. 햅굿 교수(1904∼1982)는 뛰어난 이론학자로 빙하의 생성 요인에 대해 도전했다.

 

과거의 정설은 빙하가 생기는 요인으로 지구의 공전궤도와 자전축의 방향이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기온 하락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햅굿은 그런 이론으로는 마지막 빙하기의 종말과 더불어 일어난 여러 가지 격변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햅굿은 남극이 빙하기로 들어간 것은 양 극점의 무게가 주기적으로 지구에 불균형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양 극점 위의 얼음이 임계질량에 도달하면 그 무게로 인해서 지구의 외피인 지각판이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미끄러지듯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지구의 자전축은 고정된 가운데 대륙이 얹혀 있는 지각판만 양 극점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남극과 북극은 지구에서 가장 추운 지점에 머물게 되며, 유럽이 약 3천600킬로미터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극권에 놓임으로써 얼음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햅굿은 이 같은 이론을 1958년 「지구의 지각판 이동」이란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는 세계의 여러 지역이 차례로 북극권과 남극권으로 진입함에 따라서 얼음이 재분배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했으며 빙하층은 1만 년 동안에 모두 녹았다고 부연했다.

 

이때의 움직임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지진과 홍수, 화산 폭발로 아메리카와 유라시아 대륙의 동식물군이 대부분 멸종했다고 추정했다. 반면에 시베리아가 북극권으로 이동하여 매머드가 완전히 멸종된 것도 이 때문이며 남반구에서는 아메리카의 빙하기 동안 대부분 온난했던 남극대륙이 기원전 6000년 무렵 완전히 남극권으로 진입하여 2000년이 지나자 얼음으로 뒤덮였다는 것이다.

 

그의 지각판 이동 이론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주목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당신의 논거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설이 옳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주요한 지구의 지각(地殼) 이동들이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두 사람은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누었고 아인슈타인은 햅굿의 책에 서문을 쓰기까지도 했다. 햅굿은 아인슈타인의 인정이야말로 ‘지각판 이동설’이 인정받은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계속 발전시켜 발표했다.

 

여하튼 현재는 얼음 속에 묻혀 있어 전혀 알 수 있는 남극 대륙을 피리 레이가 지도를 그릴 수 있었던 근거를 좁혀서 생각하면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지도를 제작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특수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직관적인 원시(遠視)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 지도를 그렸다.

 

② 아틀란티스인들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걸쳐 거석 건조물을 만든 초고대 문명의 사람들은 현대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더 멀리까지 항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뛰어난 천문 지식으로 정확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대체로 이 시기를 1만 년 전에서 1만 2천 년 전으로 본다.

 

③ 남극 대륙 자체에 현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번영한 문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후예 중 누군가가 남극 대륙이 얼음으로 덮이기 전인 기원전 4000년경에 남극대륙을 탐험하여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시대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복사되어 내려왔다.

 

④ 고대 또는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불가사의한 지식이 알려졌다. 그 지식은 고대 항해나 천체에 관한 지식으로 어쩌면 지구 밖 생물로부터 얻었을지도 모른다.

 

위 네 가지 가설 중에서 어느 것도 증명하기 어렵지만 네 번째 우주인이 제작하여 지구인들에게 전달해 주었다는 가정을 제외하곤 모두 지구상에 살아 있던 인간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피리 레이의 남극 지도는 남극을 보았던 인간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특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제작하였다는 설에 대해서는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지지하는 사람은 예상 외로 많다. 가장 잘 알려진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본명은 미셀 드 노틀담)의 예를 들어보자. 『진실의 예언』에 관한 그의 저서는 약 천 개의 사행시로 되어 있다. 여느 예언적인 주술처럼 내용이 애매모호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귀중한 진리로 여길 수 있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책이 시대에 따라 항상 재해석되는 것은 그가 천리안을 갖고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수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구 전체를 살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독자에게 맡긴다.

 

두 번째 가설과 세 번째 가설은 맥락을 같이한다. 세 번째 가설은 핸콕에 의해 보다 자세하게 정리되는데 그의 설명은 두 번째 주장 즉 아틀란티스 대륙을 남극 대륙으로 바꾸어 설명한 것이다. 여하튼 누군가가 기원전 4000년경 남극이 완전히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에 남극대륙을 탐험하여 지도를 작성했을지 모른다는 가설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그들이 누구냐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계속)

 

〈남극을 중심으로 봐라〉

 

햅굿의 ‘극지 변동’ 가설은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지질학계의 정설로 부각함에 따라 학계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그린란드에서 발견된 열대 야자수의 화석 잔해 등 햅굿이 지각판 이동의 증거로 제시한 것 중 대다수는 지각판 전체가 한꺼번에 이동한 것이 아니라 대륙이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햅굿도 자신이 처음에 제시한 메커니즘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 하에 양극의 위치변화 원인이 지각층의 더 깊은 곳에 있을지 모른다고 수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초 이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햅굿의 이론은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지질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1970년대 말 캐나다의 랜드와 로즈 플렘-아스 부부가 햅굿의 이론을 보다 발전시켰다.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을 그린 지도가 있는데 이 지도는 17세기 중반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플라톤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것과 같다고 했다. 또한 이 지도에는 빙하에 덮이지 않은 남극 대륙이 보이며 얼음 속에 묻혀 있다는 남극 대륙의 크기와 형태가 유사하다는 것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지도에 의하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현재의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전혀 엉뚱한 위치에 그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도는 키르허가 공상으로 그린 것이라는 지적을 받아 어느 누구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플램-아스 부부는 지도를 거꾸로 돌리면 아틀란티스 대륙이 그려진 부분이야말로 정확하게 남극 대륙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남극대륙이야말로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것이다. 이들 부부가 아틀란티스 대륙이 남극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한 근거는 이집트 사제 손치스가 솔론에 말한 글을 기초로 한 것이다. 손치스는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서 멀리 떨어진 미지의 세계 밖에 있는 어떤 곳에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항해자들이 다른 섬으로 가는 해로가 있으며, 그리고 그 섬들로부터 시작해서 진정 바다라고 부를 수 있는 대양을 육지가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해역은 입구가 좁은 그야말로 하나의 만(灣)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다른 바다 그것은 진정한 대양으로 그 대양을 둘러싼 땅이야말로 대륙이라 이름 붙여 마땅하다.”

 

솔론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광막하게 넓은 대양의 가운데 떠 있는 하나의 섬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가 3개의 주요 문명 단위로 나뉘어졌는데 그것은 유럽, 리비아(아프리카)와 아시아이다. 그리스인들은 세계 북쪽 끝 부분에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acles)이 놓여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지브롤터 해협이라는 특정의 위치를 의미하는 동시에 세상의 끝(extremity of the known world)이라는 의미도 가진다는 것이다. 솔론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그리스 세계의 끝을 의미하고 그 끝의 밖에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밟을 수 없는 곳으로 금지된 통로에 해당한다.

 

랜드와 로즈 플렘-아스 부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밖에 있는 대서양의 의미가 솔론이 이야기했을 때와는 달리 매우 축소되었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대서양이란 말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거대한 바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는데 콜럼버스가 신세계를 발견한 이후 대서양이란 의미가 축소되어 현재와 같이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대서양을 섬세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물의 일부분으로 정의했으므로 대서양은 오늘날의 대서양이 아니라 ‘세계양(World Ocean)’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다가 세계양으로 통일되었다는 사실은, 남극대륙을 중심으로 한 미해군의 지도를 보면 현재의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이 한 바다에 포함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플렘-아스 부부는 남극 대륙을 중앙으로 보고 현 지구를 설명하면 잘 부합된다고 강조했다. 우선 남극 대륙은 1200만제곱킬로미터로 북아프리카(리비아)와 중동(아시아)을 합친 면적에 아주 근접한다.

 

〈남극에서 출발한 신의 지문〉

 

아틀란티스라는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던 대륙이라면 적어도 그 땅의 한 쪽 길이가 수천 킬로미터는 되어야 하고 여러 개의 산맥과 큰 강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다가 1만 년 전이라는 제한조건도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륙이동설이 확고한 지질학의 이론으로 잡아가자 대륙 규모의 땅덩어리가 사라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말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침몰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때 핸콕이 랜드와 로즈 플렘-아스 부부의 주장에 주목했다. 그들은 남극대륙에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있었는데 이 대륙이 거대한 빙하층 아래 묻혔기 때문에 초고대문명의 증거가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면 모든 의문점이 해결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핸콕은 플렘-아스 부부의 주장을 보다 발전시켜 유명한 『신의 지문』에서 남극대륙이야말로 사라진 대륙이며 남극 대륙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줄 ‘지문’을 세계 각지에 산재한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핸콕의 이러한 주장에도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핸콕의 동료인 존 앤소니 웨스트는 남극대륙이 아틀란티스이며 이곳에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더라도 지도가 그려지려면 두 가지 가정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① 남극대륙이 얼음에 덮이지 않았던 시기 즉 적어도 6천년 전에 지도가 작성되었으며 사람이 남극대륙에 살고 있었다.

 

② 고도의 기술 수준의 해양문명이 여러 지역에 존재했다.

 

햅굿에 의하면 지구의 지각 이동은 지구의 넓은 지역을 일시적으로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 및 동물의 이동성에 제한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77년에 해리스는 햅굿의 이론을 보다 전개하여 수렵과 수집을 생계유지 수단으로 하던 사람들이 이동이 제한되자 한군데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추정했다. 더구나 이러한 제한성으로 일부 지역에 거주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자 자연적으로 계절에 맞춰 개선된 개혁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특정한 식물 및 동물의 선택적 재배와 사육으로 발전하고 진정한 식량 생산 체계로 옮겨졌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1만2000년 전에 수메리아, 이집트, 인도, 미노아, 중국 등은 열대 지방이었는데 차츰 온대 지방으로 변하면서 문명권이 생겼다는 것이다. 각 문명권이 시작한 연대가 다른 것은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다고 해도 사람들이 새로 변화된 기후로의 이주 속도는 매우 완만하다. 즉 급격한 기후 변화와 이 변화의 속도에 못 미치는 인류의 이동 속도로 각 지역에서의 문명 발달의 시간 차이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아틀란티스로부터의 생존자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 후술하는 거석 문명 즉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의 까르낙, 마야와 잉카, 이스터 섬, 페루의 나스카 등이 상당한 단절을 보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론은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각자에게 닥친 제한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새로운 정착지에서 생활하는 여건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아틀란티스의 후손이므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식은 모두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홍수의 전설, 거석 문명 등이다. (계속)

 

<6천년 전의 항해 능력>

 

고대의 지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하튼 약 6천년 전은 고온기로 이 시기의 기온은 현재보다 높았고 남극 대륙의 대부분이 온대 지역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당시에 남극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와 항해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원전 6천년 전에 남극까지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문명이 지구상에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핸콕과 플렘-아스 부부에게 매우 고무적인 증거가 발견되었다. 고대인들이 빙하로 덮인 남극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1991년 9월 미국과 이집트의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5,000년 전에 제작된 이집트 파라오의 함대가 나일강에서 거의 13킬로미터 떨어진 내륙 아비도스에서 발견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배들은 총 12척의 목선으로 길이가 15미터에서 22미터나 되었다.

