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


우리나라 역사의 정론이라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2002년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국가 형성 단원에서 우리나라에 언제 국가가 성립됐는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했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B.C.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해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돼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요소는 후대로 오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또 어떤 요소는 없어지기도 했다.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되는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했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했다.’


이 글을 읽으면 단군이 신화적 존재인지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말인지 다소 혼동스럽다.


앞의 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건국했다고 한다’이다. ‘건국했다’와 ‘건국했다고 한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한마디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자신 있게 명시하지 못하고 남의 입을 빌려 표현한 것과 다름 아니다.


<실증사학에 의한 고대사>


이러한 모호한 기술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후 실증사학(實證史學)이 뿌리 내리면서 기록으로 남지 않은 역사는 기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역사방법론이 주류를 이루었음에서 기인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두계 이병도(李丙燾) 박사와 그를 잇는 학파를 실증주의 학파라고 부른다.


학계의 통설에 의하면 실증주의(positivism)를 특징짓는 명제는 과학만이 가장 타당한 지식이며 사실만이 지식의 가능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사실과 과학에 의해 확인된 법칙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이나 실체의 존재 및 그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며 어떠한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연구 방법을 배격한다.


이는 역사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보려는 학문적 연구 태도와 관점, 다시 말하면 역사의 과정과 자연의 과정을 동일한 종류의 것으로 보고 자연 과학의 방법을 역사의 해석에 적용하려는 입장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신복룡 박사는 썼다.


이들은 최종 자료를 문헌자료에 의존한다. 아무리 많은 고고학 자료가 있다 해도 자의적인 해석이 되기 쉬우므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최종적으로 문헌자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문헌자료를 근거로 한다는 것에도 문제점이 있음을 자인한다. 문헌 자료란 글자가 생긴 후에 만들어진 것인 데다가 당시의 사회 모습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줄 정도로 자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실증사학에서도 양측을 병용해 접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병도 박사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조선사』를 편찬한, 이완용이 고문으로 있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의 일원이며 이후 한국 사학계를 주도했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이끌었고 해방 이후에도 1950~1960연대에 『한국사』 전 6권을 발간하는 등 한국 사학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실증사학은 영국·불란서·독일·미국·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라는 데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원래 실증사학은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역사는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실증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주장을 기본으로 한다. 유적과 유물도 과학으로 실증된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사료의 경우 주관적 판단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배제한다. 당연히 민족사학 등은 비판의 대상인데 일반적으로 실증사학은 짧은 역사를 가진 서양사회가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학문이라는 데 문제점이 도사린다.


이 문제는 이곳에서 다룰 성질이 아니므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지만 여하튼 실증사학을 표방하는 측은 서기 1281~1283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적힌 단군을 실존인물로 대접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단군이 인정된 역사>


2007년 발간된 교육인적자원부의 『국사』에서는 한반도 청동기 보급 시기를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최대 1000년까지 앞당기고 고조선 건국도 공식 역사로 편입했다.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했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기원전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해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했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건국했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부분이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로 수정됐고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로 고인돌이 비파형 동검과 함께 삽입돼 우리 역사에서 고인돌의 비중을 높였다. 또한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 2002년도 『국사』 :


‘신석기 시대를 이어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기원전 15~13세기경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됐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 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했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됐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 2007년도 『국사』 :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고인돌도 이 무렵 나타나 한반도의 토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 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했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됐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됐다.’


이와 같은 수정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설명은 당당하다.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증거로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 결과를 제시했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부터라고 주장했으나 그동안 발견된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가 과거보다 앞선 시기로 나타나므로 이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는 것이다.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어 기원전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고 옥방 유적의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각각 기원전 1590~기원전1310년과 기원전 1620~기원전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이형구 교수는 탄소연대 측정 전까지 학계에서는 대체로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를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고 설명했다고 지적했다.


<건국대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기원전 1420~기원전 1100년, 기원전 1400~기원전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박물관> 역시 서울대학교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었다고 발표됐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기원전 1206~기원전 830년으로 측정됐다.


기원전 1500년을 상회하는 유물도 계속 발견됐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는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간다. 최몽룡 교수는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경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기원전 1878~기원전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기원전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대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16세기~기원전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발표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센티미터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서강대의 이종욱 교수는 “중국이 고조선 건국 장소인 중국 요동지역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데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계속)


참고문헌


『한국사 새로 보기』, 신복룡, 풀빛, 2001.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최몽룡 외, 주류성, 2004


「고조선, ‘역사’의 발자취를 찾았다」, 박종진, 주간한국, 2007.3.6


『국사』 교과서의 수정 즉 한국의 청동기를 기존 학계의 정설보다도 최소한 1천여 년 앞당기면서 단군을 실체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각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단군조선 설득력을 갖아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동안 부단히 단군조선의 실존을 주장해온 재야사학계에서는 즉각적으로 정부의 정책 변경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부 강단사학계에서도 ‘고조선 건국기사 개선과 국사교육 강화’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고조선역사문화재단>은 강단과 재야를 아우르면서 고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 답사하고 정립하기위해 발족됐다.


반면에 교육인적자원부의 급작스러운 발표에 이의를 제기한 학자들도 이어졌다.


송호정 교수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측의 급작스러운 교과서 개정은 “중국 동북공정에 대항해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고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역사연구소>의 김정도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됐다고 한 『삼국유사』의 내용을 단정적으로 인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발견된 출토 유물을 보면 많이 올려도 기원전 15세기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데, 동북공정에 대항한 감정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임지현 교수는 학계 일부에서 청동기 시대 개막 시점을 기원 전 20세기로 앞당기는 것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라는 규정이라면서 청동기 시대 개막 시기를 앞당기려는 시도에 대해 우회적인 비판을 가했다. 또한 청동기 시대의 개막이 더 먼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한국 민족의 역사적 역량이 뛰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역사인식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어떤 현상의 기원이 반드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나타나야 하고, 외국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면 마치 민족적 자부심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도 지적했다.


이것은 교과서의 단군조선과 청동기에 대한 수정이 정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감정적이고도 국수주의적 대응인가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번의 교과서 수정이 그야말로 민족주의적 발상의 일환에 따른 것이라면 또 한 번의 교과서 수정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지적했다.


<고인돌의 부활>


학계에서조차 단군조선의 삽입을 두고 찬반론이 있는 차제에 2007년 수정된 『국사』 교과서에는 매우 특이한 문장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논란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로 고인돌이 비파형 동검과 함께 삽입됐다는 점이다. 이는 고인돌이 한국의 역사를 단군시대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민이라면 비파형동검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더 이상 거론하지 않지만 고인돌의 경우 도대체 고인돌이 어떤 중요성을 갖고 있길래 한국의 역사를 1천년 이상 끌어올리는 데 관건이 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은 다행스럽게도 고인돌을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2000년 11월 말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제977호’로 등록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 창덕궁, 종묘, 경주역사지구를 포함해 총 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유산은 인류 전체가 보호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을 지칭하는데, 세계유산위원회의 엄격한 등록기준에 따라 지정되는데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유네스코의 까다로운 선정기준을 너끈히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로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한반도 전역의 고인돌은 북한지역의 황해도 은율과 평양 등 북한에 1만4천 기 정도 있고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남한에 2만4천 기 정도 있다고 알려졌지만 수몰지구를 발굴하면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고인돌 등 모두 계산하면 남·북한 합쳐서 5만 기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에 산재한 고인돌은 약 8만 기로 추정되며 거석유물이 많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의 경우 고인돌이 1천500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5만 기가 얼마나 많은 숫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5만 기도 일본의 코모토 마사유키가 1960년대 한반도에는 고인돌이 8만 개 이상 있었다고 지적한 것을 볼 때 한국에 얼마나 많은 고인돌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하튼 전남지역에서는 2천2백여 곳에서 무려 2만여 기가 발견돼 세계적으로 단일면적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소위 ‘고인돌 문화지대’라고 불러도 될 만큼 풍부한 자료가 산재해 있는 것이다.


화순지역에는 사적 제410호인 화순 고인돌유적을 중심으로 한 반경 5km 주변 일대에 50개군 4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분포하고 있다. 화순군에는 160개군에 1천323기가 분포하고 있다. 전남 내륙지역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으며 또 많은 분포수를 보인다. 이의 분포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숫자이다. 즉 전북 고창지역이 약 1천200여 기, 인천 강화가 80여 기인 점과 비교해 볼 때 단위면적에서의 밀집도가 가장 높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역사를 끌어올리는 한 축으로 제시된 고인돌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역사가 짧은 고인돌 연구>


한반도의 고인돌이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서양 선교사 칼레스와 가우랜드가 한반도의 고인돌을 유럽 학계에 소개하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고인돌은 한자로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데 지석은 지탱하는 돌, 우리말로 굄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인돌은 뚜껑돌을 지탱하는 돌이 있는 무덤이라는 뜻으로 어원상 고임돌이 고인돌로 변한 것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왜 세웠는지 몰랐다.


그런데 고인돌 뚜껑돌 밑에서 인골과 부장품을 발견하고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고인돌이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덤에 뚜껑돌을 덮고 그 밑에 매장부를 두고 뚜껑돌을 받치는 고임돌(지석)을 매장 주체부 위에 둔다는 점이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방에서 발견되는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은 얇게 잘 다음은 판돌로 상자 모양의 벽체를 쌓고 그 위에 넓은 뚜껑돌을 덮어 하나의 거대한 조형물이나 제단 같은 형태를 갖고 있다.


고인돌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한서(漢書)』에서 보인다. 『한서』는 후한의 반고(班固)가 저술한 것으로 동이족에 관한 자료가 많아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 사료이다.


‘효제 원봉(元鳳) 3년 1월 태산의 래무산(來蕪山)대 남쪽에서 수천명이 ‘슁슁’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큰돌이 스스로 세워져 있었다. 이는 높이가 1장 5척이고, 크기가 48발이며 깊이가 8척으로 큰돌의 밑에는 3개의 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큰 돌 주변에 수천의 백조가 한데 모이고 있었다.’


이 기록에 의한 원봉 3년은 기원전 78년이다. 3개의 돌이 다리로 받치로 있는 것을 보면 탁상식 고인돌이 틀림없으며 크기를 한척(漢尺)으로 계산하면 약 3.5미터에 깊이는 1.86미터로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로 추정된다.


요동지방의 고인돌에 관한 기록은 기원 3세기경 서진(西晉)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공손도전〉에도 보인다.


‘(중략) 한(漢) 나라의 왕이 당장 끊어지게 되자 여러 대신들이 모여 부처의 귀에 대해 말하던 중, 마침 양평 연리사에 큰 돌이 생겼는데, 그것은 길이가 1장 남짓하고, 그 아래에는 새 개의 작은 돌을 다리로 삼은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공손도에 말하기를 “이것은 한선제(漢宣帝)의 면류관 모양의 돌로서 상서를 나타내는 징조다. 즉 마을 이름이 여러 선군(先君)과 같고, 사(社)는 땅 주인인데다가 광명이야 당연히 땅위에 있으니, 이렇게 해 베 분이 보필하고 있다”고 했다. 공손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이때는 기원 190년으로 다리가 세 개이고 개석이 면류관을 닮은 것으로 보아 역시 탁상식 고인돌로 보인다. 두 기록을 보아 현지인들이 이러한 고인돌의 축조와 기능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기원전 1~2세기경에는 고인돌이 세워지지 않아 잊혀진 이야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에 관한 기록은 금나라의 왕숙이 저술한 『압강행부지(鴨江行部志)』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됐다.


“서산(西山)에 놀러 갔더니, 석실 위에 바위 하나가 있고, 그것의 가로와 세로는 3장에 달하며, 두께는 2척 남짓하다. 돌의 모서리는 반듯하고 매끄러우며 그 생김새가 마치 바둑판과 같다. 큰 돌 아래에는 3개의 돌이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장이나 되고 그 깊이도 1장에 가깝다. 거기에는 틈이 전혀 없으며, 도끼로 다듬은 흔적도 없다. 그곳 사람들은 이것을 석붕(石棚, shipeng)이라 부른다.”


