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과 6.25 전쟁의 실체
독립운동가 일송(一松) 김동삼 선생의 손자 김중생 옹(翁)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김중생| 명지출판사| 2000.07.01 | 274p | ISBN : 8931107447
도서관 소장정보 :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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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중국에서 출생하여 '한국전쟁' 때 인민군 6사단에 복무했던 '김중생' 씨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며, 김씨는 현재 '한국국적'을 취득해 서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김씨는,독립투사 '김동삼'선생의 손자로써 그는 6.25 남침 '주력부대'는 '조선의용군' 이 주축이된 '6만5000'명의 '조선족'이었다는 것은 밝힌바 있습니다.
■ 조선 의용군의 정체
'조선의용군'의 뿌리는 '조선혁명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30년대 항일무장 투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민족주의 인사와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뒤섞여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양세봉 장군' 이후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로 맥을 이었고, 그 중 공산계들이 이탈하여 '조선의용군'으로 '중국공산당' 아래로 들어간 것입니다.
'조선의용군'은 6.25 이전에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 주력부대로 재편되어 남침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은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항일무장독립부대를 결성하게 되는데 중국국민당 지도부와 연계하여 '한중' 연합체 성격의 무장부대의 필요성에 의하여 탄생한 것으로 '조선혁명군'의 뒤를 잇는 '조선의용대'가 이것입니다.
'중국국민당 산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족청년' 122명을 중심으로 출범하고 1942년 좌익계열 대원들이 의용대본부가 있던 '중경'을 떠나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공산당' 영향권으로 들어가버리면서 '김원봉' 계열은 광복군으로 참여하고, 화북지역으로 떠난 좌익계는 '중국공산당'의 지원 하에 '조선의용군'으로 편제를 갖추어 '중국공산당'의 지휘계통을 따르게 됩니다.
이들은 일본패망 뒤에도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았으며 '국민당' 정부와의 내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은 '조선의용군'을 만주로 이동시켜 현지 '조선족'을 입대시켜 규모를 확장하여 후에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국민당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들은 6.25 이전에 북한으로 이동되어 인민군의 최전방에서 남침의 선봉대 역할을 맡았다. '김일성'은 6.25 이전에 1950년에 두번에 걸쳐서 모택동에게 밀사를 보내어 조선족 부대의 파병요청을 한 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습니다
.
■ 김중생씨의, 증언입니다
'조선의용군'(조선족) 은 3년 동안 모두 10만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증언합니다
또한,김중생씨는,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김씨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의용군'출신 퇴역군인 100여명을 수소문해 만났고, 중국과 국내에서 발표된 관련 논문과 저술을 통독했다고 합니다.
김씨는 이 책을 쓰면서 일본 패망 이후 만주로 집결했던 조선의용군이 850명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동안 학계에서 정설처럼 여겨져온 ‘400명’의 배가 넘는 규모다.
김중생씨 작업의 결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6·25 전쟁에 참가했던 '조선의용군' 가운데 200여명의 명단을 최초로 정리해낸 것이었다.
그는 이들의 신상을
▷1945년과 46년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두차례로 나눠 개별입북한 경우
▷1949년부터 2년간 부대를 인솔하고 입북한 경우
▷휴전후 중국으로 돌아온 경우
▷입북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던 경우 등으로 구분해 정리.
'김중생'씨는.참전 '조선의용군'의 주요 지휘관들의 출생년도 등 개인 신상은 물론 의용군 시절 및 북한 입국 전후의 행적 등도 상세히 밝혀냈으며, 이처럼 꼼꼼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김씨는 “6·25 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21개 연대 가운데 47%가 만주에서 건너온 조선족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중생'씨는 6·25전쟁에 참여한 전체 조선족 규모를 10만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이 가운데 개전 이전에 북한으로 건너간 경우가 '6만5,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북한은 전쟁중이던 1950년 겨울부터 이듬해에 걸쳐 '인민군' 총참모본부 군사동원국 소속 장교들이 중국 현지로 건너가 '조선족들'을 상대로 모병(募兵)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김중생'씨는 관련 당사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때 하얼빈·옌지(延吉)·무단장(牧丹江) 등에서 ‘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조선족이 1만명 안팎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고, 유엔군 참전으로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중공군이 개입하기에 이른다. 중공군은 한꺼번에 수십개 사단을 전선에 내보냈다가 병력 손실이 발생하면 새로운 부대로 교체하는 방법으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108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다.
이때 참전한 '중공군은' 조선족이 아닌 한족(漢族)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배치될 때 반드시 조선족 통역요원이 동행했다고 한다. 1개 사단에 150명 정도의 통역이 배치된 것으로 추산하면 '중공군'을 따라 참전한 통역요원만도 2만5,000명이나 된다. 때문에 3년여에 걸친 한국전쟁중 북한에서 활동한 전체 조선족의 규모는 10만명에 달하리라는 것이 김중생씨의 분석이다.
관련자료와 퇴역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계해낸 이같은 자료를 종합하고 김중생씨가 내린 결론은 '조선의용군'이 밀입북하지 않았더라면, 6·25 전쟁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상당기간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