 

22미터나 되는 배 길이는 고대 문명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세 시대에 유럽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바이킹들의 롱십(Long ship :긴 배)의 경우 배의 길이가 24미터, 폭이 5미터였다. 이 배에 바이킹 40여 명과 말 2필을 싣고 전 세계를 항해하였다. 아메리카대륙의 첫 발견자가 콜럼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었다는 것도 공인된 사실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크기의 배라면 전 세계의 어떤 지역이라도 얼마든지 장기간 항해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아비도스에서 발견된 배들은 기원전 2700∼2600년경에 이집트를 통치한 제2왕조의 카세켐위 파라오의 장례신전에서 발굴된 것으로 제1왕조의 제르 파라오(기원전 3100년경)의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도 남극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 않았다는 기원전 4000년과는 적어도 1000년의 차이가 난다. 이 간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고고학자들이 매우 명쾌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제일 먼저 아비도스의 파라오 함대는 먼 바다의 악천후에서도 견딜 수 있도록 고도의 설계 기술로 건조되었으며 그 모습도 우아하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항해 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세련된 배의 설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대형 배를 건조하려면 오랜 세월의 발전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벽화에 유선형의 성능이 뛰어난 대형 배가 물위를 달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아비도스 함대보다도 1,500년이나 더 오래된 6,500년 전의 일이다.

 

이집트인들은 현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항해술을 갖고 남극까지 항해하였으며 자신들이 본 지역을 지도로 그렸는데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 시대까지 전승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 것이다.

 

〈반격하는 과학자〉

 

핸콕과 플램-아스 부부가 제시한 가설은 고고학, 천문학, 지질학 등 광범한 분야에서 증거를 끌어내었으므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집트인들은 선진 항해술을 통하여 남극까지 항해할 수 있다는 개연성까지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정통 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에 즉각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소위 남극 문명이 남긴 유적의 건설 연대가 1만2000년을 상회한다면 어째서 그들의 후손이 세웠다는 이집트의 문명이 기원전 3000년 정도밖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내용이지만 적어도 이들을 연결하려면 공백기간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램-아스 부부는 아틀란티스인들이 각지로 퍼져나가는 데 나름대로 시간이 걸리며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된 문명이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아틀란티스 대륙의 후예들이 곧바로 이집트에 도착하지 못했으므로 그 중간 단계에서 아틀란티스의 거석문명을 계속 진행시켰고 결국 이집트에 도착하여 비로소 여러 가지 여건들이 충족되었으므로 아틀란티스 문명의 유산들이 활짝 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아틀란티스가 멸망했다는 기원전 1만2000년에도 이집트인들은 계속 나일강 계곡에 거주했다는 사실이다. 남극대륙의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이집트가 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서 제1왕조가 시작되기 직전인 기원전 3400년경 이전에는 도시와 신전, 피라미드, 오벨리스크, 조각상 등 이집트가 자랑하는 문명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 앤서니 웨스트도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내가 볼 때 이와 관련된 커다란 문제는 전승과정이다. 이집트 왕조의 문명 개화기 사이에 존재하는 수천 년의 기간 동안 지식을 전수한 정확한 방법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이는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핸콕이 제시한 견해는 남극대륙에서 갖고 있던 ‘지식’이 수백 세대(적어도 300세대)에 걸쳐서 신화와 전설로 구전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플램-아스 부부와 핸콕의 설명은 여러 고대문명의 기원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과학자들은 보다 구체적인 자료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핸콕이 자랑하는 피리 레이의 지도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햅굿은 피리 레이의 지도에 남극대륙의 존재가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커다란 가설을 세웠다. 피리 레이의 지도에는 남아메리카 하단부분부터 남극대륙이 있는 약 3000킬로미터 가량이 생략되었는데 이것은 두 대륙 사이에 존재하는 해상통로를 피리 레이가 의도적으로 생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513년이라면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이므로 수많은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 연안을 철저히 조사하고 있었다. 이 당시 탐험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사실을 정확히 기록했는데 놀라운 것은 피리레이 지도에서 브라질의 내부 모습을 묘사하면서 콜럼버스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이다.

 

“분명히 콜럼버스라는 한 제노바 출신의 무신론자가 이 땅을 발견한 사람인 것 같다. 경위는 다음과 같다. 콜럼버스는 한 책을 입수했고, 그 책을 통해서 ‘서쪽 바다(대서양)에는 끝에 해안선과 많은 섬들이 있으며, 그곳에는 각종 귀금속과 보물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글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콜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정보를 적은 책이 있었고 콜럼버스가 이 책을 근거로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탐험대 파견을 설득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피리 레이의 지도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원주민들로부터 화살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나체였다는 글이 있다. 남극대륙 해안으로 가정한 부분 옆에 ‘머리털이 하얀 괴물들’, ‘뿔이 여섯 개 달린 황소’, ‘커다란 뱀들’과 무더운 날씨에 대한 포르투갈인들의 보고를 적고 있다. 피리 레이는 포르투갈인들의 괴물에 대한 기록을 ‘포르투갈 불신자들이 자기네 지도에 기록했다’고 말했다. 피리 레이가 고대 지도를 참고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콜럼버스를 언급했으며 포르투갈인들의 탐험 사실도 참조하여 지도를 제작한 것이 분명한 이상 피리 레이 지도를 고대지도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더욱 핸콕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핸콕이 피리 레이 지도로 남극설을 주장할 때 이미 피리레이 지도에 콜럼버스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사실을 거론하지 않고 피리레이 지도가 알렉산더 대왕시대의 기록만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는 점이다. 핸콕의 남극설은 한마디로 학자적인 양식을 저버린 한탕주의로 치부되었다.

 

초고대문명의 남극설에 가장 치명적인 사망선고도 곧이어 발표됐다. 피리 레이 지도를 재구성한 결과 빙하에 묻힌 남극대륙의 형태와 유사하다는 주장에도 반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현재 얼음에 묻힌 일단의 섬들의 윤곽을 토대로 피리 레이의 지도에 그려진 해안선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실시된 과학탐사는 빙하 아래에 있는 남극대륙의 실제 형태는 얼음을 들어낼 경우 현재의 지형과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현재 남극대륙은 수백 만 톤의 빙하층에 짓눌려 수백 킬로미터나 침강되어 있는데 이러한 왜곡현상을 수정하면 해안선은 현재 빙하 아래에 있는 것과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빙하층을 제거할 경우 남극대륙의 형태가 현저히 변모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즉 피리 레이나 오론테우스 피니우스의 지도에서 보여주는 해안선의 모습이 현재 얼음 속에 보이는 남극대륙과 일치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결론을 말한다면 피리 레이나 오론테우스 피니우스의 지도에 묘사된 해안의 섬들은 동토층을 제거하면 사라지므로 서로 일치하는 부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다 강력한 펀치도 준비되어 있다. 아틀란티스가 남극대륙이라는 지금까지의 설명은 남극대륙이 기원전 1만3000년 이전에 빙하에 덮여 있었지만 그 뒤 점진적으로 빙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 대전제 조건이다. 그런데 빙하도 강처럼 미세한 토양층을 퇴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즉 남극대륙이 지질학적으로 최근 역사에서 빙하가 없는 시대를 거쳤다는 추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여러 층의 빙하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할 경우 남극대륙이 최소한 십만 년 이상 빙하에 덮여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알게 된 진실은 이집트인들이 남극까지 항해했더라도 얼음에 덮이지 않은 남극대륙을 직접 보았다는 대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남극대륙에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다는 지금까지의 가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예언자가 찾은 아틀란티스>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추정되는 위치가 태평양을 비롯하여 남극대륙이라는 설에 대해 지금까지 중점적으로 설명했지만,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대서양 바깥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에서 아틀란티스를 찾으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대서양에서 아틀란티스 대륙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은 지질학의 발달로 대서양에서는 사라진 대륙 즉 침몰한 대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한편, 대서양에서의 아틀란티스 대륙을 찾는 것이 문제에 봉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미국의 유명한 사진작가이자 예언가인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가 아틀란티스의 존재는 물론 위치까지 정확하게 예언했기 때문이다.

 

1877년 켄터키주 홉킨스빌에서 태어나 1945년에 사망한 에드가 케이시는 플라톤의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지만 아틀란티스 대륙을 초능력으로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43년 동안 8천 명 이상의 사람들과 정신감응(투시)을 통해 대화한 내용을 1만4천개 이상의 문서화된 속기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리딩, Readings’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진술들 중에 많은 부분이 아틀란티스 대륙 및 아틀란티스인들의 전생, 아틀란티스에서 사용된 첨단 기자재들에 대한 것이다.

 

1923년 케이시는 ‘죽은 뒤에도 삶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자기가 최면 상태에서 본 것을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신은 루이 14세 시대(1638∼1715년)에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고 그 전에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기원전 356∼323년)에 살았으며 그 전에는 고대 이집트, 그 전은 아틀란티스에 살았다고 했다. 그가 1933년 최면상태에서 자기가 살았던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 묘사한 부분을 보자.