이 고인돌은 요령성 와방점시에 있는 탁상식 고인돌 중 하나로 추정된다. 오늘날 중국에서 고인돌을 석붕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금나라 왕적이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支石墓)이란 용어는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이규보는 고려 신종(神宗) 3년(1200) 11월 말에 전라도를 여행하던 준 금마군에 이르러 지석묘를 관찰할 수 있었다.


“다음날 금마군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을 구경했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해지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이했다.”


이규보가 본 고인돌은 전북 지방에서 몇 안 되는 탁상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중국은 석붕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이규보는 지석(支石)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고인돌의 모양새나 규모에만 호기심을 가졌을 뿐 이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인돌 속에서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발견되면서 이 거대한 바윗돌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또한 고인돌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치밀한 기초공사가 필요한 구조물이다. (계속)


참고문헌


「청동기 주역 ‘퉁구스 예맥족’이 주역」, 유홍준, 문화일보, 2004.11.25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한국 지석묘 연구』, 유태용, 도서출판 주류성, 2003


「고인돌 왕궁-고조선」, 『역사스페셜 4』, 효형출판, 2003


고인돌에 대한 연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도 매우 늦게 시작됐다. 고인돌을 선사시대의 중요한 유물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고인돌이 처음 발견됐을 때 학자들은 원시인들이 커다란 돌들을 편의에 따라 적당히 늘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의 스톤헨지를 비롯한 거석들의 구축 연대가 기원전 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지고, 아무 계획 없이 그 큰 유적을 건설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면서 고인돌에 대한 문화사 연구가 시작됐다.


〈고인돌은 거석문화의 발자취〉


먼저 고인돌의 기능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고인돌의 정확한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설들이 있으나 19세기 말까지는 대체적으로 제단의 기능을 갖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사람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외형적으로 웅장함을 드러내는 대형 거석일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령지방의 탁자식 고인돌 중 일부는 후대에 종교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고인돌을 선사시대의 돌무덤, 즉 지석묘(支石苗)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며 거석문화의 한 자취로 간주한다.


고인돌의 주요 기능을 무덤으로 해석하는 근거로는 고인돌이 한 곳에 무리를 지어 분포하고 있고, 결정적인 증거로 사람뼈와 함께 부장품이 발견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03년을 기준으로 조사가 이루어진 고인돌의 경우 76곳에서 인골(人骨)이 출토됐다. 학자들은 한국의 토양 대부분이 산성이라는 지질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고인돌에서 인골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한다.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무덤 5호 고인돌에서는 38명에 해당하는 인골이 나왔다. 인골이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은 평안도이고 그 다음은 황해도와 충청도다. 충청북도 제천시 황석리 고인돌에서는 남자 시신을 펴서 묻은 인골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발굴됐고 황석리 13호 고인돌에서는 어린 아이의 머리뼈까지 나왔다.


고인돌에서 나타난 인골의 특징은 대체로 뼈가 튼튼하다는 것이다. 체질인류학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생전에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며 살았으며 이들이 사회를 지배한 상층계급이었음을 알려준다. 고인돌에 묻힌 어린 아이 인골을 통해서도 당시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비록 어린 아이였을지라도 보호받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만한 혜택을 누렸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황규호는 적었다.


고인돌이 제단의 기능보다 무덤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인돌이 무덤으로 축조됐다면 당시의 사회상뿐 아니라 매장자의 성격까지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인돌에 대한 현재까지의 논의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고인돌이 사회의 모든 성원들의 묘제(墓制)로 이용됐다는 견해로 고인돌 사회는 사회적 계층화가 진전되지 않은 평등사회(egalitarian society)였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고인돌이 사회적 계층화가 이루어진 족장사회의 지배 상층계급(ruling elite)의 묘제로 고인돌 사회는 족장의 주도 아래 사회가 영위되는 계층사회(ranked, or stratified society)였다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은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부장품 가운데 사회적 계층화를 가리키는 뚜렷한 유물이 없음을 들어 고인돌 사회는 계층화가 진전되지 않은 평등사회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인돌이 평등사회에서 마을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협동작업으로 축조돼, 일반 주민들의 무덤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고인돌이 축조되는 시기에 부의 집중이나 노동의 전문화와 같은 증거도 보이지 않으며 고인돌의 분포와 밀도가 자연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두 번째 주장은 사회계층화를 나타내는 부장품들이 보이지 않는 점을 고인돌이 세워진 시기가 워낙 오래돼 파괴되거나 도굴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인돌군에서 대형 고인돌이 한 기씩 존재한 이유는 바로 촌락공동체에 우두머리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북한의 석광준의 경우 이 고인돌들이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소국 통치자들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M. 넬슨도 고인돌 사회를 계층사회의 물적 증거로 간주했다. 그녀는 고인돌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청동기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며 고인돌이 넓은 분포도를 보이는 것은 인구가 계속해서 증가했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특히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무문토기시대나 청동기시대로 부르는 것보다 ‘거석문화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학자들은 고인돌에 죽은 사람이 저승에 가서 잘 살기를 비는 마음과 남은 후손을 위한 기도의 마음이 함께 깃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무덤이 아니고 제단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 고인돌은 처음에는 무덤으로 만들어졌지만 고대인들의 조상 숭배와 조상에 대한 종교적 제사 활동을 진행하던 성지로 활용됐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요동반도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에는 최근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기도하는 대상으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고인돌이 마을을 보호하고 잡귀의 출입을 예방하는 수호신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고 송호정은 적었다.


묘표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묘표석으로서의 기능에는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내지 묘역 조성 집단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것,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단순한 기능 등이 있다.


이는 고인돌 떼 안에 존재하는 것인데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제단 고인돌과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떼의 중앙이나 한쪽에 치우쳐 위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보다 작은 규모이거나 소형으로서 그 자체는 방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고인돌 = 국가 탄생〉


한국에서 고인돌이 중요시되는 것은 세계적으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고인돌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에만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구성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고인돌은 비록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인돌 자체만을 갖고도 청동기 시대에 축조됐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즉 고인돌의 연대가 올라갈수록 바로 그 시기부터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 달리 부장품이 함께 발굴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화살촉과 돌검이 중심을 이루고 돌도끼 등의 석기와 민무늬토기 계통의 토기류, 옥(玉) 장식품과 청동기 등도 발견된다. 이 부장품들이 고인돌을 만든 시대와 사회생활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고인돌이 한국 고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중국 동북 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령 지역 고인돌 분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비파형동검 분포권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요동반도의 신금현 쌍방, 한반도의 대전 비례동과 신대동, 여천 적량동의 고인돌에서도 비파형동검이 출토됐다. 이는 비파형동검 문화가 고인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 달리 사람뼈와 함께 부장품이 출토된다는 사실이다. 부장품으로는 여러 가지 토기와 화살촉 같은 석기들뿐만 아니라 청동검, 옥, 석검 등도 발견된다. 부장품이 있다는 것은 고인돌의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이를 근거로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매장 방식을 보면 북방식 고인돌은 주검을 안치하는 곳, 즉 주검 칸이 지상에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은 주검 칸이 지하에 설치돼 있다. 특히 북방식은 비교적 넓고 편평한 땅 위에 세워 네모난 상자 모양의 방을 만든 다음 바닥에 시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은 것이다.


남방식은 큰 굄돌로 괸 바둑판식(지하에 판석이나 할석 등을 이용해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낮은 받침돌로 뚜껑돌을 올려놓은 것)과 개석식(蓋石式 : 받침돌 없이 뚜껑이 직접 지하 돌방을 덮고 있는 것)으로 나뉘어 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강 이남에 주로 분포하며 대부분 땅 밑에 판돌을 맞춰 넣어 만들거나 깬돌이나 냇돌 등을 쌓아 돌널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묻었다. 무덤 위에는 큰 뚜껑돌을 얹으므로 일반적으로 뚜껑돌만 보이므로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고인돌의 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이다.


북방식은 주로 우리나라 북부에 분포하고 탁자 모양을 하고 있지만 강화, 인천, 수원, 이천을 연결하는 선을 한계로 분포한다. 물론 남부에도 북방식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는 특별한 예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강화도 부근리의 고인돌(사적 137호)은 뚜껑돌만 해도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흑운모 편마암으로 추정무게 80톤으로 남한 최대의 것이다.


학자들은 받침돌을 좌우에 세우고 한쪽 끝에 판석을 세워 무덤방을 만든 뒤 시신을 안치하고 다른 한쪽을 마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양끝의 마감돌은 없어지고 좌우의 받침돌만 남아 있어 석실 내부가 마치 긴 통로처럼 돼 있다.


받침돌의 크기는 길이가 450센티미터와 464센티미터, 두께가 60센티미터와 80센티미터 높이가 140센티미터이며 기울기가 70도이며 장축방향이 동북 69도이다.


목포대학교의 이영문 교수는 이 고인돌은 거대한 덮개돌이 받침돌에 의해 웅장한 모습을 띠고 있고 주위에서 쉽게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 등을 볼 때 무덤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축조 집단들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거나 제단의 기능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북한의 경우 안악군 로암리의 북방식 고인돌은 뚜껑돌이 길이 778센티미터, 폭 572센티미터, 두께 70센티미터이며, 파손되지 않은 원형은 길이 910센티미터, 무게는 거의 72톤으로 추정된다. 또 받침돌과 막음돌까지 합하면 거의 100톤이나 된다.


현재 북방식을 포함해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군 운곡리 24호 고인돌로 길이 6미터, 너비 4.5미터, 높이 3.5미터로 무게가 무려 297톤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전남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사적 410호)은 길이가 7미터, 너비 5미터, 두께 4미터, 추정 무게가 무려 280˜300톤의 초대형 거석이다.


그러나 이들 고인돌에 대한 필자의 기초 측정에 의하면 이들 설명은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신리 고인돌을 280˜300톤으로 추정할 경우 운곡리 고인돌은 이보다 작은 약 200톤으로 추산됐다. 반면에 현재까지 영남 지역에서 최대 고인돌로 인정하는 울산시 언양읍 서부리 고인돌은 길이 9미터, 너비 5미터, 높이 3.75미터이며 여수지역에서 가장 큰 것으로 인정하는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 왕바위재에 있는 6호고인돌도 길이 8.65미터, 너비 5.6미터, 폭 2.9미터로 운곡리 고인돌보다 무게가 더 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대신리 고인돌과 서부리 고인돌, 산수리 고인돌은 거의 같은 규모로 추산되는데 이들 고인돌의 정확한 크기와 무게 산정은 차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 놓는다. (계속)


참고문헌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 최준식 외, 시공사, 2004


『유네스코 지정 한국의 세계유산』, 제주국립박물관, 2005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한국 지석묘 연구』, 유태용, 도서출판 주류성, 2003


「평양일대에서 새로 발굴된 고인돌무덤과 돌관무덤에 대하여」, 석광준, 『조선고고연구』, 1995


고대 국가에서 지배자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 중의 하나는 천문 현상 관측이다. 천문 현상을 왕권의 존립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성인으로 추앙 받는 3명의 제왕이 있다. 요, 순, 우가 그들인데 그들의 업적은 모두 하늘과 땅에 관한 일이다.