 

“아틀란티스 대륙은 현재의 사르갓소 해에서 아조레스 제도에 걸쳐 있었다. 이것은 거의 유럽 전체와 맞먹는 크기이다. 파멸은 두 번에 걸쳐 발생했다. 처음에는 대륙이 많은 섬으로 분열되었고 최후의 파멸이 온 것은 플라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기원전 1만년경이며 원자폭탄 폭발로 사라졌다. 아틀란티스 왕국이 있었던 곳은 바하마 군도에 있는 조그마한 섬인 비미니 섬이다.”

 

그가 말한 지역은 광대한 대서양에 속해 있으면서 유명한 버뮤다 삼각지대를 포함하는데 1940년에 행한 그의 예언은 1933년의 예언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는 1968년과 1969년에 ‘아틀란티스 대륙의 최초의 부분’이 바다 위로 솟아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예언가들의 통례적인 선전으로 이해되었고 그가 1945년에 사망하자 세인의 관심에서 곧 잊혀졌다. (계속)

 

<비미니 로드 발견>

 

놀랍게도 1968년 8월 16일, 케이시 연구회 회원인 비행사 로버트 브러시와 트릭 애덤스가 바하마 뱅크(바하마의 해저 퇴적 언덕)에 있는 안드로스 섬의 파인키 앞바다를 비행하면서 해저에 가라앉아 있던 사원의 유적이 해면 위로 솟아 오른 것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은 직사각형의 건조물이며 돌 칸막이에 의해 몇 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고 해초와 해면에 덮인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1968년에 케이시의 예언대로 수중 건축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되자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이것이 해저에서 융기한 아틀란티스 신전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계속하여 더욱 많은 해저 유물들이 발견되자 거대한 아틀란티스의 도시 유적이 틀림없다는 설이 뒤따랐다.

 

그 후 미국의 동물학자이자 마이애미 과학박물관의 명예관장인 맨슨 발렌타인 박사와 해저사진 전문가 드미트리 레비코프가 안드로스 지역을 정밀 탐사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사원의 유적은 그레이트 바하마 퇴적층의 동쪽에 있는 안드로스 섬 북쪽의 수심 90미터도 못 되는 얕은 곳에 있었으며 넓이는 세로 30미터, 가로 18미터, 벽두께는 90미터라고 발표했다. 사원 유적은 처음에는 해저에서 60미터 가량 솟아올랐다가 그 후에 다시 가라앉았다고 보도되었다.

 

연이어 발렌타인은 바하마의 낚시 안내인인 본피슈 샘을 길잡이로 삼아서 비미니 북쪽 해안 바닷속 6미터 해저에서 네모진 돌이 늘어서 있는 거대한 길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전형적인 돌덩어리는 검고 매우 단단했으며 크기는 길이 2미터, 폭 1미터, 높이 0.5미터로 무게는 1톤 정도 되게 베개 모양이며 약간 부풀어져 있었고 각과 변은 둥글었다. 그 중에서 수십 개의 큰 돌은 무게가 5톤이나 나가기도 했다. 돌들은 두 줄의 평행상태로 놓여져 있었는데, 길이는 약 600미터 정도였다. 이 줄은 직각을 이룬 두개의 직선 날개를 갖고 있었고 부두와 이중 방파제를 갖춘 구조물도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모양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지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고 발렌타인은 부연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비미니 로드’이다.

 

그는 유적의 연대를 검사한 결과, 6000년에서 1만2000년 전의 것으로 발표했다. 발렌타인의 발견은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드디어 아틀란티스가 발견되었다고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기염을 토했다.

 

1979년 캘리포니아 출신의 고고학자 존 스틸이 3개월간이나 정밀하게 측정한 후 제출한 조사보고서에 적힌 비미니 로드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비미니 로드는 북동쪽으로 1000미터 이상이었는데 길이 꺾이는 남단은 ‘J’자를 이루며 본래의 길에서 7도 가량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구조는 몇 곳의 예외를 제외하면 1층의 돌들의 모임이라 볼 수 있는데 돌의 크기는 대체로 1.15미터 정도였다.”

 

수중 유적이 물 위로 나타났다는 보고는 그레이트 바하마 뱅크 해역에서의 대대적인 조사를 촉발시켰으며 곧이어 근처 바다의 깊은 곳에서 해저 피라미드라고 일컬어지는 가로 54미터, 세로 42미터나 되는 대형 건조물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보다 큰 대형 건조물이 바닷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아틀란티스 신봉자들로 하여금 이 건축물들이 잘려진 피라미드이거나 신전의 기단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게끔 했다.

 

미공군사관학교의 데이비드 징크 교수도 비미니 앞바다에서 수중 탐사를 계속하여 몇 군데 해저 유적지를 새로 발견했다. 그는 『아틀란티스의 돌들』이라는 책에서 그가 발견한 다듬은 돌과 사람의 머리를 조각한 듯한 부식된 대리석, 석재의 축조에 나타난 기하학적 모양 등을 소개했다.

 

징크 교수의 발표가 학자들로부터 특별히 신임을 받은 것은, 이들 지역에서 발견된 구조물들 중 고대의 신전이라고 설명한 것들이 사실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해면양식장을 구성하는 구조물이라고 기존의 발표들을 정정하는 등 과학적 진실을 밝히는 데 그가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지질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들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수중 유물들이 아틀란티스 대륙의 일부라는 견해에 승복하지 않았다. 특히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한, 바닷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반론이 곧바로 제시되었다. 예를 들면 비미니 부근의 해저에서 인양되어 고대에 제작된 돌기둥이라고 주장된 것들은 조사 결과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실려 있던 시멘트로 된 원통형으로 밝혀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W. 해리슨은 1971년 『네이처』지에 비미니 지역의 돌덩어리들이 인공구조물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조개 껍질 파편이 퇴적한 결과가 ‘대형 돌덩이들의 벌판’인데, 얼핏 보면 누군가 짜 맞춘 것 같아 어떤 인간의 힘이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석회암이 커다란 돌덩이 형태로 노출되는 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바하마 북서지방에서는 육지든 수중이든, 균열과 부식의 여러 단계에 놓인 석회암의 노두(露頭)가 많이 발견된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마론 볼 교수도 1980년 『내셔날 지오그래픽』에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 내용을 기고했다. 그레이엄 핸콕의 글에서 인용한다.

 

‘1만5000년 전부터 현재까지 해수면의 높이가 꾸준히 상승한 결과, 연속적인 해변이 생겼다. 그것은 북 비미니 서해안의 외곽에 펼쳐지는 대지(臺地)를 형성하고 있으며 해안선이 동쪽으로 그레이트 바하마 퇴적층을 넘어 뻗어 있다. 이 일시적인 해변을 따라 비치록의 퇴적층이 형성되었고 이것은 나중에 바닷물이 깊어지면서 수몰되었다. (수천 년이 경과한 후) 그 해안선은 현재의 패러다이스 포인트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여기에 약 700년간에 걸쳐 세 개의 연속적인 해변이 생겨났고, 이것이 세 개의 비치록 퇴적층이 형성된 장소이다.’

 

그는 비미니 해저를 조사한 결과 인공구조물이라고 주장했던 것들이 인공구조물이 아니라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① 세 개의 도로상(狀) 지형은 남서 방향의 끝지점에서 갈라져 있는데 이곳에 흩어져 있는 커다란 돌덩어리의 방향이 직선이 아니며 바다 쪽, 중간, 육지 쪽의 도로 지형과 연계되어 있지 않다.

 

② 돌덩어리가 2단으로 된 세 개의 도로상 지형 중 밑의 돌 바로 위에 돌이 얹혀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

 

③ 세 개의 지형이 위치한 곳의 지하에는 암반이 놓여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 수로를 만들 가능성이 없다.

 

④ 지하 암반 표면에 돌덩이를 놓았거나 돌덩어리를 맞추어 절단한 흔적이 없다.

 

⑤ 돌덩어리에 규칙적인 혹은 반복된 홈이나, 기타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⑥ 이들 도로는 공도(公道)로 사용될 만큼 공들여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잘 정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는 세 개의 선상지형(線狀地形)에서 인공적인 구조물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특징은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비치록 퇴적층의 특징 중에 하나라고 잘라서 말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거론하지만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에 의해 촉발된 비미니 지역의 아틀란티스 전설은 또 다른 불가사의한 사건이 결합되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실종사고의 보고ㅡ 버뮤다 삼각지대〉

 

에드가 케이시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말한 비미니 지역이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그가 예언한 지역이 ‘버뮤다 삼각지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버뮤다 삼각지대를 횡단하는 선박이나 항공기가 SOS 신호조차 변변히 보내지 못하고 감쪽같이 사라지는데 에드가 케이시의 추종자들은 그 이유를 바다 속에 있는 아틀란티스 후손들이 벌이는 일이라고 설명하여 더욱더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케이시가 예언한 연도에 정확하게 수중 유적이 발견되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마의 삼각지대에서 일어난 일들이 아틀란티스인들의 작품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마(魔)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버뮤다 삼각지대는 미국의 플로리다, 버뮤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를 연결하는 삼각형 모양의 바다를 가리킨다. 대략 북위 20도에서 40도선과 서경(西經) 55도에서 85도에 이르는 4백만 평방킬로미터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아틀란티스 대륙의 일부로 일찍부터 지목되던 지역이다.

 

에드가 케이시가 최면 상태에서 거론한 내용이 왜 그렇게 큰 파장을 불어왔는지 버뮤다 삼각지대의 의문의 실종사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본다.

 

1492년 10월 11일 일몰 2시간 전, 즉 콜럼버스가 역사적인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기 바로 전날, 콜럼버스와 그의 승무원이 물위에 빛나는 원통형의 물체를 목격했는데 그 직후 나침반이 이상현상을 보였다. 이것이 버뮤다 삼각지대의 수많은 괴현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괴상한 현상은 바다 속의 흙탕물이 정어리떼로 말미암아 뒤집혀 일어나는 현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유기물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콜럼버스가 항해 중에 목격한 또 다른 괴현상은 1492년 9월 5일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을 가로질러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 때에도 나침반에 이상한 혼란이 나타나 선원들이 공포에 떨어 그들을 무마시키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내용이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에 자세히 적혀 있다.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실종사건은 주로 대서양 서쪽 사르갓소라고 불리는 해역에서 발생한다. 이 해역의 이름은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는 ‘사르갓숨’이라는 해초에서 따온 것으로 광대한 지역에 걸쳐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특이한 형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콜럼버스가 이 지역을 지날 때 이 대량의 해초를 먼 곳에서 목격하고 육지로 착각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을 정도로 해초가 무성한 곳이다.