요 임금은 ‘희화씨’라는 천문 관측 관원과 기관을 설치했고, 순 임금은 ‘선기옥형(혼천의)’이라는 천문기구를 창안해 완벽한 천문 역법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 임금은 잦은 홍수로 황폐해진 중원지역의 치수에 성공함으로써 천하를 평정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결국 중국의 전설적인 세 성군 요, 순, 우는 천문 역법과 치수를 완성함으로써 제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하늘은 제왕만이 대행할 수 있고 자연재해는 제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자연관은 결국 하늘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천문학이 고대에서 통치 기술로 접목될 수 있는 것은 천문학이 농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파종하는 등 사시사철의 변화와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수다. 그런데 이 절기를 제대로 알아내려면 하늘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계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1년의 시작, 한 달의 시작점을 정확히 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시계가 없던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은 어떠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역(歷)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할 수 있었다. 4계절의 변화와 매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농사에는 필수였으므로 하늘을 관찰해 제대로 된 역을 만들고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제왕의 책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작물의 생육조건과 하늘 즉 기후와 연계시킨 노하우가 축적돼 있을 때 특정 작물이 잘 자라며 또 수확도 많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하늘의 정보는 하늘을 계속적으로 관찰하고 거기서 이상 징후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는 담당자가 있어야 함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문명사에서 천문학의 발달 여부가 중요시되는 것이며, 기원전 1200년경에 하늘을 관찰했음을 보여주는 바빌로니아의 토지 경계비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1800년이나 빠른 천문도가 우리 나라의 고인돌에서 발견된다.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는 주로 평양의 고인돌 무덤 중에서 발견되는데, 그 수는 2백여 기나 된다. 고인돌의 두껑돌에 새겨진 홈구멍이 천문도임을 알게 되기 전에는 이 홈구멍에 대한 견해가 구구했다.


고인돌의 뚜껑돌에 있는 홈구멍은 고인돌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으로 보거나 불을 일구는 발화구멍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으며 하늘과 태양 숭배사상의 표현 또는 장례의식이나 장식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일부는 민간에서의 장수를 의미하는 발자국으로 인식하기도 했고 피장자의 족보로도 보았다. 또한 중국학자들은 제사를 지내고 그 회수를 표시하거나 제사에 사용된 동물의 수량을 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인돌 무덤에 새겨진 홈구멍의 배열 상태를 조사한 학자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별자리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성좌도’라는 결론을 내렸다. 평범한 돌에 아무렇게나 구멍을 뚫은 것처럼 보이는 고인돌이 현대 과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우리 선조들이 당시의 최첨단의 과학기술 정보를 돌 위에 적은 것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획기적인 자료가 됐다.


고인돌과 같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별자리를 기록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위에 직접 별자리를 새겨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위 자체를 하나의 별로 간주해 바위들을 별자리 모양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인돌별자리의 추정 연대이다.


고인돌별자리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외새산에서 발견된 10호 고인돌 무덤이다. 평양에서 북서쪽으로 약 44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는 이 무덤의 돌은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어 글자를 전하는 돌이라는 뜻에서 ‘전자석’이라고 불린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했다. 밤에 별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하늘의 모든 별들이 한 별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이다. 또한 북극성 주변의 별들은 다른 별자리들과 달리 연중 계속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북극성은 오늘날 용별자리의 알파(α)별이다. 이 별을 중심으로 80여 개의 구멍은 큰곰별자리, 사냥개별자리, 작은곰별자리, 케페우스별자리 등 11개의 별자리를 나타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듯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歲差運動)을 감안해 연대를 측정하면 고인돌의 별자리는 4800±215년의 하늘을 보여준다. 또 같은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를 핵분렬비적법으로 측정해 4926년(±741년)이란 결과를 얻었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2900~30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평양시 상원군 번동 2호 고인돌 무덤도 기원전 30세기 전반기의 무덤으로 뚜껑돌 위에 80여 개의 홈구멍이 새겨져 있으며 크기도 제각각 다르다. 그 중 큰 홈구멍은 6개가 있는데 5개는 북두칠성의 국자와 자루를 연상시킨다. 북두칠성의 놓임새에 따라 나머지 별들을 관찰하면 큰 별 하나는 5제좌(사자별자리의 β별)에 해당하며 작은 별자리들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자미원(당시 북극)과 테미원, 천시원에 속한다. 동양에서는 하늘의 신들이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운영하며 별자리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는데 자미원은 옥황상제가 살고 있는 담(북극성)을 의미하며 태미원은 옥황상제가 정사를 논하는 장소, 천시원은 백성들이 생활하는 시장을 뜻한다. 이 고인돌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는 4800년 전 여름이다. 은천군 정동리 ‘우1-19호’ 별자리는 약 4,700년 전으로 나타났으며 계절은 여름경이다. 즉 여름경 밤하늘의 별을 새겼다는 뜻이다.


또한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 고인돌에 그려진 별그림은 길이 3.45미터, 폭 3.20미터, 두께 0.60미터의 뚜껑돌에 있다. 구멍의 크기는 가장 큰 것이 직경 10센티미터, 깊이 3.5센티미터이며 여러 가지 크기로 구분돼 있는데 용별자리, 작은곰별자리, 큰곰별자리 등을 나타낸다. 연대는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된다.


은천군 ‘ㅎ-3호’ 고인돌은 구멍수는 28이지만 별자리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인돌에는 븍극5, 구진, 자미원(당시 북극), 천리, 북두칠성, 등이 보이는데 연대는 3,944±215년이다. 강동군 화강리 고인돌에는 전사, 화개(케페우스별)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학적 연대는 3700년 전 여름경이다.


함경남도 함남 함주군 지석리의 고인돌 무덤에서 발견된 별그림은 기원전 1500년경의 것으로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중심점(북극점)을 기준으로 해 큰곰별자리에 속해 있는 북두칠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작은곰별자리, 카시오페아, 케페우스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특히 뚜껑돌 우측을 따라 은하수에 해당하는 작은 별들이 많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은하수가 별들이 많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의 관찰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석리 고인돌에는 별의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를 4부류로 구분해 새겼는데, 그 크기는 직경 10, 6, 3, 2센티미터 순이고 깊이는 3~3.5센티미터 정도이다. 이 돌에 새겨진 별을 관찰하면 동지, 하지, 춘분, 추분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특히 지석리 고인돌 별그림을 보면 그 이전 시기의 것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자리 별을 기준으로 볼 때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에 속하는 별에 해당하는 구멍들의 간격이 용덕리 고인돌보다 더 정확하며, 4등성 이하의 별까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단순히 별을 관상한 것이 아니라 관측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적용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은천군 ‘ㅂ-1호’는 오덕형 고인돌로 구멍수가 134개나 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별자리는 자미원, 직녀, 구진, 북극5, 정수(쌍둥이), 삼수(오리온) 등이 있는데 기원전 3,200년으로 추정됐다.


용덕리 고인돌별자리는 그 당시 북극점이 용별자리의 α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보다 1500년 후의 지석리 고인돌별자리 그림에는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다. 이것은 당시 북극점에 해당하는 별이 없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북극점이 세차운동에 의해 변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당시의 천문관측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총체적으로 대동강 유역에 있는 2백여 기의 고인돌 무덤에 그려진 별자리는 북극 주변의 별자리와 지평선, 적도 부근의 28수(二十八宿)를 비롯해 모두 40여 개가 된다. 이 별자리들은 북위 39도의 평양의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모두 새긴 것이다. 또 이 별자리에는 특이하게 은하수와 플레이아데스 성단들도 새겨져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이렇듯 많이 새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다.


2002년에는 평양시 순안구역 구서리에서 매우 특이한 고인돌이 발견됐다. 모두 9기의 고인돌이 배치돼 있는데 이들 모양은 누가 보아도 북두칠성이 분명했다. 이들 9기의 고인돌은 대체로 350미터 거리에 분포돼 있다.


유물로 돌활촉이 20개, 돌도끼 1개, 반달칼 1개, 질그릇 2개 등이 발견됐는데 돌활촉은 모두 점판암을 정교하게 갈아서 만들었다. 이들 고인돌은 구조형식상 북방형고인돌이다. 고인돌무덤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돼 있는 것은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에서도 나왔다. (계속)


참고문헌


「한반도 거석기념물 고인돌」, 황규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3년 10월


「화순고인돌에 대하여」, 네이버neverfell81, 2004.03.16


「지석묘는 무엇을 말하는가?」, 유태용, 『대한문화재신문』 제16호, 2004년 7월 15일


「고조선의 석각천문도」, 김동일, 조선고고연구, 2003년 1호


「고인돌 무덤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 추정에 대하여」, 김동일 외, 조선고고연구, 1999년 4호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렬되어 있는 구서리고인돌무덤 발굴보고」, 김동일, 조선고고학학회, 2005년 3호


고인돌별자리는 한반도 남쪽에서도 발견됐다. 경기도의 양평에는 양수리, 상자포리, 앙덕리, 양근리, 대심리, 문호리 등 곳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됐는데 양수리 두물머리 마을에 있는 고인돌(일명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에도 별자리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무덤방 안에서 채취된 숯(탄소)을 상대로 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연대측정에 의하면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000년 전으로 올라가는 한강변 고인돌>


양수리고인돌은 팔당댐 수몰에 따라 1970년대 초에 유적발굴을 시행한 것으로 양수리 동석마을(현재 양수2리)에서 두물머리마을(현재 양수5리)까지 노변에 5~6기의 고인돌, 도굴 파괴된 고인돌, 수몰지대에 포함된 고인돌 등 약 15기가 보고됐다. 이 중에서 수몰지대에 포함된 고인돌 5기는 1972년 8월 한강대홍수로 수몰 후 1973년 팔당댐 완공으로 수몰됐는데 두물머리고인돌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성혈이 선명히 그려져 있어 많은 관심이 경주되던 것이다.


1978년 이융조 교수는 대청댐 수몰지역인 충북 청원군 문의면 가호리 아득이마을의 고인돌 유적에서 조그마한 돌판을 찾아냈다. 고인돌에서 3미터 정도 떨어진 땅속에서 나온 이 돌판은 가로 23.5센티미터, 세로 32.5센티미터에 두께가 4.1센티미터였고 표면에는 지름 2~7센티미터의 크고 작은 홈이 65개나 파여 있었다.


박창범 교수는 아득이 마을의 고인돌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조사한 결과 이것이 기원전 500년경의 천문도이며 북두칠성, 작은곰자리, 용자리, 카시오페이아 등을 묘사한 것임을 알아냈다. 그는 아득이 고인돌이 천문도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표면이 매끈한 돌판 위에 새겨진 60여 개 구멍의 분포가 단순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제작한 흔적이 역력하고, 둘째, 돌판은 발굴 전까지 2천5백 년 동안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 묻혀 있어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아 후대의 가필이 없었고, 셋째는 북극성 주변의 별들을 묘사한 그림이 고구려 고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 등이다.


아득이 돌판에 나타난 별의 분포 형태는 서기 6세기 초에 세워진 평양의 진파리 4호 무덤 천장과 북한에서 기원전 15세기경으로 추정하는 함남 지석리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 별자리 그림과 유사하다. 이것은 상당한 세월 동안 별자리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전승이 있었다는 뜻으로도 설명된다.


고인돌 무덤에 왜 별자리를 새겼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당대 사람들의 죽음과 하늘에 대한 숭배사상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홈구멍이 새겨져 있는 뚜껑돌의 거의 모든 형태가 거북 등과 같이 가공됐다는 사실로도 설명된다. 거북은 원시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숭배한 불로장생하는 길한 동물로 ‘10장생’의 하나로 꼽힌다.


고조선 시대의 조상들은 거북을 모방해 무덤을 만들면 죽어서 저승에 가서도 오래 살 수 있으며 거북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별자리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면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간다는 관념이 강하게 생겨 땅의 신인 거북의 등에 하늘신인 별을 새겨놓아 하늘과 땅이 이어지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박창범 교수는 아득이 돌판 외에도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으로 보이는 홈이 새겨진 양구군 용하리 선돌, 경기도 서곡리 고려 벽화묘의 그림처럼 북두칠성과 삼성을 연상시키는 성혈들이 새겨진 양구군 오유2리의 자연바위 등을 별자리로 간주했다.