 

특히 이 해역이 유명한 것은 죽은 듯이 잔잔한 바다인데도 ‘난파선의 바다’, ‘난파선의 무덤’, ‘공포의 바다’ 등 무서운 이야기들이 전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해초 속에 한번 갇히게 된 선박은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두들 수장된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현재도 많은 유기선(遺棄船)이 목격된다.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일어난 몇몇 실종 사건의 경우 최후의 통신을 보내오기도 하였지만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화물선 라이후꾸마루(來福丸)호는 1924년 겨울, 바하마 제도와 쿠바 사이에서 행방불명 될 때 매우 이상한 통신을 보냈다.

 

“지금 비수(匕首)에 찔릴 듯한 위험이 닥쳐왔다··· 빨리 오라··· 탈출할 수가 없다.”

 

미국 해안경비대에서 이런 실종 사건들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 이 선박이 조난 신호를 발신하지 못한 것은 이 배가 겪은 조난이 송신도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빨리 들이닥쳤을지 모른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사상 최대의 수색작전에도 사라진 비행기〉

 

버뮤다 삼각지대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선박의 실종보다는 1945년 12월 5일 6대의 해군비행기와 그 승무원들이 사라진 사건이다.

 

그날의 비행은 포오트 로오더딜 기지에서 동쪽으로 160마일, 북쪽으로 40마일을 미리 예정된 해양순찰 훈련 비행을 한 후 남서쪽으로 침로(針路)를 바꾸어 기지로 돌아오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제19편대(플라이트19)는 이날 이륙한 비행 편대의 이름으로 훈련기는 ‘네이버 그라만 TBM 3형 소형 아벤저 뇌격기(雷擊機)’로 각 비행기마다 1,000마일 이상 비행할 수 있는 연료가 있었다.

 

아벤저 뇌격기는 당시까지 미국 해군이 보유한 최고 성능의 단발 비행기로 편대장은 찰스 테일러 대위, 나머지 4명의 비행사는 훈련생들이었으며 각 비행기에 하사관 2명씩 모두 9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훈련생 비행사라고 하지만 그들은 말만 훈련생일 뿐 모두 조종 및 작전 훈련에 익숙한 베테랑들이었다(훈련생들이 초보자라는 말도 있음.). 여기에서 9명의 하사관이 탑승한 것은 원래 탑승 예정인 한 명의 하사관이 사정상 결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후 2시에 이륙 개시하여 2시 10분에 5대 모두 하늘로 떠올랐다. 그들은 30분간 비행하여 치킨해안에서 20분간 폐선(廢船)을 상대로 폭탄을 투하하는 표적(標的)훈련을 했는데 이때까지 비행 중에 눈에 띄는 이상한 징조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후 3시 15분, 표적훈련을 한 후 곧바로 귀환해야 했는데 로오더딜 기지의 관제탑 무선기사는 편대장 테일러 대위로부터 갑자기 다급한 통신을 입수했다.

 

편대장 : 긴급연락! 우리가 항로를 이탈한 것 같다. 육지가 사라졌다. 반복한다. 육지가 안 보인다.

 

관제탑 : 현재 위치는?

 

편대장 : 위치를 알 수 없다. 어디를 날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관제탑 : 곧바로 서쪽으로 향하라!

 

편대장 : 어디가 서쪽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이상하다. 방향을 전혀 잡을 수 없다. 바다의 모양도 평상시와 다르다.

 

오후 3시 30분, 테일러 대위는 ‘나침반 두개가 모두 고장 났다. 기지를 찾고 있다. 플로리다의 작은 섬들 상공인 것 같은데 어느 근처인지는 알 수 없다··· 금방 조그만 섬 위를 지나쳤다. 육지라곤 보이지 않는다’라는 통신을 보냈다. 그 후 잡음이 심해져 더 이상 통신을 할 수 없었다. 반면에 로오더딜 기지 근처에 있는 에버글라드 기지에서도 테일러 대위가 보내는 다음과 같은 통신을 포착하였지만 직접 대화는 불가능하였다.

 

“우리들은 흰색의 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기괴하며··· 바다가 우리들이 보던 것과 다르다.”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들을 찾으려고 오지 말라’였다. 이것은 경고였을까 혹은 자신감이었을까? 곧바로 구조팀이 구성되고 19시 30분 각 13명의 승무원을 태운 두 대의 마틴 마리나형 구조비행기(No32와 No49)가 서로 다른 항로로 최후의 보고가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중 No32가 20시 30분에 정규 보고를 하지 않고 아무런 단서도 없이 또다시 사라졌다. 한편 다른 쪽으로 출발한 No49는 상공 1,800미터에 강한 소용돌이가 있고 바다 역시 매우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의문의 실종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이 지역에 대한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도 대규모의 탐색작업이 바다와 하늘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항공기 300여 대, 구축함 4척, 잠수함, 해안 경비정 18척, 조사정, 구조정, 민간기, 요트, 보트 수백 척이 펼치는 사상 최대의 대 수색작전이었다.

 

그러나 사고지역을 중심으로 공중수색 시간은 4,100시간에다 거의 100만 제곱킬로미터를 구석구석 수색하였지만 사라진 항공기들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잔해도 없었고 어떤 구명대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기름의 흔적도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수신된 무전의 내용은 편대가 방향을 잃고 나침반이 고장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이 전례 없는 화창한 날의 조난은 해군 항공 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조사대상이었으나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종결되고 말았다. 특히 이 당시의 조사 위원 중에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묘한 발언을 했다.

 

“그들은 마치 화성으로 날아가 버린 듯 완전히 사라졌다.”

 

이 말이 그 후 버뮤다 삼각지대의 성격을 규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놀랍게도 이 말에 얽힌 수수께끼는 사건이 일어난 지 29년이 경과해서 다시 주목을 받는다. 사고가 일어날 때부터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아트 포오드 기자가 1974년에 테일러 중위가 ‘나의 뒤를 따르지 말라··· 저놈들은 우주에서 온 것 같다’라는 통신을 보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 정보의 출처는 어느 외딴 시골에 살던 무전사(無電士)였다. 마치 외계의 다른 세계로부터의 간섭을 암시하는 이 최후의 무전은 그 후 다른 실종사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 사건이 기묘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1945년 미 공군 C115기인 ‘나르는 박스카’ 사건도 자주 거론된다. 승무원 10명을 태운 이 비행기는 홈스티드 공군기지로부터 바하마제도에 가까운 그랜드 다크 섬으로 가던 도중에 사라졌다.

 

이 경우에는 잘 들리지 않는 가냘픈 통신으로 비상사태를 호소하다가 수신이 점점 멀어지더니 실종되었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5일간 수색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 원인불명’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C115기와 같은 항로를 반대 방향으로 날고 있던 동일한 기종의 비행사가 ‘일기 청명, 시계 양호’라고 보고하였다는 점이다.

 

제19편대(플라이트19)의 조종사들의 실종에서 볼 수 있는 혼란상태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1964년 그랜드터어크 섬 상공에서 사라진 여류비행사 캬로린 카시오가 탄 경비행기는 C115기와 마찬가지로 ‘아래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탈출 방법을 알려달라’는 기묘한 연락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사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시각에 그랜드터어크 섬의 주민들이 한 대의 경비행기가 30분 가량 섬 위를 돌다가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증언한 점이다.

 

바하마 제도의 그레이트 아바코섬 부근을 날고 있던 한 개인용 비행기가 SOS를 쳤는데 그의 보고는 플라이트 19와 유사하였다. 그 조종사는 날씨는 쾌청한 데도 안개 속을 날고 있는 것 같았으며 위치도 확인 못하고 바로 밑의 섬들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주변 해역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시계가 양호하였고 전망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의혹의 사건에 대해 맥밀란 경을 의장으로 하는 스타타이거 호의 조난 규명 사문회의의 공식 보고서는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 미스터리임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었다.

 

“스타타이거가 무선이나 기계의 고장, 연료부족, 목적지 발견의 실패, 기상적인 위험, 고도 오인, 기타 몇 가지 가능성 있는 원인으로 해중에 낙하했다고 상정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기술적 과실, 또는 승무원의 태만이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사고의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자 이 해역을 항공기나 선박으로 지나려는 사람들이 불안감을 갖기 마련이었다. 한 항공사의 안내원은 항공기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자 ‘버뮤다 삼각지대를 피해서 비행하느라고 늦었습니다’라고 승객을 안심시키자 모두들 박수를 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계속)

 

〈실종 사건의 여러 원인〉

 

이와 같이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실종 사건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실종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여러 가지의 놀라운 추측과 설명이 제기되고 있어 그 원인이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아 실종 사건처럼 복잡하다. 아틀란티스 대륙과도 다소 관련이 되므로 우선 과학적인 분석부터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1940년 로스챠일드 쌍둥이 형제가 비행기를 타고 버뮤다 삼각지대를 지날 때 갑자기 조종사가 육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계기도 고장이 났고 안개가 끼어 있어 바다나 하늘 구분도 되지 않았다. 비행사는 갑자기 계기가 고장나 어디인지 모르므로 곧바로 추락할 것이라고 두려움에 떨었는데 다행히 육지가 보였고 그들은 착륙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44년 미 공군 조종사 스턴은 7대의 폭격기로 편성된 편대의 일원으로 버뮤다에서 300마일 지점을 통과하다 갑자기 비행기가 무서운 진동을 일으키자 긴급히 본토로 되돌아갔다. 기지에 돌아와 보니 7대 중 자신을 포함하여 2대만이 돌아왔고 5대가 실종되었다. 그의 보고서를 보자.

 

“이때 날씨는 쾌청하였고 별이 총총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뒤집히는가 하면 천장에 부딪힐 정도로 아래위로 흔들렸다. 마침내 고도를 잃고 바다로 곤두박질하면서 빠질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아 귀환할 수 있었다.”

 

스턴은 그 후에도 같은 지역을 비행하였는데 역시 같은 일을 경험하였다. 느닷없이 기체가 낙하하면서 몹시 흔들렸는데 거의 15분간이나 계속됐다. 이 현상은 소위 청천난기류(晴天亂氣流, CAT)의 실례로, 상황에 따라서는 항공기를 진동으로 분해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비교적 원인이 규명된 예 중의 하나이다.