고대인들이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중요시한 것은 북두는 인간의 사후세계를 수호하는 별자리이며 남두는 인간의 무병장수와 수명연장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에 있는 칠성당도 북두칠성을 모신 사당이며, 사찰에 가면 볼 수 있는 칠성각도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이었던 칠성신앙이 불교라는 외래종교 속에 녹아든 자취이다.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힐 때 칠성판을 지고 가는 것도 생사의 두 세계가 영원으로 지속되기 바라는 우주관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별자리의 연대 추정 방법>


고인돌 위에 새겨져 있는 구멍이 별자리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천문학적 연대를 어떻게 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많은 모양이다. 이에 대한 원리를 순수 천문학적 이론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통해 설명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연대를 측정하는 비밀은 간단하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중앙의 큰 원 가운데 북극이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1천467개의 별이 282개의 별자리로 표시돼 있다. 그런데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그려진 시기와 현재의 별자리는 다소 위치변화를 갖고 있으므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져 있는 별자리를 현재의 별자리에서 역산해 추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위치 변화는 천체의 움직임 즉 지구자전축의 이동에 의한 북극의 움직임과 별들의 위치 변화를 가져오는 세차운동에 기인한다.


세차운동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별들이 보이는 위치가 약간씩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지구의 자전축이 태양 주위로 공전할 때 생기는 평면(지구의 공전궤도면 즉 황도면)에 대해 약 23도 27분만큼 경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전하는 지구는 공처럼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 약간 부풀어져 있으므로 여기에 태양과 달의 인력이 작용한다. 이 힘에 의해 지구의 자전축이 가리키는 북극이 지구의 황도면의 수직선을 먼 하늘로 연장한 직선 방향인 황도극 주위로 도는 세차현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세차현상이란 춘분점이 황도를 따라 서쪽으로 매년 50.2초씩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지구의 자전축(북극)이 황극을 중심으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은 2만5천729년, 약 2만6천년이 걸린다.


이것은 지구의 자전축이 1도 움직이는 데 약 71.71년이 걸리고 1천년마다 약 14도씩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극은 연대에 따라 달리 설정되게 되며 그에 따라 별자리들의 위치도 달라진다. 백도 주변에 있는 28수의 위치가 1395년에 작성된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영조20년(1744)의 관측 자료에서 차이가 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별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와 고대의 별의 적위가 달라지므로 이 수치를 알면 두 시대의 연대 차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차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원본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언제 그려졌는가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렇다고 하지만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들의 경우 설사 이것이 무슨 별자리인가를 확인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시기, 어느 계절의 별자리였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고인돌별자리의 방향에 현재 하늘의 별자리를 맞추어도 잘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고인돌별자리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세차현상을 이용한 회전천문도(고대별자리찾기판)를 사용하고 있다.


회전천문도에 의한 연대 추정에는 현대에서 고대 또는 고대에서 현대로 오면서 맞추는 방법과 북극이동각(세차변위)에 의한 연대계산방법을 사용한다.


현대에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회전천문도를 고인돌의 별자리방향과 동서로 일치시켰을 때 회전천문도의 별자리위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별자리판을 북극이동길을 따라 고대로 돌리면서 고인돌의 별자리와 맞춘다. 이때 북극점이 이동한 기간은 연대가 되고 보임구역판의 남북자오선이 가리키는 점은 월, 계절을 나타낸다.


다시 설명하면 기본별자리판을 고인돌 방향과 일치시키고 보조별자리판을 돌려 고인돌의 벌자리와 일치시키면 밤하늘의 별자리와 고대의 고인돌별자리가 얼마나 차이나는가를 알 수 있다. 이때 기본 별자리판의 별자리는 현재 밤하늘의 별자리를 나타내며 보조별자리판의 별자리들은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를 나타낸다. 즉 기본별자리판과 보조별자리판의 별자리들이 서로 일치하는 시기를 찾는 것으로 은천군 정동리 ‘우1-19호’ 고인돌의 별자리는 이 방법으로 4천700년 전 여름으로 추정했다.


고대부터 현대로 내려오면서 추정하는 방법은 회전천문도의 별판을 고인돌의 별자리와 일치시키고 방향을 서로 일치시키면서 찾는 것이다. 이때 방향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회전천문도의 방향을 고인돌의 별자리방향에 일치시킨다. 이를 위해 보임구역판과 좌표판을 함께 돌리면서 일치되는 때의 연, 월, 일을 찾는다. 물론 고인돌의 별자리 연대를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넓은 시간구간에서 임의의 값으로 무턱대고 추정할 수 없으므로 고고학적인 상대 연대에 따르는 시기범위를 사전에 계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양시 상원군 번동리 2호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80여 개의 구멍들은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별들로 확인됐는데 이 고인돌은 오덕형고인돌로 약 5천 년 전의 무덤인데 이 방법을 사용한 결과 4천800년 전 여름으로 추정됐다.


북극점 이동각(세차변위)에 의한 연대계산은 고인돌 별자리에서 북극(작은곰별자리)과 고대북극(용자리)이 명백히 주어지거나 또는 고대인들이 븍극별로 보았다고 인정되는 별이 확인될 때에 사용된다. 즉 당대의 북극별을 먼저 계상하고 황극을 중심으로 북극이동길을 설정한 다음 현대로부터 얼마만큼 이동했는가를 판정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고인돌별자리로 알려진 증산군 용덕리 10호 고인돌의 경우 이 방법을 사용해 4,800±215년을 얻었다.


별자리로 연대를 측정한 것이 신빙성을 갖는 것은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상대로 한 고고학적 상대 연대 측정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룡덕리 10호 고인돌은 키가 낮은 오덕형으로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3천년 전반으로 추정하는데 이 무덤에서 나온 팽이그릇의 핵분열비적법에 의한 연대값은 4,926±700년이었다.


반면에 고인돌 별자리를 북극점 이동각(세차변위)에 의한 연대계산에 의할 경우 고인돌의 연대는 현재로부터 4,800±215년이고 고인돌별자리를 회전천문도로 분석한 경우 4,700년 전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고인돌에 나타난 별자리를 분석한 천문학적 연대가 고고학적 연대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참고문헌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박창범, 김영사, 2002


「고인돌 무덤에 새겨져 있는 별자리의 천문학적 연대 추정에 대하여」, 김동일 외, 조선고고연구, 1999년 4호


일반적으로 고대 국가가 성립됐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설명된다.


첫째 왕궁건물의 존재, 둘째 도시의 존재, 셋째 성곽의 존재, 넷째 대형 무덤의 존재, 그리고 청동제 또는 철제 무기의 존재이다. 첫째 궁전 또는 관청건물의 존재는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다. 고대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최고지배자로서 왕이 있었으므로 왕이 일상적으로 거주한 궁전은 증거로서 매우 중요하다.


둘째 고대 국가가 성립하려면 당연히 도시가 존재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초기의 고대국가들은 대체로 도시국가였거나 도시국가들의 연합 형태였다. 이것은 국가 체계를 갖추지 못한 아프리카의 원시사회에서 촌락은 있으나 도시는 없다는 말로도 증명될 수 있다.


셋째 성곽의 존재는 도시국가의 성격을 구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성곽은 왕을 포함한 지배계급들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시설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개념의 성벽은 아니더라도 성벽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전제국가가 존재했다는 증거로는 부족함이 없다.


넷째 대형무덤의 존재는 고대 전제국가에서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권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대형무덤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건설할 수 없으므로 한정된 인원으로 구성된 원시사회에서는 대형무덤이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청동제 또는 철제 무기이다. 철제무기는 청동의 출현 이후에 나타났으므로 청동기의 발견은 고대 국가체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건이 된다. 이들 국가 성립의 요건 중에서 세 번째 성곽의 존재 유무야말로 고대국가가 성립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북한은 1993년 강동 대박산에서 단군릉을 발굴한 뒤 평양을 중심으로 고조선 시기의 유적을 집중 조사하여 이른바 ‘대동강문명론’을 주창하고 있다. 특히 단군조선이 5천 년 전에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유역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고대국가의 하나이며 발전된 청동기문화에 기초해 형성된 선진문명으로 정의한다. 더불어 ‘대동강문명’을 ‘세계 5대문명’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북한측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세계 학자들을 이해시키고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지만 어떤 근거로 대동강문명을 세계 5대문명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는지는 관심의 대상이다.


북한이 대동강문명을 세계 5대문명의 하나로 주창하는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중에서 크게 주목하는 것은 평양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는 성곽이다. 북한은 평양의 동북쪽에 봉화리 고성, 동쪽에 황대성, 동남쪽에 고연리 토성, 남쪽에 지탑리와 청산리 토성, 서남쪽에 운성리 토성, 서쪽에 성현리 토성 등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들 토성 간의 거리는 상호간에 약 50~80리 정도인데 북한의 남일룡 부교수는 이 성들이 단군조선시기 평양을 방어하기 위한 위성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중에서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의 지탑리 토성과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에서 발견된 성현리 토성, 그리고 1998년부터 발굴된 평양시 대성구역에 있는 청암동 토성은 단군 시대로 추정했다.


지탑리 토성은 사리원시에서 15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토성의 남쪽과 서쪽은 서흥강이 감돌아 흐르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서흥강의 줄기가 있어 사실상 성의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여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성벽은 북벽이 약 180미터, 동벽이 약 150미터인데 이곳에서 두 개의 문화층이 발견됐다. 하층 성벽은 자갈모래층 위 높이 3미터 너비 약 6.5미터인데 이 지역에 흔한 진흙과 자갈이 섞인 진흙으로 쌓았다.


북한측이 이들 토성을 단군 조선시기로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성벽을 쌓는 방법으로는 흙으로만 쌓는 토성, 나무만으로 둘러막는 목책, 진흙과 모래자갈 또는 진흙으로 다지면서 판축하는 방법, 돌을 가공하여 쌓는 석축 방식 등이 있는데 그 중 흙으로만 쌓는 토성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지탑리 토성은 붉은진흙층, 흑색진흙층, 자갈이 섞인 진흙층 등으로만 되어 있다.


② 성벽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빗살무늬 질그릇 파편 백수십 점, 돌도끼, 돌활촉, 돌그물추, 돌망치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 지층에서 단군시대의 유물은 발견되고 그 이후 시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③ 지탑리토성과 주변에 전반적으로 자갈모래층이 있으며 그 위로 신석기문화층, 팽이그롯문화층, 고대문화층이 있는데 자갈모래층 상부에 축조된 성벽에서 발견된 유물을 볼 때 팽이그릇이 단군조선 시기로 추정된다.


④ 지탑리토성 내부와 주변에서 팽이그릇 관련 집터, 돌단검, 곤봉 등 유물들이 수집되었는데 이 시기 산기슭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경우 단군조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현리 토성은 낮은 구릉지대로 토성은 조금 높은 둔덕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 역시 두 개 문화층으로 되었는데 하층 성벽의 밑너비는 3.5미터로 지탑리 토성보다는 작다. 성현리 하층에서도 청동기 유물인 돌도끼, 돌가락바퀴 등이 발견됐다. 돌도끼는 섬록암으로 만들었으며 길이 14.5센티미터, 두께 5.5센티미터 넓이 6.7센티미터로 전면을 연마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산등성이에 고인돌 수십 기가 발견되며 역시 팽이그릇 관련 유물과 고인돌무덤에서 발견되는 돌단검, 돌창, 돌도끼 등이 발견됐다.


청암동 토성(북한측은 고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으로 비정)은 남쪽으로는 대동강, 동쪽으로는 합장강, 북쪽으로는 합장강과 보통강으로 흐르는 작은 강줄기들이 흐르므로 세 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의 북쪽은 모란봉에 연결된다. 청암동 토성은 대체로 반달 모양과 비슷한 ‘반월성’인데 둘레는 약 3천450미터이다. 아래 성벽의 제일 높은 곳은 약 2.5미터, 밑너비는 약 10미터 정도이며 성벽의 안쪽은 약 20도 정도의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다.