 

1952년 4월 제랄드 호크스는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서 버뮤다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가 갑자기 60미터쯤 뚝 떨어지는 사고를 만났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내려가는 느낌이었는데 비행기는 곧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후에 마치 거인이 비행기를 한 손에 쥐고 아래위로 흔드는 느낌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방향도 알 수 없고 무선 연락도 되지 않았다. 한 시간 후에야 겨우 무선 연락이 되어 버뮤다에 무사히 착륙했다. 바람 한 점 없고 쾌청한 날씨였다. 간신히 살아 나온 호크스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버뮤다에서 500킬로미터 가량 비행하고 있었다. 밤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갑자기 비행기가 뒤로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비행기는 해면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부조종사가 간신히 기수를 들어 올려 비행기가 수평을 유지할 수 있었을 때는 비행기가 해면에 거의 부딪힐 정도였다.”

 

1963년 4월 11일 상후앙에서 뉴욕으로 비행하는 보잉 707의 여객기가 발견한 현상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목격지점은 북위 19도54분, 서경 66도47분으로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가장 깊은 곳 중의 하나로 수심이 5.5마일이나 되는 지역이다. 오후 1시 30분, 고도 31,000피트 지점, 진로에서 오른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해면이 마치 수중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한 것처럼 느닷없이 거대한 원형이 솟아오르는 것이 목격되었다. 바다 가운데에 거대한 양배추가 피어오른 듯한 광경이었다.

 

기장을 포함한 승무원들은 약 30초 동안 그런 현상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바닷물의 산더미는 가장 컸을 때 직경이 약 0.5∼1마일이었고 높이는 지름의 절반 정도였다. 이 현상은 바로 그 전날 실종된 원자력잠수함 스레셔나 호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자아냈으나 스레셔나 호가 실종된 지점은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므로 이 현상은 버뮤다 삼각지대에 어떤 이상한 힘이 작용했다는 유력한 증거 중에 하나로 자주 인용된다(일부 폭탄 전문가는 공군이 폭격 훈련 때 투하한 불발탄이나 어뢰 혹은 부유기뢰(浮游機雷)가 갑작스럽게 폭발한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964년 12월 전세 비행기의 비행사인 체크 웨이클리가 나소에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비행기가 2,400미터 가량 떠오르며 날개 주변에서는 눈부신 빛이 번득였다. 처음에는 승객 좌석에 있는 조명의 광학적인 반사라고 생각했으나 그 번득임은 차츰 광도를 더해갔고 비행기의 모든 계기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수동으로 계기들을 바꾸었다. 그런데도 빛이 점점 밝아져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5분쯤 계속되다가 빛이 사라지고 계기들도 정상을 되찾았다. 이 지역을 항해하던 선박들에게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1966년 7월 해난구조선 ‘굿뉴스호’는 엔진과 콤파스의 고장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갑판으로 나왔다. 이때 견인용 밧줄이 당겨져 있었음에도 이 배가 당기고 있던 화물선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배의 배터리가 모두 소모되어 있었다. 1972년 전자에 관련되는 특별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미국이 발사한 극궤도 위에 위치한 기상위성이 버뮤다 삼각지대 위를 통과할 때마다 미약해지는 신호를 포착하였다. 웨인 교수는 이 지역 안에서 강력한 전자기장 힘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러 가지 이론으로 이러한 간섭작용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지구의 자기장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한다. 또한 매 20∼25만 년마다 자장이 바뀐다. 즉 남극과 북극이 서로 바뀐다. 이때 지구의 기후는 극심한 변화를 보이며 생물에게도 치명상을 입힌다. 7천만 년 전에 공룡이 멸종한 것도 이 자장의 변화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도 자장의 변화는 진행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자기적인 지진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버뮤다 삼각지대가 바로 대표적으로 자장이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전자공학 전문가인 스미스는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직경 300미터 정도의 압축응결지대(壓縮凝結地帶)라고 불리는 위쪽으로 상당히 높이 뻗어 있는 지대를 발견했는데 이 지역에서의 자력과 중력은 항공기 따위는 쉽게 파괴할 수 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공간이 일시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므로 대비책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나침반의 편각이라든가 전기적 변조(變調)는 바다 속에 거대한 금속이 집중되어 있을 경우에도 생긴다. 세계 각지의 철 광맥이 매장되어 있는 지점에서 나침반에 혼란이 생긴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70년 NASA는 푸에르토리코 해구(海溝)에 수면이 다른 곳보다 낮은 지역이 있다고 보고한 적이 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해면의 부분적인 저하가 ‘바다 속에 이상한 질량 분포에 의해 중력의 편각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추측했다.

 

자기장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고도 있다. 1943년 10월 28일, 미 공군에 의해 필라델피아의 해상에서 벌어졌는데 인간이 탑승한 배에 강한 자장을 걸었을 때의 효과를 측정하는 것이다. 〈필라델피아 실험〉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 실험은 레이더에서 발생하는 특수 전자파를 이용하여 구축함 엘드리지호가 적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는 목적으로 2개의 자장발생기가 사용되었다. 실험이 진행되자 녹색의 빛이 나타났고 잠시 후에 배 전체가 이 빛에 휩싸였다. 그러자 배와 승무원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배가 있었던 곳은 수면이 소용돌이치며 구멍만이 남았다. 얼마 후에 이 배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버지니아 주 노르폴크 해변에서 발견되었다고 알려졌다.

 

실험은 곧바로 중지되었으나 그 후 승무원들이 갑자기 죽거나 정신이상 혹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 실험은 비밀로 분류되어 더 이상 상세한 자료가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이후에도 특수 전자기파를 이용한 공간 이동 및 시간 이동을 연구하는 비밀 프로젝트(일명 몬록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1983년에야 중단되었다. 비공식적으로 강력한 자장이 미치는 분야는 아직도 큰 수수께끼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자주 거명된다.

 

미국 정부도 버뮤다 삼각지대가 배나 비행기, 인체에 위험을 미치는 지역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기 이상지대라는 것만은 인정한다. 영국 해군성의 공로도(空路圖)나 해도(海圖) 등에도 이런 견해는 기입되어 있다. (계속)

 

〈인간의 실수도 큰 기여〉

 

하워드 로젠버그는 1973년, 지난 세기 동안에 8천 건 이상의 조난 신호와 50척 이상의 배, 20대 이상의 비행기가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이 숫자는 이 지역을 통과한 물동량으로 보아서 그다지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다는 광대하며 이에 비하면 항공기나 배는 아주 작은 것이다. 게다가 대양은 표면에서나 수중에나 항상 해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난파된 항공기나 배의 잔해를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미국 해안경비대도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의문의 실종사건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를 일축한다.

 

“이곳의 매우 빠른 소용돌이가 모든 재난의 증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 카리브해의 대서양 지구 안에서의 기후는, 갑자기 변화하기 쉽고 또 예견할 수 없는 바다 회오리와 뇌우 등이 생기기 쉬운데, 이것이 미숙한 조종사나 항해사로 하여금 갑작스러운 재난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 기상학적인 상황의 변화와 기자재의 고장, 사람들의 실수가 겹쳐서 이런 재난이 발생하는 것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대서양과 카리브 해에서 과거에 침몰된 선박의 인양을 위해 수중탐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실종된 선박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보물이 수장되어 있는 선박들을 찾는 것이다. 황금 찾기에 열을 올리면서 바다에 침몰한 수많은 선박들을 조사하지만 그들은 반갑지 않은 색다른 물건들을 자주 발견한다. 그것은 처음에 실종되었을 때 수많은 미스터리를 안겨 주었을 선박이나 항공기의 잔해다. 이들이 바다 속에 묻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선박의 침몰이 자주 있게 되는 것은 ‘푸른 동굴’이라는 해저 동굴 때문이다. 이 동굴은 바하마제도 전역에 걸쳐 석회암 단애(斷崖)나 그 밖의 바다 속에 있는 석회암 층 사이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동굴은 육지에 있던 종유굴이었으나 제3빙하기가 끝나 해수면이 상승하였을 때(약1만2천∼1만5천년 전) 바다 속으로 잠긴 것으로 현재는 주로 물고기들의 둥지가 되어 푸른 동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 해저에 입을 벌린 신비의 푸른 동굴. 버뮤다 삼각지대에 있는 지름 약 320미터, 깊이 125미터의 거대한 해저 동굴로 흰 모래와 산호의 고리로 둘러싸여 마치 거대한 검은 원반과 같이 보인다. ⓒ

이 푸른 동굴 내부에는 조류의 간만(干滿)의 차이로 막대한 물이 일시에 밀려들면 바다 표면에는 강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이러한 소용돌이에 휩쓸린 작은 배와 선원들은 순식간에 푸른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한 잠수부는 25미터 깊이에 있는 푸른 동굴에 한 척의 어선이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보트나 작은 배가 수없이 빠져 있는 사진까지 공개되었다.

 

또한 멕시코 만류가 플로리다 반도의 첨단을 통과하는 지점에 유사지대(流砂地帶)가 있어 이 유사가 해저에 침몰한 큰 배를 빨아들이기도 한다. 실종 사건이 생겼을 당시에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선박의 실종은 다소 수긍이 된다 하더라도 항공기가 실종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해답도 매우 구체적이다. 우선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자아내는 물기둥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대선풍(大旋風)은 특정한 계절에 발생하여 대량의 물을 깔때기 모양으로 꽤 높은 공중까지 말아 올린다. 이런 특별한 이상 기후에 휘말리면 낮게 날고 있는 항공기 정도는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다. 대낮이라면 이러한 물기둥을 발견하고 피할 수도 있지만 밤에, 특히 악천후 속을 비행하는 비행기라면 이런 재난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 아닌가?

 

해일도 있다. 바다에서 선박을 삽시간에 침몰시키는 이 해일은 보통 해저 지진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현상이다. 커다란 해일은 때로는 50∼60미터에 달하기도 한다. 이런 해일도 아무런 예고 없이 일어나므로 아무리 큰 선박이라도 해일 속에 휘말리면 순식간에 침몰하기 마련이다.