북한은 신석기인들이 성벽을 쌓았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현재 존재하는 성벽이야말로 단군조선 초기에 건설했다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추정은 두 성의 축조 방식이 막쌓기 방법으로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주변 유적은 신석기를 거쳐 청동기시대 문화가 매우 발전한 곳이다. 그러므로 북한측은 신석기시대부터 살아오던 주민들이 청동기시대에 하나의 큰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권력과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토성과 같은 방어시설까지 구축했다고 설명한다.


북한측이 단군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 국가가 세워졌다고 추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평양시 강동군 남강 로동자구에서 발견된 황대성(黃岱城) 위의 고인돌이다. 토성 위의 고인돌이 고대 국가 성립과 깊은 연계가 있다는 것은 토성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황대성은 해발 약 50미터의 산정에 위치한, 흙과 돌로 축성한 일종의 산성(山城)으로 약 3백 미터가 남아 있다. 성벽의 서남쪽 구간은 완전히 없어져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축조형식으로 보아 평면은 긴 타원형으로 추정된다. 이 성벽의 하부 폭은 10미터이고 상부 폭은 5미터이며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배수구도 발견됐다.


놀라운 것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평평하게 된 성벽 위에서 고인돌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석회암 판석으로 남북 길이 2.2미터, 동서 길이로 1.45미터, 높이 1.55미터의 무덤칸이 있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었다. 이 고인돌 무덤은 이른바 오덕형 고인돌 무덤류에 속한다.


이는 황대성이 폐성(廢城)이 된 다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축조된 무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 고인돌 무덤은 황대성의 중요성 때문에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유사 고인돌 무덤인 구빈리 고인돌 무덤의 절대 연도는 4990±444년 전이고, 룡곡리 4호는 4539±167년이다. 그러므로 북한 학자들은 고인돌 무덤의 축조 연대를 구빈리 고인돌 무덤의 절대 연대까지는 올려 볼 수 없으나 룡곡리 4호 고인돌 무덤의 절대 연대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좀 늦은 것으로 추정했다.


중요한 것은 폐성이 된 성벽의 연대 추정이었다. 고인돌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 밑에 있는 성벽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 즉 기원전 3천 년경에 축조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황대성의 축조 연대가 기원전 3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축조 연대가 기원전 3천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황대성이야말로 단군조선이 존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산성은 평지의 성이나 목책과는 다른 군사시설이다. 군사시설이란 고래로부터 통치자의 지휘처로 사용되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단군조선 시대와 유사한 시대에 축조된 산성의 존재는 곧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러한 요새들이 하나의 방어체계를 이루고 일정한 지역을 방어토록 했다는 것은 이들 지역에 상당한 부와 권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한쪽 경계선이 100리 이상 되는 넓은 구간에 방어시설을 구축해 놓은 것은 국가와 같은 강력한 권력체제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들 방어 시설물들을 구축하고, 방어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지휘관이 있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력구조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참고문헌


「대동강 류역 고대성곽의 성격」, 남일룡, 조선고고학학회, 1999년 1호


「청암동 토성에 대하여」, 남일룡 외, 조선고고학학회, 1998년 2호


「평양지방의 고대 토성」, 남일룡, 조선고고학학회, 1995년 2호


「평양 일대 고대 토성의 축조연대에 대하여」,남일룡, 조선고고학학회, 1996년 1호


국가 성립 요건의 다섯 가지 중에서 평양의 경우 넷째와 다섯째는 청동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고인돌이 1만4천여 기나 발견되며 부장품으로 많은 청동유물이 매장됐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두 번째로 제시되는 도시 유적의 경우 북한측은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평양시 삼석구역 표대유적, 남경유적,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유적, 복창군 대평리 유적,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 유적, 황주군 고연리 유적 등이다. 이들 유적에서 100~150여 호의 집터들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남경유적, 대평리 유적, 고연리 유적 등은 면적이 2만~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비교적 큰 부락터이며 표대 유적, 석탄리 유적, 남양 유적 등은 면적이 10만 제곱미터가 넘을 정도로 대규모의 유적을 갖고 있다. 표대 유적의 경우 확인된 집터만 200개 이상에 달하며 절대연대 측정법에 의할 경우 표대 유적의 8호 집터는 최고 528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의 경우 아직 단군 시대의 궁전 유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자인했다. 다만 북한측의 견해에 의하면 단군의 근거지를 평양으로 삼고 있는데 현 평양 지역은 고구려가 수도로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유물은 물론 궁전 터조차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고대 문명의 경우도 왕궁을 정확하게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앞에 설명한 5가지가 고대국가의 성립 요건으로 제시되지만 이들 모두 반드시 충족돼야 하는 것은 아니며 5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은 성벽이다. 성벽을 쌓았다는 자체가 정주 여건을 갖춘 것은 물론 외부와의 차별을 두는 내부 체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황대성보다 약간 시기는 늦지만 중국 홍산 지역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4000~3500년 전)에서 성벽은 물론 돌무덤, 제단 등이 발견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가점하층과 상층 문화가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하가점은 과거 하씨가 많이 산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적봉에서 오한기(敖漢旗)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산 정상이 평편해 고위평탄면으로 불리는 산등성을 끼고 감싸는 형태의 중앙분지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은 국가가 성립됐다는 실증적인 증거로 제시되는데 하가점하층 문화는 중화 5천년의 배경이 되는 홍산문화를 계승하는 문화로 인식하며 고조선과 연계돼 매우 중요시하게 생각한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제련된 청동 덩어리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900년쯤으로 측정돼 단군조선과 엇물려 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8년 동안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오한기 지역을 집중적으로 답사했다. 10여 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이들 중에 가장 중요한 해발 800미터에 있는 아(亞)자 형태의 성자산산성(城子城山城)은 1987년에 발견됐다.


답사단은 곧바로 사회과학원에 보고했고 2000년 유국상 박사 등 현지 실무단이 도착해 조사한 결과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성자산산성은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 합라구촌(哈拉溝村)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시야가 열려져 있어 초원(草原) 사막지대를 볼 수 있는 장관을 연출한다. 더욱이 성자산산성의 유지군(遺址群)은 6.6㎢나 되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성자산 주봉(主峰)의 정상부의 평면은 ‘아(亞)’자형으로 불규칙하지만 남북 440m, 동서 폭은 340m다. 총면적은 약 15만㎡나 되는데 주위에 계단식 성벽이 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 이중 성벽은 주로 맥반석으로 축조됐는데 기초 폭은 약 15m,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약 2m이며 외성과 내성 각각에 5개의 문이 설치됐다.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도 발견됐다.


놀라운 것은 외성에 반원형(半圓形)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치는 고구려 성벽의 고유물처럼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성벽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형태를 갖고 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하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을 말한다.


내성은 중심구(中心區)/동/서/남/북/동남 등 6구역으로 분할됐다. 구역과 구역 사이는 서로 돌담으로 격리했지만 돌문으로 연결된다. 중심 구역은 다른 구역보다 높은 지역에 있으며 ‘회(回)’자형의 오르내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돌담 변의 길이는 88~93m이고, 현재 약 1미터 높이의 담이 남아 있다. 내측 돌담의 변의 길이는 30m이며 돌담 내에서 10여 개의 건축지(建築址)가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최고위층들이 살았다고 추정한다.


중심구 외의 5구역 내에는 균등한 원형돌담이 몇 개 단위로 분포돼 있다. 각 구역 안에 건축지가 10여 개씩 발견되는데 그 중 동남 구역에서 발견되는 건축지는 73곳이나 되며 총 6구역의 건축지는 232곳이나 된다. 원형 건축지의 직경은 주로 5~6m이며 최장 13m에 달한다.


교미하고 있는 쌍돼지 대형 돌도 있는데 길이 9.3m, 주둥이의 폭은 2,1m이며 이마높이는 7.5m이다. 눈 부분은 거칠지만 모서리의 선이 분명할 정도로 인공적인 흔적이 있으며 등에는 대형 성혈이 발견됐다. 특히 동쪽 성벽 바깥에 대형 제단 3개가 있는데 이들 제단 위는 매끄럽게 연마돼 있고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도 있다. 중국 측은 성자산산성을 20세기 말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 중에 하나로 평가하며 성자산산성을 곧바로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했다.


아쉬운 것은 아직 이곳에서 유적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곳 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오한기박물관의 양택 연구원은 유적이 15만 제곱미터나 돼 아직 완전한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면 엄청난 유물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와 같은 건축유지는 성자산을 주변으로 약 10여 곳에서 발견된다. 성자산으로부터 약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5호 유적지에서도 계단이 있는 성벽이 발견됐는데 동북 주능석 끝부분에서 발견된 장방형 유적지의 면적은 약 2만㎡나 된다. 이곳에서 원형건축지가 10여 개소 발견됐는데 특히 북문에서 발견되는 거석들은 매끄럽게 연마해 제단의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발굴이 진행된 음하(陰河) 상류 삼좌점(三座店) 유적도 국가 성립의 개연성을 보여준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이곳은 2005년 음하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됐고, 2006년 말 발굴이 완료됐다. 역시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하는데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이며 건물지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됐으며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벽 중에서 내성 북쪽 성벽의 ‘치’는 5미터 간격으로 13개나 발견된다. 더욱이 곳곳에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석성이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으로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또한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는데 이들의 추정 연대는 무려 4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됐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이 치가 촘촘하게 배치될 정도로 견고한 석성을 쌓았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윤명철 교수는 추정했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이며 건물지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됐다.


곽대순 요령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삼좌점 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한기박물관의 도록에는 성자산산성의 유적이야말로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적었다. 이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성자산과 삼좌점 지역에 수천 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 등은 사실상 치밀한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특히 해발 800미터나 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중국은 내몽고 동부 구역(區域)에서 하가점하층문화와 유사한 산성이 계속 발견되며 오한기(敖漢旗)에만 천 여 곳에 이르는 등 밀집된 대소 원형 건축지가 발견되자 이 지역에서 국가가 성립됐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한다. 성자산산성 표지석에는 이곳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국가가 성립했음이 분명하다고 적혀 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기원전 1500~기원전 400년, 이형구 박사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함)로 이어진다. 하가점상층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 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배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청동기 문화야말로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7) 비파형동검을 포함해 이들 유물들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여하튼 하가점하층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오한기지역은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조보구문화(새, 돼지, 노루 등 토템 동물이 조각된 제단용 신기(神器)와 뼈로 만든 망치, 칼 등이 다량 발굴된 지역), 소하연 문화 등 초기 홍산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다. 특히 오한기 사가자진(四家子鎭)은 사방 10여 미터의 홍산문화 초기의 적석총 3기가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며 왕택 연구원은 이들이 동아몽골인이라고 설명했다. (계속)


참고문헌


김종혁, 「대동강류역일대의 고대부락터유적에 대하여」, 『조선고고학학회』, 1999년 1호


신형식, 이종호, 「‘중화5천년’, 홍산문명의 재조명」, 『백산학보』, 2007, 5~41쪽


이형구, 「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뉴스메이커』 745호, 2007.10.16


군국전, 『Aohan China』, 내몽고문화출판사, 2004, 35~37 쪽


이기환,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경향신문, 2006.10.13


근래 중국에서 놀라운 변화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중화 5천년’이라는 단어로 기존의 역사보다 1000~1500년 상향조정하고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삼황오제’가 역사적 인물임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알려진 세계 4대문명(이집트 나일강,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및 티그리스 강, 인도 인더스강, 중국의 황하 문명)보다 훨씬 빠른 ‘요하문명’이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역사가 된 중국의 신화>


그런데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을 일구었다는 요하문명은 그동안 부단히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주장되던 곳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단군조선보다도 빠른 기원전 3,000년에서 3,500년경에 이미 고대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국가를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그동안 황하유역에서 태어난 선진 문화가 각지로 전파됐다는 황하중심문화를 기본 정설로 견지해 왔다. 따라서 문명화된 세계로서의 중국의 이상형은 통일된 ‘하나의 천하대국’ 중국이다. 황하의 풍부한 물을 이용해 문명을 이룩해 가면서 점차 주변의 야만국들을 흡수했기 때문에 중원(中原)은 중국의 중심지라는 견해이다. 이는 중국 문명이 오늘날 산시성(山西省) 남부 및 허난성(河南省) 서부인 이른바 중원지역에서 발전했으며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으로도 설명된다.


이런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그들은 중국에서의 국가의 시작을 대체로 기원전 1500년에서 2000년으로 잡았다. 이것도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통해 하(夏)나라를 기원전 2070년~기원전 1600년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이관에 앞서 중국에서는 중국이 ‘만국의 중심, 또는 천하의 중심(萬國之中心, 天下之中心’)이라는 뜻으로 갑골문자(甲骨文字, 卜辭) 이후 ‘시경(詩經)'(대아편, 大雅)의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심으로써 사방 각국의 사람들을 안정시키셨다(惠此中國 以綏四方).’이라든가 ‘尙書’의 ‘구주·오복제(九州·五服制)’를 내세워 그들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경'(소아편, 小雅)의 ‘천하는 전부 중국의 땅이고 온 백성은 그들의 신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賓 莫非王臣)라고 자칭하는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공산국가이다. 따라서 유물사관으로 무장한 공산주의는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객관적이고 측정 가능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중국이 세계 4대문명 중에서 가장 낮은 연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 특히 오제시대를 역사시대로 인정하면서도 연대를 올리지 않은 것은 증거 위주의 역사관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갑자기 ‘중화 5천년’으로 역사를 올려 잡는 이유는 그동안 3600~4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하(夏) 이전에 등장하는 ‘삼황오제’가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홍산의 우하량유적(牛河梁遺蹟) 즉 요령지역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3000~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이들 유적을 근거로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라는 고대국가가 이 지역에 존재했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우하량 홍산지역 즉 요령지역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이 그동안 황제(黃帝)만을 중국인의 시조로 모시다가 1980년대부터는 염제(炎帝)를 포함해 염황(炎黃)이 중국인의 시조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현(?鹿縣)의 황제성과 황제천이 인접한 평원에 귀근원(歸根苑)과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건립하면서 황제·염제·치우제의 삼시조시대(三始祖時代)를 선언했다. 이것은 5천 년 전에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기원전 2700년경에 황제와 치우 간에 벌렸다는 탁록 전투를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치우천황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1), (2)」, 2006.6.26-7,3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우하량지역 즉 요령 지역은 그동안 빗살무늬토기, 돌무덤,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돼 동이족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곳이다. 간단하게 말해 이런 유물들이 나온 지역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거주했던 터전이며 특히 한국인의 첫 국가인 단군조선의 무대(아사달이라는 주장도 있음)로 알려진 곳이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이 실재했느냐 아니냐로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 측에서는 이들 지역에서 적어도 단군보다 1,000년 전에 이미 국가 즉 ‘신비의 국가’가 존재했다는 설명으로 중국 자신의 역사를 끌어올린 근거로 삼았다.


이 문제는 한국인에게 매우 놀라운 결론을 끌어내게 한다. 간단하게 말해 단군조선보다 1,000여 년 전에 과거부터 한국인의 고향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한국인의 선조가 세웠다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보다 1000여 년이나 후대로 추정되는 단군조선이 존재했느냐 아니냐에 대한 설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특히 이 문제는 중국측이 성자산산성의 표지석에조차 국가 성립이 완성됐다고 기록하는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와 연계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성을 부여받고 있다.


<중국역사를 끌어 올린 홍산문명(紅山文明)>


중국은 21세기 ‘대중화주의 건설’을 위해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유적 발굴과 연구를 추진했다. 이 결과 나온 것이 고대 왕조인 하(夏)·상(商)·주(周)의 존재 연대이다. 이들은 하나라의 연대를 기원전 2070년에서 기원전 1600년으로 확정짓고 商나라는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19대 盤庚王이 기원전 1300년 도읍을 殷으로 옮겼으므로 이후 殷이라고 함), 주(周)나라를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771년으로 다시 설정했다.


‘하상주단대공정’이 진행되는 동안 고대 유적지 17곳에 대한 새로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C14 연대측정이 새롭게 이루어졌다. 물론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해서 외국학자들 사이에서도 지나치게 의도적이고 그 의도에 반하는 결과들을 제외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어서 2000년부터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라는 새로운 역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은, (1)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 5제’의 시대까지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해 중국의 역사를 1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2) 이를 통해 중화 문명이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보다도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하(遼河) 일대를 기존의 세계 4대 문명보다 앞서는 1만년 역사의 새로운 문명권으로’으로 부각시키는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이다. 이것은 1980년대 이후 요하 일대에서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興隆?文化, 기원전 6200~기원전 5500) 등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 유적은 근래 상당히 많이 발견됐는데 현재까지 정리된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다.


①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


② 흥륭와문화(興隆?文化, 기원전 6200~5500년)


③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년 이후)


④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5000년)


⑤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4400년)


⑥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3000년)


⑦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기원전 3000~2000)


⑧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기원전 2200~1500년)


⑨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기원전 1500년 ~)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인근의 오한기(敖漢旗) 소하서촌(小河西村), 우고토향(牛古吐鄕), 천근영자촌(千斤營子村) 등 10여 곳에서 발견된 소하서문화는 동북아시아 최초의 신석기문화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반지하로 파내려간 반지혈(半地穴)식 주거지 3곳이 발굴됐는데 이곳에서 동북 지역에서 가장 이른 흙으로 만든 사람의 얼굴(陶塑人物像)이 발견됐다. 이 인면상은 손바닥보다 다소 크고 두께는 5센티미터 정도인데 고대인들의 제사나 종교적인 의례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적봉시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保國吐鄕) 인근의 흥륭와촌(興隆村)에서 발견된 흥륭와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으로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이다. 이곳에서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된 흥륭와만회취거촌락유지에서 세계 최초의 옥(玉) 귀걸이 등 100여 점의 옥기가 발견됐으며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이곳에 수많은 주거지가 밀집해 있는데 놀랍게도 주변을 파서 물길을 두르는 해자(垓字)도 발견된다. 해자는 일반적으로 적이나 위험한 동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놀라운 것은 이곳에서 수많은 옥이 발견되는데 이들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출토되는 ’수암옥‘이라는 사실이다(압록강 단동에서 1~2시간 거리). 수암옥의 경도는 5~7이며 유지(油脂) 광택을 띄며, 주로 황록색 혹은 옅은 황색으로 묵옥, 청옥, 옥수 마뇌와 매옥(媒玉) 등으로 구분된다.


내몽고 지역에서 발견된 옥이 요동 지방의 수암옥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의 각 신석기 문화는 상호 교류가 없이 고립적이었는데 기원전 4000~3000년경에 비로소 홍산문화 지역과 앙소문화 지역이 서로 교류하기 시작했다고 설명됐다. 그런데 기원전 6000년경의 흥륭와문화의 요하 일대 신석기를 주도한 세력이 만주 벌판 요동 지역 신석기인들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는 요령성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 사해유적에서 발견됐는데 이곳에서 흥륭와문화의 ‘세계최고옥’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옥으로 발견될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기할 것은 이곳에서 돌로 쌓아 만든 석소룡(石塑龍)과 2점의 용문도편(龍紋陶片)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석소룡은 현재까지 발견된 용 형상물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면서도 규모가 큰데 길이 19.7미터, 폭 1~2미터이다. 석소룡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도 중국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적이다. 이곳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복골(卜骨)이 발견됐는데 이것이 후대에 상(商)대의 갑골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의 신석기문화를 거쳐 이미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판단하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광의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순동을 주조한 흔적도 발견돼 홍산문화를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동석병용시대(銅石竝用時代)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후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기원전 3000~2000)를 거쳐 앞에서 설명한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와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가 탄생한다.


이 시기에 중원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고구려 특유의 것으로 인정되는 ‘치를 가진 석성’,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되며 이들 문화의 주인공들이 후에 한민족의 선조로 간주하는 예맥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성을 부여받는다. 특히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은 적봉, 조양 등을 중심지로 수천여 곳이 발견돼 당대의 세력권이 미친 지역이 매우 광대했음을 알려준다. (계속)


참고문헌


『제2회동북아평화 정착을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 국학학술원, 2007.8월


『中國考古謎案』, 耿建軍, 山東畵報出版社, 2006년


중국이 자랑해온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주장하면 그동안 중국인이 아니라고 강조하던 동이를 인정해야 하는 모순점이 생긴다. 즉 그동안 중국의 화하족에게 뒤떨어지는 야만족이라고 비하하던 동이가 전통적인 중화민족보다 앞선 문명을 지닌 집단이 되는 것이다. 즉 황하문명이 요하문명의 지류나 방계 문명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현 중국 땅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이다>


이러한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은 과거의 역사관을 포기하고 다민족 역사관을 내세웠다. 이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서 유래한 이적 중국 문명의 이미지에 변화를 갖고 왔다는 것을 뜻한다. 이 변화야말로 현재 한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은 물론 ‘서북·서남공정’의 실체로 간단하게 말해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그동안 중국인이 아니라고 강조하던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 모두를 중화민족에 넣을 수 있는 예상치 못하던 논리를 개발했다. 즉 5제 시대의 3대 집단을 앙소(仰韶)문화를 바탕으로 조(粟) 농사가 중심인 중원의 염제 신농씨 화(華)족 집단, 벼농사를 주로 하는 동남 연해안 이(夷 또는 虞) 등 하(夏)족 집단, 그리고 동북 연산 남북의 홍산문화(수렵, 어로 생활)로 대표되는 황제족(黃帝族) 집단으로 설정한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화이관은 (1) 중원을 중심으로 한 화하족, (2) 산동반도와 발해만 그리고 장강 하류에 이르는 동이족, (3) 장강(양자강) 유역의 묘(苗)·만(灣)족과 (4) 서쪽의 서융(西戎), (5) 북쪽의 북적(北狄)으로 나누었다. 황제는 북경 부근, 고양씨 전욱은 황하 중류의 위쪽, 고신씨 제곡은 황하 중류의 아래쪽이 세력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근래 중국이 개발한 논리에 의하면 신화시대부터 황제족이 요하일대를 지배했는데 그 손자인 고양씨 전욱과 고신씨 제곡 두 씨족 부락이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이 교차하는 유연(幽燕) 지역에 살면서 모든 북방민족들의 씨족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하문명의 핵심인 홍산 문화가 고양씨 전욱 계통의 문명이며 만주 일대도 황제족의 영역이라는 설명과 다름 아니다. 한 마디로 그동안 중국인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동이족의 근거지가 모두 중화민족의 근거지라는 뜻으로 화하(華夏)에 동이족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만주지역 ‘요하문명권’의 핵심인 홍산문화는 고양씨 전욱 계통의 문명이며 고주몽의 ‘고’씨 성도 고양씨의 후예이기 때문에 붙었다는 설명도 있다. 이것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황제족의 후예들인 예맥족들이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세웠다는 논리로도 이용된다.