 

바다에는 정진(靜振)이라고 불리는 파도가 있다. 이것은 대개 지구의 지각 속의 단층이 갈라짐으로써 발생한다. 정진파도는 별로 높은 파도는 아니지만 거대한 조류를 이루는데다가 정체를 분명히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선박에는 매우 위험한 존재이다. 이 같은 파도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휩쓸어 온다면 배는 삽시간에 부서지고 잔해는 먼 곳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단층(斷層)현상이 대기 중에서도 생길 수 있다. 특히 항공기가 고속으로 대기권에 돌입했을 때 자주 발생한다. 또한 고도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다른 경우가 있으며 상승 또는 하강 항공기가 가끔 공항의 풍향계가 표시하는 방향과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부딪칠 때가 있다. 이 바람이 강하면 항공기에 재난을 가져옴은 물론이다.

 

이 풍력 변형 현상은 공중 조난의 중요한 요소로, 특별하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CAT(청천난기류)는 난기류가 상하 및 수평 방향으로 급속히 변화하여 항공기가 마치 바위벽에 부딪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경우 항공기는 풍압에 걸려 분해되거나 갑자기 생긴 진공(眞空)의 구멍으로 떨어져 바다 속 깊숙이 곤두박질치고 만다.

 

인간의 실수도 빠뜨릴 수 없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초보자들이 별다른 사전 지식도 없이 작은 배로 이 지역을 항해하다가 돌발 사태가 생기면 우왕좌왕하다가 침몰하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설명한 자연 현상과 인간의 미숙한 행동이 결합해 사고의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비행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940년부터 1950년대는 이들 지역에서의 항공기 실종 숫자가 매년 5대씩이나 되었다. 당시의 비행기는 아직 항로나 비행고도 등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계기들이 발명되기 전이므로 대체로 자기컴퍼스로 자신의 위치를 측정해야 했는데 자기컴퍼스가 종종 고장을 일으키면 조종사가 비행 착각을 일으키고 바다에 추락한다는 것이다.

비행교육관 로버트 그랜트는 광활한 바다 위에서 비행 착각을 일으키면 상하좌우 감각을 잃어버리고 우측을 좌측으로 생각하는 등 혼란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이를 ‘공간감각상실증’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우측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알지만 머리에서 좌측으로 입력하면 그대로 따르다가 비행고도 및 방향을 잃고 추락한다는 것이다. 그는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1950년까지 많은 비행기들이 추락한 것은 당시 비행기의 항법장치가 아직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여하튼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 한창 절정에 이른 1977년 여름, 미 해군은 소련 함대와 협력하여 ‘포리모오드 작전’을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목적은 서부 대서양 해역에 있어서의 자기이상 유무, 불규칙한 해류와 파랑(波浪)효과, 해중의 음향전파 경로, 돌발적인 자기(磁氣) 태풍 등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조사 결론은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버뮤다에서의 실종은 아틀란티스인들의 작품〉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이 매우 매력적인 것은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아틀란티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주장했던 질문들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1만2천년 전에 초고대문명을 이룩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문명에 대한 잔재가 어디엔가 남아 있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거석문명을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만들었다는 주장이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한 이유도 거석 문명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낙후된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을 만들 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아틀란티스인들이 석기시대로 퇴보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물론 이를 설명하는 논리도 있다. 문명의 퇴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인들이 재난을 피해 새로운 신천지로 이동했으나 새로운 땅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하고 현지 환경에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다하더라도 새로운 땅에서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원자재들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철로 기계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철광이 없다면, 결국 석기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는 아틀란티스인들이 고의적으로 지식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에 의하면 아틀란티스의 비극은 핵폭탄에 의해서라고 했는데 이들이 과학의 폐해로 아틀란티스가 멸망하자 첨단 지식과 비인간적인 기술에 대한 모든 자료를 폐기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지식 전수의 단절성이다. 아틀란티스의 첨단 기술이 소수의 집단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피치 못할 재난이 닥치자 그들만이 갖고 있던 기술들이 단절되었다는 것으로 이 부분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네 번째는 에드가 케이시가 여러 번 설명한 내용을 보다 확대한 것으로 아틀란티스인들이 아직도 버뮤다 삼각지대 안에서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기하는 이색적인 주장은 이들 지역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들도 사실은 아틀란티스인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해 불규칙적으로 버뮤다 삼각지대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납치한다는 것이다.

 

다소 믿기지 않는 이런 가설은 에드가 케이시가 아틀란티스인들이 수정에너지라는 획기적인 동력원을 이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타임머신을 활용하고 있다는 말에서 더욱 증폭된다. 특히 이 당시 불꽃처럼 타오르던 UFO 신드롬과 결합하여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한 술 더 떠서 UFO야말로 아직도 살아있는 아틀란티스 후예들이 지상에 잠깐 나올 때 타고 다니는 비행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케이시가 사망한 후 23년이 지나 그가 예언한 비미니 지역의 유적이 나타났다고 알려졌을 때의 반응이다. 케이시의 예언이 사실이라고 이야기되면서 아틀란티스인과 버뮤다 삼각지대는 더욱 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미스터리 중에서의 미스터리로 다시 태어난다.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이 아직도 버뮤다 삼각지대 내에 살아있다는 것은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가장 입맛에 맞는 설명이라 볼 수 있다. 아틀란티스를 보다 신비하게 만드는 데 큰 공헌한 에드가 케이시가 최면상태에서 이야기했다는 ‘리딩’을 설명한다. (계속)

 

〈심령으로 본 아틀란티스〉

 

에드가 케이시는 심령으로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의 전생을 말해주면서 그들 대부분이 과거에 아틀란티스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과 상담한 사람들의 직업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등 자신이 최면상태에서 본 내용들을 곧바로 기록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데이빗 하쳐 챠일드레스의 글에서 주로 인용한다.

 

“아틀란티스 땅에서 그 지역과 다른 지역들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동력에 의한 것들이 개발되었을 때, 당신은 뛰어난 조종사였다.”

 

“아틀란티스 땅에서 사람들이 우주의 힘(보편력)의 법칙을 이해하고 다른 지역에 교신을 보낼 때, 당신은 그 기계의 운전자였다.”

 

“아틀란티스에서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편리함을 적용하는 방법과 수단, 방식들을 알고 있었는데(오늘날 우리가 비행기라고 부르는 운송수단을 포함하여), 아틀란티스에서는 공중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들 속으로도 항해했기 때문에 공중의 배라고 불렀다.”

 

케이시는 이런 비행체들에 사용된 동력을 ‘생명의 밤’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을 찾아 온 한 고객이 생명의 밤을 이용하여 아틀란티스를 지배했던 사람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아틀란티스 혹은 포세이디아에서 당신은 생명의 밤이라고 불리는 것을 이용하여 그들을 다스렸다.”

 

케이시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아틀란티스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수정 또는 ‘불의 돌’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틀란티스인들은 태양에서 에너지를 뽑아내어 원자의 분해를 일으킬 수 있는 광선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아틀란티스 대륙 그 자체를 파괴한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아틀란티스 땅에서 두 번째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지금의 전기기술자와 같은 직업을 가졌는데, 그 힘을 비행기 및 배들을 파괴하는 데 사용했다.”

 

“아틀란티스에서 기자재들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수송하는 전기력이 개발되고, 원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중력 자체를 극복하고, 가공스런 힘을 가진 수정을 조작하게 되자 이것들이 파괴를 불러 왔다.”

 

“당신은 포세이디아에서 바다와 공중의 선체 및 텔레비전이나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빛, 즉 ‘활동의 형태’를 농축시켰던 거대한 수정으로부터 동력을 저장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수정을 동력원으로 사용했다는 그의 리딩은 1933년 12월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설명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설명한 거대한 수정으로부터의 동력은 현재 많은 분야에서 사용되는 레이저를 뜻하기 때문이다. 케이시가 예언할 당시에는 레이저는 발명되기 전이었고 그는 물리학자나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수정체가 있는 건물들은 절연체로 알려진 석면과 비슷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고 돌(수정)의 상부에 있는 건물은 타원형으로 일부가 회전식으로 열릴 수 있는 돔 형태라고 말했다.

 

“건물은 돔이 열렸을 때 그 힘을 여러 가지 운반체가 공간을 통해서 직접 적용받을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수정을 가공처리하는 것은 당시 비밀리에 전수되었는데 당신은 수정에너지가 직접 동력으로 작용되도록 방사선의 영향력을 조정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에드가 케이시의 말 중에서 신비주의자들로부터 가장 큰 호응을 받은 것은 수정에너지로 시간과 공간의 이동 즉 타임머신을 가동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최면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보인다>

 

타임머신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자 과학자들이 즉각 반격에 나섰다. 에드가 케이시가 타임머신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상과학(SF) 소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그의 말을 바이블처럼 간주하기 시작했다. 케이시가 과학적인 해석을 가하지 않았다는 반론에는 케이시는 과학자가 아니고 최면 상태에서 자신이 본 것만 이야기했으므로 과학적 설명으로 그의 예언을 평가할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여하튼 케이시가 최면 상태에서 보았다는 설명들에 대해 과학자들이 허무맹랑한 생각이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수정탑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아틀란티스인들이 개발한 비장의 기술인 수정에너지야말로 코미디와 다름없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정도이다.

 

‘아틀란티스인들이 사용한 수정기술, 공간과 시간 이동과 같은 기술은 현대과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에드가 케이시가 이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풀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틀란티스인들의 기술이 존재하는 것으로는 기자(Giza,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 대피라미드의 형태는 핵발전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지식과 힘을 갖고 있었던 절대자와 같은 사람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다소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하겠지만 아틀란티스의 신봉자들에게 케이시의 예언이 갖는 파괴력은 그야말로 핵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케이시는 수정탑에 대해 많은 설명을 했다.

 

“탈것들은 오늘날 발전소라고 불릴 수 있는 에너지발생소의 중앙에 있는 수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가동된다.”

 

“수정은 커다란 원통형 유리 형태인데 그것은 여러 단면으로 깎였으며 원통의 끝부분과 몸통을 통해 에너지가 집중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서 케이시는 첨단 기술의 해악을 설명했다. 처음에 아틀란티스인들이 수정에서 나오는 에너지 등을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하여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는데 나중에 이를 나쁜 목적 즉 권력을 잡는 데 활용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아틀란티스가 파괴되는 근본 이유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케이시의 예언 중에서 하이라이트는 아틀란티스의 유적이 1968년과 1969년 사이에 비미니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예언은 다음과 같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것과 동일하게 만들 수 있게 하는 기록이 현재 지구상에 세 곳이 있다. 아틀란티스 또는 포세이디아의 가라앉은 부분으로 플로리다 해안 바깥, 비미니라고 불려지는 곳 근처로서 신전들이 일부가 오랜 세월 바닷물 속의 퇴적물 밑에서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둘째는 이집트의 신전의 기록이며 셋째는 미주대륙의 유카탄이다.”

 

에드가 케이시가 말한 수정궁에 대한 매력은 2001년에 개봉된 디즈니월드의 만화영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Atlantis, The lost Empire)〉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14년, 마일로 싸치는 박물관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하지만 탐험가였던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아틀란티스를 찾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고대 언어를 푸는 일에 열중한다. 어느 날 그에게 정체불명의 여인이 나타나 그를 괴짜 억만장자 프레스톤 휘트모어에게 안내한다. 휘트모어는 마일로의 할아버지 친구로 할아버지와 아틀란티스 대륙을 찾는 것을 두고 내기를 했기 때문에 그를 후원해야 한다면서 아틀란티스를 찾을 단서가 적혀 있는 『목동의 일지』를 건네준다. 또한 아틀란티스를 찾을 잠수함과 루크 선장을 포함한 200명이나 되는 탐험대원도 지원한다.

 

잠수함 ‘율리시즈’에 오른 마일로와 탐험대원들은 리바이어던을 마주쳐 잠수함과 대부분의 승무원을 잃은 채로 아틀란티스에 도착한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키다 공주를 만난다. 키다 공주는 아틀란티스의 힘과 장수(長壽)를 제공하는 비밀은 특수한 곳에 설치된 수정에 있지만 키다 공주의 할아버지가 수정의 힘을 전쟁에 사용하다가 결국 아틀란티스를 파괴했다며 마일로에게 아틀란티스를 회복시키는 데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나 마일로와 함께 동행한 루크 선장은 마일로와는 달리 돈이 목적이었다는 흑심을 드러내고, 아틀란티스의 수정을 빼앗으려고 하는 데서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내용은 지구 어디엔가 외계인이 살아있다는 UFO 신드롬과 맞물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갖고 있다는 환상과 기대감을 소재로 삼은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케이시가 최면 상태가 아닐 때 자신이 아틀란티스에 관해 자꾸만 말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왜 아틀란티스가 자기 머리 속에서 계속 떠오르는가를 자문했다. (계속)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버뮤다삼각지대의 실종사건〉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과 수중 밑에서 유적들의 발견, 끊임없이 발생하는 실종사건 등이 혼합되어 버뮤다삼각지대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란 설명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버뮤다삼각지대와 아틀란티스를 연결시킨 미스터리가 근래에 태어난 말에 불과하다는 설명에 독자들은 어리둥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버뮤다삼각지대에 대한 실종 사건은 에드가 케이시가 사망한 후 14년이 지난 1959년에 『헤럴드』지의 에드워드 반 윙클 존스가 그 당시까지 일어난 몇몇 실종 사건을 수집하여 처음으로 발표했지만 이 기사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실상 버뮤다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라는 어휘를 만들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1964년 빈센트 가디스가 모험잡지인 『아소시』에 발표한 「죽음의 버뮤다삼각지대」부터 유래한다. 그는 사라진 섬이나 사라진 선원, 유령선 등 온갖 종류의 실종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버뮤다삼각지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하지도 못한 파장을 갖고 왔다.

 

그의 글이 예상하지 못한 주목을 받은 것은 아마도 ‘삼각지대’라는 말이 갖고 있는 특이한 매력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티스 기자조차 불가사의한 지역은 버뮤다삼각지대 이외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코 버뮤다삼각지대만이 특이한 구역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더구나 그가 버뮤다삼각지대의 실종사건에 대해 기사화한 최초의 날짜가 1964년이라는 숫자를 보아도 버뮤다삼각지대의 실종사건이라는 미스터리가 탄생한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가 발표한 잡지는 소설을 게재하는 잡지로 가디스의 작품은 소설로 발표된 것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 후 여류작가 애디켄트 T. 제프리가 버뮤다삼각지대에 관한 그때까지의 모든 진상을 정리하여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도 눈에 띄지 않고 사라졌다.

 

▲ 벌리츠의 『버뮤다삼각지대 미스터리』. 벌리츠의 책에 나온 이야기가 거의 모두 조작되었지만 그의 책이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뮤다 삼각지대의 미스터리를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그런데 앞에서 여러 번 설명한 찰스 벌리츠가 등장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유명한 외국어 연구기관의 설립자를 아버지로 둔 찰스 벌리츠가 1973년 『잃어버린 세계의 미스터리』를 발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여세를 몰아 1974년에 『버뮤다삼각지대』를 발표했다. 버뮤다삼각지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이 책은 읽기 쉽고 재미있다는 평을 받았지만 색인조차 달지 않는 등 작가 자신도 자신의 책이 학문적인 가치가 없다고 판정했는데 놀랍게도 이 책이 30개국에 번역되고 무려 1천800만 부나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제19편대(플라이트19)가 사라진 지 30년, 빈센트 가제트 기자가 ‘버뮤다삼각지대’란 용어를 사용한 지 10년 후의 일이다. 벌리츠가 내린 결론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버뮤다삼각지대에서 발생한 수백 건의 실종 사건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배나 비행기들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배의 경우 사람이 실종된 채 발견된다는 점이다. 어떤 것은 이 지역의 특성이나 인간의 잘못 등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일부는 우리의 개념을 가지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책이 많이 팔린 이유는 UFO, 시공간 현상, 다른 혹성의 지적 생물 등 대중의 인기를 몰아갈 수 있는 주제에 대한 추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내용의 진위 여부는 고사하고 그만큼 독자에게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바로 벌리츠가 제기한 문제와 관련해서, 버뮤다삼각지대의 가면을 벗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신문기사, 책,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계속 등장했다. 벌리츠의 책과 미해군 기록을 엄밀히 검토한 쿠쉬(Kuche)는 자신의 책 『버뮤다삼각지대 미스터리』에서 벌리츠의 책에 나온 이야기의 거의 모두가 조작되었다고 발표했다.

 

“버뮤다삼각지대의 전설은 조작이다. 이것은 부주의한 연구와 센세이션을 일으키려는 인간의 잘못된 마음에서 출발한 일부 작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이런 조작이 자꾸 반복되면 마치 사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밝혀지는 버뮤다삼각지대의 미스터리〉

 

버뮤다삼각지대의 사건이 얼마나 과장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유명한 제19편대(플라이트19) 비행기와 마틴 마리나형 구조비행기 실종 사건도 그 실상이 밝혀졌다. 우선 테일러 대위는 비행기 조종에는 베테랑이지만 로더데일 기지에 도착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아 버뮤다삼각지대는 그로서는 생소한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테일러 대위와 마지막까지 무선 교신을 한 무선기사 베어커는 그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당시의 사고 상황을 정확하게 증언했다. 자신과의 통신에서 테일러 대위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매우 당황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테일러 대위는 자신이 운항하는 지역의 지형지물에 익숙하지 않아 기계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믿고 편대를 인솔했는데 불행하게도 항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베이커는 테일러 대위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항로를 변경하라고 명령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실토했다. 당시 비행 편대는 1600킬로미터의 비행거리를 갖고 있었지만 항로를 잃어버리고 대서양 쪽으로 계속 비행하다가 연료가 떨어져 바다에 충돌했다는 것이다. 훈련생 중에 한 명이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플로리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편대장의 말에 순종했던 것도 알려졌다.

 

당시 사고 현장은 날씨가 매우 쾌청했다고 전해졌지만 사실은 매우 기후가 나빴고 태양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도 좋지 않았다. 풍속이 시속 25∼30노트나 되는 강풍이 불고 있었고 파고도 4미터나 되었다. 원래 아벤저 비행기 자체는 파도가 잔잔한 바다 위에서는 상당 시간 떠 있을 수 있는 비행기종인데 파고가 높아 연료가 떨어진 채로 파도에 충돌하자마자 순식간에 침몰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베이커는 19시 4분에 최후의 교신을 했는데 그 지역보다 더 멀리 나갈 경우 무선기는 무선 신호를 수신할 수 없었다고 했다. 테일러 대위의 또 다른 결정적인 실수는 비상주파수로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테일러 대위가 주파수를 돌리는 동안 통신이 두절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나, 그가 비상주파수로 바꾸기만 해도 비상주파수를 잡아주는 곳이 버뮤다삼각지대 내에는 여러 곳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비상조치를 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생각한다.

 

구조비행기의 실종 사건도 명확히 알려졌다. 이 비행기는 20시까지 레이더에 위치가 포착되었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이것은 비행기가 폭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전문가는 연료탱크가 누전이나 담뱃불로 폭발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비행기는 원래부터 날아다니는 가스탱크라고 불릴 정도로 연료 계통의 누설이 많았다. 이 때의 비행정 폭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버뮤다삼각지대의 실종 사건이 얼마나 과장되었는지는 유명한 필라델피아의 실험의 진상을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된다.