과거에 중국은 적어도 북방민족들은 중국인이 아니라면서 이들을 중국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고 따라서 이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삼국지'(권47 吳主傳2)에 오(吳, 손권)는 동천왕(東川王)을 흉노의 왕인 선우(單于)로 책봉했으며, ‘신당서'(권200 동이전<고려>)에 당태종은 ‘천하가 정복됐으나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요동(遼東)만 정복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 정벌을 꾀했다고 했고 당고조가 662년(영류왕5)에 고구려에 보낸 조서에서 ‘이제 두 나라가 서로 화평을 통하게 됐으니(今二國通和)’라고 해 고구려를 당과 대등한 나라로 지칭했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선우란 ‘탱리고도선우(撑?孤塗單于)’의 약어로 ‘탱리’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으로 선우는 중국의 천자와 같은 격이다. 이 부분은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3)」, <고구려는 흉노의 수장>, 2007.6.20)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에 따라 중국의 진시황제는 흉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 남부 양관과 옥문관으로부터 북으로, 황하(黃河)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발해만의 산해관까지 장성을 쌓았다. 그러므로 중국인 스스로 장성의 이남만 중국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 북방기마민족들이 주로 할거했던 내몽고 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포함되자 자동적으로 중국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의 역사도 자기들 역사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흉노란 중국 북방에서 처음 유목민 국가를 건설한 제국(전성기에는 중국의 3배나 되는 영토를 확보)의 명칭이지,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 흉노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주로 ‘동이(동호)’가 살던 곳으로 과거부터 한민족(韓民族)의 원류가 정착한 지역으로 소개됐던 곳이다. 이러한 홍산문화와 동이(東夷)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제시됐으며, 동이(동호)가 근거했던 홍산문화권은 15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인(객좌현 수천향 대능하 구좌동)이 발견됐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던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내몽골의 적봉시, 동쪽으로는 요령성의 요하, 남쪽으로는 발해만에 이르는 비옥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22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며 핵심지역도 12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홍산문화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조양(朝陽 : 옛 이름은 營州)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북, 몽골, 요령성이 만나는 지점으로 총 2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갖고 있다. 총인구는 2005년을 기준 334만 명이고 한족, 몽골족, 회족, 만족, 조선족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의 광물 자원은 중국에서도 단연 최고로 금생산량은 전 중국 1위이며 망간은 동북지역 1위. 규석, 석회석. 고령토 등의 질이 좋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양은 특히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장모공룡중화용조(長毛恐龍中華龍鳥)’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始祖鳥)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해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돼 ‘세계고생물화석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여하튼 동이(동호)가 거주하던 우하량홍산문명 때문에 중국이 중화민족의 문명사를 1000~1500여 년 앞당긴 것이다. 중국은 오늘날 이들 지역에 중화문명의 ‘사전성지(史前聖地)’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있다.


<우하량 홍산 유적>


우하량 홍산유적은 원래 1935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된 유적지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학자들은 이 유적지의 중요성을 그리 깊이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1981년부터 시작해 1983~1985년에 주요 발굴이 진행되면서 중국을 놀라게 하는 발굴이 연이어졌다.


이들 유적은 중국 최초의 원시 종교 유적이 발견된 동산취(東山嘴)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건평(建平)과 릉원(凌源) 중간에 있다. 인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제단, 여신묘(사당), 적석총과 이집트와 유사한 피라미드 그리고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 형태와 돌로 쌓은 방형(方形, 사각형) 모양의 광장이 발견됐다.


이들 유물들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기원전 4000년 전에서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어서 북방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가 기원전 2200년 전부터 발달했고 기원전 1500년경부터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기원전 14세기부터 조양시의 위영자문화(魏營子文化)가 등장했다는 설명이다. 한편 바른스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을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하층문화를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적었다.


그는 하가점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린 동제품이(공식적으로 기마전투가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 동아시아에서의 기마풍습의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적었다. 또한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문양의 청동제품들이 발굴되는 것을 감안할 때 하가점상층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의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한국 학자들이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를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홍산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후속문화로 이 지역에서 발원했다고 추정하는 단군조선과 밀접하게 연결됐다고 비정하던 곳으로 이 부분은 앞에서 설명했다.


한편 중국인들은 근래 북방 초기 청동기시대를 ‘초원청동기시대’라고 부르며 유목민족이 근거했던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전의 하가점상층문화를 동호(東胡) 지역의 문화라고 부른다.


중국학자들은 이들 유적을 근거로 고대국가가 이 지역에 존재했음을 인정하며(중국 측은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라고 부름) 그 연대를 무려 5천5백여 년 전으로 산정했다. 한마디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우하량 홍산지역에 국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계속)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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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백산학보’, 제67호.


정수일, 2001, ‘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258~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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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출발을 기원전 2,333년으로 간주하는 것도 문제점이 있다고 하는 판에 그동안 부단히 단군조선의 근거지로 비정되던 지역에서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 즉 단군조선보다 1000년 정도 앞선 우하량 홍산 유적이 단군조선과 연계된다는 설명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우하량 홍산 유적>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우하량 홍산 지역에서 발달했던 문화를 어떤 연유로 국가의 존재 즉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고 인식하는지를 설명한다. 이의 근거가 되는 우하량 홍산 유적지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은 다음과 같다.


① 제단(祭壇)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은 원형과 방형 형태를 갖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정연한 배치로 남북 축을 갖는 대칭성을 보인다. 이 중 중심에 있는 제단은 넓은 대지에 돌로 울타리를 쌓았고 울타리는 3중 원형 형태이다. 원형의 직경은 각각 22미터, 15.6미터, 11미터이며 매층에 기초가 있는데 높이는 0.3~0.5미터이다. 이곳에서 채색 토기들도 발견됐다.


중국학자들은 우하량에서 발견된 이들 제단 유적을 ‘천원지방(天元地方)’ 사상의 원형이자 북경 천단 구조의 원형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중국은 제단 유적지의 안내판에 ‘약 5500년 전에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들(all conditions to be a state)을 갖추고 있는 우하량 홍산 문화 유적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② 여신묘(女神廟, 사당)


우하량 북쪽 구릉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여신묘(사당)는 대지가 175미터×159미터나 될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 사당의 터는 남북으로 제일 긴 거리가 22미터, 동서로 좁은 면은 2미터이지만 넓은 면은 9미터나 되며 평면으로 볼 때 아(亞된)자형을 취하고 있다. 사당은 본체와 부속 건물로 나뉘는데 본체는 여신묘를 포함한 여러 개의 사당 용도의 건물로 구성돼 있고 길이는 18.4미터나 된다. 부속 건물에는 지하 공간이 있으며 탄소연대측정에 의하면 여신묘의 조성 연대는 5575±80년이다.


여신사당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데 반지혈식으로 지하 부분의 깊이는 0.8~1미터이며 주실 부분에는 7칸의 방이 서로 연결된 구조로 좌우대칭성을 보이는데 테라코타의 원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건물로 추정한다. 담장의 건축 재료는 나무와 흙에 풀을 섞었는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주홍색과 흰색으로 채색된 삼각형의 기하 문양의 벽화도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 당시 즉 역사 이전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이 선조를 숭배하는 종교의식이 벌어졌던 종묘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지혈식 부분에 쌓인 유물 중에서 인물 조각상, 동물 조각상, 도기가 있다. 진흙으로 빚은 동물은 용(2점)과 새(1점)이다. 용의 조각 중 하나는 머리와 앞으로 뻗친 손톱이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채색 조각으로 아래턱 부분만 남아 있다. 새 모양 조각은 한 쌍의 발만 남아 있는데 길이가 약 15센티미터로 맹금류를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두 개의 용 형상으로 곽대순은 이들 용이 돼지 형상의 저룡(猪龍)이 아니라 곰 형상의 웅룡(雄龍)으로 추정한다.


‘우하량 여신묘에서 흙으로 만든 용 두 마리가 출토됐다. 그 중 하나는 여신묘 남쪽의 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채색된 동물의 아래턱 부분이다. 아래턱의 전반부가 길고 뾰족하게 생겼는데 송곳니는 폭이 넓고 위쪽이 구부러진 것으로 보아 돼지라기보다는 곰의 형태를 닮았다. 다른 하나는 주실(主室)에서 발견됐는데, 앞 입술의 끝부분이 위로 말렸고 두 발 모두 발톱이 네 개인 것으로 보아 돼지보다는 곰을 닮은 웅룡으로 추정된다.’


홍산문화의 곰 습속은 한민족과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홍산문화 지역은 한민족의 터전으로 과거부터 알려졌고 또한 단군신화의 무대가 되기 때문으로 우하량 여신묘에 모셔진 여신은 단군을 낳은 웅녀의 조상일지 모른다고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③ 소조등신여신상(塑造等身女神像)


여신사당 안에서 인물을 묘사한 소상이 여러 개 발견됐다. 주실에서 실물대의 인물상이 오른쪽 어깨와 팔, 가슴, 왼쪽 손이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됐으며 서쪽 측실에서 사람 2배 크기의 팔과 다리 부위가 발견됐다. 또한 주실의 중앙에서 코의 일부분과 큰 귀가 발견됐는데 인물상 크기는 사람의 3배 정도로 지위가 가장 높은 신으로 추정한다.


여신상은 여신묘에서만 발견된 것은 아니다. 대형상은 여신묘에서 발견됐지만 소형상은 동산취 서수천(西水泉)과 우하량 등 유적지에 나타나며, 중형상은 도산취 유역에 출토됐다.


학자들은 고대사회에서 여신은 생육(生育)을 의미해 다산과 수확을 상징하므로 여신 숭배 사상은 상당히 성숙된 선조에 대한 숭배 의식이 있을 때에 비로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도 다른 고대문명처럼 여신 숭배사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를 증명해줄 유물이 나타나지 않아 그동안 학자들을 괴롭혀 왔다. 바로 이 의문점을 풀어준 것이 소조등신여신상으로 모계사회의 모권제도와 관련이 있다고 간주한다.


특히 소조상은 당대에 살던 사람의 얼굴을 기초로 하면서도 약간 과장한 면도 보인다. 학자들은 이는 인간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신을 형상화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즉 인간들의 내재된 감정을 표현하는 신화적인 여신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적어도 그녀가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여신묘에서 일상 생활 용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인물소조상만 발견된 것은 여신묘가 일반의 거주지가 아니라 특수한 용도를 지닌 건축물임을 알려준다. 더구나 여신사당에서 발견된 7개의 인물상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학자들은 홍산문화인들이 다신(多神)을 숭배한 증거로 생각한다. 당시의 사회가 여성 주도의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을 뜻하며 당시 ‘여왕국’이 존재했다고 추정하는 이유이다.


여신묘에서 발견된 조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세계를 놀라게 한 흙을 빚어서 사람 크기로 만들어 구운 소조등신여신상(塑造等身女神像)이다. 두상의 높이는 22.5센티미터이며 귀를 포함해 넓이는 23.5센티미터로 실제 사람의 크기이다. 이 소조상은 그야말로 우연하게 발견됐다.


1983년 고고학자들은 우하량에서 발견된 적석총을 발굴하고 있었는데 한 연구원이 개울가에서 소변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소변을 보면서 발 옆에 있는 조그마한 돌을 발견했는데 자연석이라기보다는 도기 같아 주웠다. 그러나 그가 당초 생각한 도기는 아니었고 인형조각의 코와 같았다.


기원전 3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소조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발굴팀들은 곧바로 대대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1984년 10월. 여성 두상이 발견됐는데 코가 떨어져 있었다. 전에 발견한 코를 그 위에 맞춰보자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세계를 놀라게 한 소조등신여신상이 자신의 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동방의 비너스’로 알려진 두상의 얼굴은 선홍색을 띠고 입술은 붉게 채색돼 있으며 머리 뒤쪽 부분은 평평해 벽에 걸어 놓기에 좋은 형태이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으며 눈썹은 선명하지 않고 콧대는 낮고 짧으며, 코끝과 콧방울은 둥그스름하다. 입술은 비교적 큰 편이고 윗입술은 얇으며 입가는 둥글고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아래턱은 둥글면서 뾰족한데 전체적으로 둥그런 여성상이다. 눈은 제법 크게 만들었고 맑고 푸른 옥구슬을 눈동자로 박았다. 특히 큰 얼굴에 눈동자를 따로 만들어 넣는 기법은 이제까지 보고된 적이 없는 기술이다.