 

1943년에 미 해군이 선박을 보이지 않게 하는 실험을 한 것은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미국의 수송선들이 독일의 ‘U-Boat’에 의해 계속 격침 당하자 미국은 대비책으로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물체의 투명성 원리를 이용해서 공간이동을 시도하자는 의견이 구체화되었고 해군은 테슬라 박사가 발명한 테슬라 코일을 설치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러나 테슬라 박사는 자신의 발명을 생명체에 적용하는 것을 반대한 후 9개월 후에 자살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이 실험은 배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를 자기 어뢰에 안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험을 목격한 한 수병이 설명한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배를 커다란 케이블로 감쌌다. 그 다음에 케이블을 통해서 고압의 전기를 흘려보내서 배의 자기 신호를 혼란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자기 어뢰에 감지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당시를 생생하게 전한 에드워드 더전은 실험이 끝난 후 파티를 열었으며 실험 당시의 이상한 현상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말했다. 1955년 아마추어 천문가인 모리스 K. 제셉이 『UFO의 현상들』이란 책을 발표했는데 이 안에 칼 알렌이 주장하는 ‘필라델피아 실험’을 삽입했다. 알렌은 상선인 앤드류 후루셋호에 승선했을 때 배가 사라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고 승무원들끼리 싸우다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배뿐만 아니라 몇몇의 승무원도 새로운 차원으로 사라졌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앨런의 이 주장은 점점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시작했고 앨런이 외계인이라는 주장까지 나왔고 1984년에는 스튜어트 라필 감독이 「필라델피아 실험」을 제작했다. 이 실험을 은폐하기 위해 CIA를 비롯한 정부의 음모론이 있었고 외계인과의 비밀회의, 화성인이 출현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중심 당사자인 에드워드 더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신비하게 사라졌다고 알려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싸움이 시작된 것은 승무원 중의 몇 사람이 비밀 장비(레이다, 소나, 특수 임무 승무원, 신규 나침반 등)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을 제재 당했기 때문이다. 우리들 둘은 숫자가 적어 불리하자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인도해서 뒷문으로 빠져나오게 했으며 그 뒤의 일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술을 마시던 바를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그러나 엘드리지호는 이미 전날 저녁 11시에 항구를 떠났다. 누군가 엘드리지호가 항구에 없고 곧바로 노르폴크 항에 나타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상선으로는 엘드리지호가 항해한 거리라면 2∼3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군은 내륙의 특수 수로(水路)인 체사피크-델라웨어 수로를 이용했다. 해군이라면 이 항해를 6시간에 마칠 수 있다.” (계속)

 

〈아틀란티스의 전설은 계속된다〉

 

에드가 케이시가 예언한 대로 비미니의 수중으로부터 무언가가 나타나 아틀란티스 대륙이 드디어 발견되었다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버뮤다 삼각지대의 아틀란티스설도 서서히 인간의 관심에서 빠져나간다. 과학자들이 비미니에 대한 철저한 조사 결과를 계속 발표했기 때문이다.

 

1980년 미국 지질조사국의 유진 신 박사는 대형건축물처럼 보인다는 문제의 암석들을 연구하여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에게 결정적인 펀치를 먹였다.

 

“비미니 해안, 해수면 5미터 밑에 있는 석회암 구조물은 자연적으로 생긴 비치록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다. 만약에 비미니 로드가 인공물일 경우 여러 암석 덩어리들 성분 및 구조와 결이 서로 같지 않아야 되는데 여러 가지 검사에서 암석들의 구조가 서로 일치한다. 누군가 돌을 잘라 배치했다면 일부러 돌덩어리들의 절단면을 똑바로 통일할 이유가 없다. 퇴적물의 적층(積層) 형성을 보면 이것은 인위적으로 깔아놓은 돌이 아니다.”

 

유진 신이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암석에 포함된 조개껍데기를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를 함께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는 비미니 로드가 대략 2천200년 전에 형성된 구조물이며 그 오차범위는 150년 전후라고 못 박았다.

 

마이애미 대학교 탄소연대측정연구소의 제리 J. 스팁은 일곱 개의 암심 자료를 조사한 결과 비미니 해저의 비치록이 형성된 연대를 다소 올렸다. 그가 얻은 수치는 2천745년 전부터 3천510년 전까지 다양했는데 이 역시 1만1천500년과는 큰 차이가 있어 사실상 비미니의 아틀란티스 대륙 설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존 스틸과 함께 측정에 참가한 징크 박사는 이 길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 반박하면서, 바닷속에 있는 돌들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었지만 비미니 로드가 사람의 손에 의해 놓여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큰 돌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대략 1만2천년 전에 최후의 빙하가 급속히 녹았을 때 얼마나 해수면이 높아질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학자들은 해수면이 120∼160미터나 상승하였는데 이 정도의 증가라면 아틀란티스의 후보지로 알려진 비미니 지역의 상당 부분을 바다 속으로 침몰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연대별 수몰지도를 보면, 1만2천400년 전에 비미니 근처에는 한때 세 개의 섬이 있었다. 첫 번째는 초승달 모양의 섬으로 지금의 그랜드 바하마 섬, 그레이트 아바코 섬, 리틀 아바코 섬 근처이다. 두 번째 잃어버린 섬은 현재의 엘테라 섬의 타르펌 만을 메우고 있으며 남쪽의 땅은 쿠바에까지 이르고 있다. 세 번째 섬은 플로리다 반도 방향인 북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안드로스섬과 그레이트 바하마 퇴적층의 대부분이 이 섬의 영역이었다.

 

6천900년 전의 모습을 묘사한 수몰지도에는 세 개의 주요 섬 연안이 감소되어 있으나 전체 모양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4천800년 전의 수몰지도에는 모든 섬들이 사라졌다.

 

오늘날까지 세계의 많은 지역이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주장되었지만 거의 1/3이상이 아조레스 제도(경우에 따라서는 마데이라 제도 및 카나리아 제도 부근의 해저 고원 일대를 위치로 설정한다)를 거명하는 이유도 이런 수몰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지역은 대체로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의 위치라고 기록한 곳과 대체로 일치한다. 1만2천년 전 해수면이 높아지기 전에는 해면 위에 올라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아틀란티스 대륙의 비미니 설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은 아틀란티스 대륙이 전설처럼 하룻밤과 낮 사이에 수몰되는 등 엄청난 재난에 의한 것은 아니더라도 비미니 지역에 인간이 만든 다른 고대 문명의 유적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선 2001년 5월 14일 로이터 통신은 수심 700미터가 넘는 쿠바 서해안 근해에 도시 하나가 통째로 수몰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도시를 발견한 사람들은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이 아니라 인양작업 전문가들로 쿠바 정부로부터 독점적인 허가를 받아 쿠바 근해에서 침몰선을 수색하고 있던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수심이 700미터나 되는 곳에 도시가 있다는 것은 해수면의 상승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국 지구적 규모의 해수면이 상승하는 기간 동안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는 추정도 가능하므로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이 즉각적으로 반겼다.

 

그러나 이들 유적이 아직도 학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단 한 장의 사진도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탐험팀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한 것은, 그 지역의 보물선을 탐사하기 위해 소나로 지형을 조사했더니 인공구조물과 같은 형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을 수몰된 도시 유물이라고 발표해서다.

 

그런데 탐험팀의 자료에 대해 조언을 부탁받은 사우스 플로리다대학교의 알 하인 박사는 애매모호한 답변을 했다.

 

“아직도 나는 ‘이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다. 좀 애매하여 실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해저의 음향지구물리(音響地球物理)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다소 맥이 빠지는 조언을 했지만 지하 유물에 대한 보도는 계속되었다. 2001년 7월 13일 미국의 ABC뉴스는 다음과 같은 과학 스토리를 방영했다.

 

‘최근 해저를 탐사한 학자들은 대서양 해저(대서양 중앙 해령)를 따라 9천920킬로미터에 걸쳐 길게 뻗어 있는 화산성 단층해령의 옆에서 거의 18층 높이에 달하는 석탑들을 발견했다. 이곳에 장대한 높이의 20여 개의 석조물이 있고, 대서양 대산괴라고 불리는 해저의 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이곳을 플라톤이 언급한 ‘잃어버린 도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쿠바 심해에서 발견되었다는 다소 모호한 도시의 유적을 제외하고는 의문의 유적들이 놓여 있다는 바다는 대서양의 심연의 한 부분이 아니라 비교적 수심이 얕은 북아메리카 대륙붕에 있다. 과학자들이 아조레스 제도를 가까이 둘러싸고 있는 해저 평원을 조사한 결과 이 지역이 수몰된 땅임을 발견했으며 이 해저 평원은 전체가 120미터에서 270미터 깊이에 놓여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부터 해수면이 조금씩 상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문명이 존재했다면 그 유적이 바닷속에 수장되었더라도 아직 인간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듀크 대학의 브루스 히젠 교수는 푸에르토리코 해구를 조사하던 중 상당히 깊은 곳에서 산호초를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산호초는 수심 15미터 이상에서는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로 판단하건대 우리가 조사한 지역은 한때 해수면에 가까웠음이 틀림없다. 이 같은 결과를 얻으려면 육지가 2∼3마일 함몰했거나 해수면이 지금보다 2∼3마일 낮았거나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여 해안선에 인접해 있던 아틀란티스 대륙을 침몰시켰다는 것은 빙하의 영향이 장기적인 것에 비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아틀란티스 신봉자들이 계속해서 매력을 느끼고 있는 주제이다. 그런데 이 가설의 문제점은 기원전 1만 년 전에 소행성이 떨어졌고(일반적으로 5천년마다 지름 200미터 정도의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고 설명됨.) 대형 재난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대륙이 침몰될 정도 즉 적어도 해수면이 100미터 정도 상승하기 위한 바닷물이 급격하게 증가해야 하는데 그 공급처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해일에 의해 일부 지역이 물에 휩쓸린다 하더라도 대부분 곧바로 원상복귀된다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미니 지역 등 대서양의 일부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설명을 지지하는 아틀란티스의 신봉자들은 생각보다 많이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빙하 때문이든 혜성의 충돌 때문이든 여하튼 사라졌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찾지 못했을 뿐이지 언젠가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인간의 눈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도 버뮤다 삼각지대 밑에 아틀란티스인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부정기적으로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납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생각이 지지받을 수 있는가는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그러나 버뮤다 삼각지대가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설명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아직까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버뮤다삼각지대를 통과하거나 방문하는 사람들이 불안감에 싸일 필요는 없다. 현재 지구의 상공에는 수많은 정지위성들이 배치되어 지구의 각종 상태를 정밀 체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작은 항공기의 경우라 할지라도 짙은 구름 속에서 똑바로 갈 수 있는 자동 전파 유도시스템이 의무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신봉자들이 벌이는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아틀란티스 대륙의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플라톤이 설명한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철학적인 창작물이라는 견해가 학자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캠프는 『잃어버린 대륙』이라는 저서에서 플라톤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플라톤의 이야기는 정치적·역사적·과학적 가공의 산물이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의 SF물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상상해 만든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아틀란티스도 진화했다 – Sciencetimes

 

 



[이 게시물은 파아란 님에 의해 2021-01-22 11:22:43 상고사 관련 에서 이동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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