중국의 왕웨이(王巍)는 여신상의 얼굴 생김새는 뚜렷하게 몽골 인종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황규호(黃圭鎬)는 빈약한 코허리를 빼면 우리들과 비슷한 얼굴임을 곧바로 알 수 있다고 적었고 경건군도 두상은 몽골리안 인종의 특징을 띠고 있고, 지금의 화북지방 사람의 얼굴형과 비슷하다고 적었다.


한편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몽골인의 얼굴을 갖고 있는 여신상을 홍산인의 여자 조상(祖上) 즉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하며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여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설명하는 우하량 홍산 유적에서 발견된 소조등신여신상에 대해 한민족의 조상임이 분명하므로 역사가 임창숙은 ‘부도지’에 기록돼 있는 ‘마고(麻姑)할머니’로 명명하자고 제안했다. (계속)


참고문헌


段軍龍,’中華5000年軍事故事’, 광명일보출판사, 2005, 10~12쪽.


陳逸民, ‘紅山玉器’, 상해대학출판사, 2004,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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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土波 외, ‘中華5000年科學故事’, 광명일보출판사, 2005, 1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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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守道, 郭大順 ‘牛河梁紅山文化女神頭像的發現與硏究’ ‘文物’ 1986-8.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牛河梁紅山文化女神廟積石塚發掘簡報’ ‘文物’ 1986-8.


郭大順, ‘龍出遼河源’, 백화문예출판사, 2001, 60쪽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07, 136~138쪽.


(지난 회에 이어 계속)


④ 돌무덤


돌을 쌓아 만든 돌무덤은 우하량에서 발견된 무덤의 특징이다. 돌무덤을 만든 돌은 모두 석회암과 화강암이다. 놀라운 것은 시대가 오래될수록 규모가 더 크며 묘도 복잡한 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정한 규칙에 의해 건설됐다는 점이다.


6개 지점에서 돌무지무덤떼가 발견됐는데 그 중 한 지점에서 15기의 돌널무덤(석관묘)도 발견됐다. 이들 돌널무덤은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짠 상자 모양의 돌널과 깬 돌을 쌓아 올린 돌널이 함께 배치됐다. 돌널무덤은 땅 속에 널찍한 돌로 상자 모양의 널(관)을 만들었는데 돌널무덤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곳은 고대에 일정한 정치집단이 있었던 곳으로 인정한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외형은 원형과 장방형 두 종류가 있는데 직경 또는 한쪽면의 길이가 20여 미터나 된다. 이들 무덤은 독립 또는 군을 이루어 대부분 산꼭대기에 위치하는데 무리를 이루는 경우 중앙에 대형 묘가 하나씩 있고 주위로 작은 묘들이 둘러싸여 있다. 신분에 따라 석관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며 대형 묘 주인은 동시대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높다.


큰 틀에서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무덤의 형태는 동일하지 않은데 이것은 무덤들이 만들어진 연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형 무덤과 작은 무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부장품이 현저하게 차이난다는 점이다. 어떤 무덤은 부장품이 전혀 없거나 소량이 발견되는데 어떤 무덤은 호화로운 말발굽 모양의 머리꾸미개, 구운형옥패, 옥저저령, 옥조효조(玉雕?鳥) 등이 발견된다. 부장품으로는 모두 옥기뿐으로 이것도 우하량 유적의 특징 중에 하나이다.


더욱이 우하량에서 수십 평방킬로미터의 범위에 13개의 대규모 묘소를 중심으로 하는 대형 돌무덤 또는 돌무덤군이 집중돼 있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취락유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이들 대형 돌무덤이 당대의 제왕묘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고 곽대순은 적었다.


우하량 돌무덤 유적이 세계 고고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집트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피라미드도 발견됐다는 점이다. 피라미드 유적은 우하량 남쪽인 해발 564.8미터의 전산자성(轉山子山) 정상에 있으며 남향으로 하천과 광활한 평지가 보이며 북쪽으로 멀리 여신사당이 보인다. 피라미드는 내부는 흙으로 단단히 다지고 원형으로 돌을 쌓았는데 직경이 좌우 140미터나 되고 총면적이 1만 평방미터나 되며 언덕과 일체로 돼 있다. 정상 부분에서 구리를 제련하는 도가니등 유물이 발견돼, 그 문화의 복잡성을 말해주지만 아직 내부를 발굴하지 않은 상태로 이의 내부가 공개될 경우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피라미드의 원형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 형태인 마스타바(mastaba)이며 이것이 계단식으로 변형되는데 대체로 마스타바는 6천 년 전, 계단식은 5천 년 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우하량의 피라미드는 가장자리에 계단을 올리고 중심 부위는 비교적 평평한데 이를 마스타바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변화되는 중간형의 형태로 간주하기도 하며 연대는 기자의 피라미드(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프 파라오의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600년경에 건설됐음)보다 거의 1천 년이나 앞서는 5500년 전쯤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이 피라미드는 동시대 것들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하며 중국에서는 이를 ‘홍산문화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돌무덤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⑤ 옥기


홍산문화의 무덤 중에서 독특한 점은 부장품으로 옥기만 발견된다는 점이다. 옥기가 발견되지 않고 도기만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등급이 낮은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옥기는 용((玉龍. 돼지나 곰),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옥룡(玉龍)과 결상이식(옥귀거리)이다. 옥룡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1) 옥룡


1971년 8월, 내몽고자치구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농민 장봉상(張鳳祥)은 마을 뒤의 과수원에서 인공으로 한 개의 갈고리 모양의 물건을 발견했다. 이는 매우 딱딱하고 묵직해, 장봉상은 이를 폐철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가져갔다. 그의 동생 장봉량(張鳳良)은 당시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인데 형이 갖고 온 ‘철 갈고리’와 같은 물건에 줄을 묶어 끌고 다니며 또래 친구들과 마을에서 놀았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철 갈고리에 광택이 나타나 그제서야 장봉상은 커다란 옥기임을 알고 ‘옹우특기문화관’으로 찾아가 신고했다. 문화관의 직원 왕지부(王志富)는 이 물건을 받고 단돈 30원을 신고 규정에 따라 지불했으나 별다른 생각 없이 창고에 방치했다.


1984년 옹우특기문화관 책임자 가홍은(??恩)은 우하량 지역에서 5000년을 상회하는 옥기가 계속 발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1971년 접수된 옥기를 떠올렸다. 그는 창고에 방치된 옥기가 매우 진귀한 문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곧바로 북경의 유명한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이것이 중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용의 시원으로 연대는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곧바로 ‘중화제일옥조룡(中華第一玉雕龍)’으로 명명됐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등 많은 동물을 거론한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특히 『예기』에는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는 돼지의 목덜미 털로 한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돼지를 중국인들이 중요시하는 용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서수파에서 용형상물이 발견됐다는 것은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용이 중국이 자랑하는 용의 시원이라고 주장하는 데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용의 시원을 북방지역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남성 등 중남부지역에서 찾자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참고문헌


‘牛河梁女神廟與積石塚的發掘’, 赤峰市紅山區文化局(편), ‘紅山文化’, 124~139쪽.


「홍산문화의 제단과 중국고대의 교사지예의 기원에 대한 연구」, 전광림, 2회동북아평화정착을 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 국학학술원, 2007


「時論 홍산문화 원시룡에 대한 재검토」, 복기대, 백산학회 77호, 2007. (계속)


(지난 회에 이어 계속)


2) 다양한 옥룡


홍산지역에서 발견되는 옥룡은 옥저룡 대흑룡 대청룡 옥조룡 대홍룡 소청룡 황색포장룡(黃色包漿龍)과 변색룡 등 이십여 종으로 구분된다. 다양한 형상의 ‘패옥형 옥룡’들도 발견되는데 이는 돼지가 아니라 곰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동그랗게 말린 몸체와 뭉툭한 주둥이를 갖고 있으며 갈기가 없고 아래위로 교차된 송곳니를 표현하고 있다. 커다란 눈과 가운데 뚫린 구멍이 인상적인 이 작은 옥은 일반적으로 시신의 가슴에 놓여 있다.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기 가운데 동물의 머리를 양쪽 끝에 조각한 쌍수수삼공기(雙獸首三孔器)가 있는데 여기에 조각된 동물 머리도 곰으로 추정한다. 이들 다양한 옥들은 홍산문화의 특징으로 장식 또는 상징적이거나 제례적인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한다.


조형이 간단하고 질박하며 옥을 갈아서 홈을 만들기도 했고 옥지가 숨겨지는 양문과 사면능선은 만지면 느껴지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쌍안천동단면성공법(雙眼穿洞單面成孔法)은 그 공예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들은 대부분 돌무덤의 중앙에 있는 돌널무덤에서 출토된다. 시신의 각 부위에는 많은 옥기들이 발굴되는데 지배자의 돌널무덤에서는 옥기가 많이 발견된다. 우하량 제2지점 1호 돌무덤에서는 20점의 옥기가 발견됐다. 이것은 홍산문화 무덤 한 곳에서 나온 옥기 숫자 중에서 최다이다. 그는 짐승 얼굴 모양의 옥패(玉牌), 옥거북이, 옥베개 등으로 치장했다. 이는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부장품에 차별이 있다는 것으로 당시에 이미 신분이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옥기의 정확한 기능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의 옥의 중요성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옥은 단순한 장식품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우하량 제5지점 중심대묘에서 남성 1구의 인골과 7점의 옥기가 출토됐는데 양 귀에 옥벽(玉璧), 즉 둥근 옥이 양 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가슴팍엔 구름형 옥장식이 놓여 있다. 또한 그 아래 말발굽형 옥기가 있으며, 오른팔엔 옥팔찌가 놓여 있다. 학자들은 양손에 옥거북이가 쥐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을 ‘무인(巫人)’이라고 추정한다. 여기에서의 무인은 현대 개념의 무당이 아니라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도 왕과 같은 신분을 뜻한다.


뉴허량 유적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제16지점의 중심대묘에도 성인 남성이 묻혀 있는데 이 묘의 주인공도 5지점 중심대묘와 마찬가지로 신(神)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으로 추정한다. 특히 이곳에서는 옥으로 만든 무인인형과 봉황이 특징적이다.


놀라운 것은 옥으로 만든 비파형검도 발견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학자들은 중국의 청동검과는 전혀 다른 비파형 동검의 비파 형태가 어떤 연유로 동이의 동검에 나타나는가를 의아해했는데 홍산문화의 옥기에서 비파형태가 발견됨으로써 비파형태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홍산문화 시기에도 홍산인들에게 상당히 각인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속제 공구가 전혀 없었던 신석기 시대에 옥을 뚫는다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대만의 장경국은 홍산 옥기의 주요 모티브의 하나인 옥룡의 경우 구멍을 뚫는 작업을 고대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실로 재현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1.7센티미터 두께의 옥에 모래를 뿌려가면서 대나무(외경 9.6mm, 내경 5.4mm)를 돌려서 구멍을 뚫는데 작업시간만 31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홍산문화 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옥기가 발견된 것은 직업의 분화와 전문 장인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3) 한반도와 연계되는 옥귀걸이


앞의 홍산문화지역에서 발견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출토되는 ’수암옥‘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결상이식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사적 426호)에서 ‘국내 최초의 신석기시대 옥 귀고리’가 발견돼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문암리 유적은 그동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유적으로 알려진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유적(기원전 6000~기원전 3000년)과 비슷하거나 보다 오래된 것으로 홍산문화와 시기가 엇물린다.


특히 이들 유적지에서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로 인식하는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출토됐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사해와 흥륭와에서 발견된 토기와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들 지역과의 연계가 더욱 확연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007년 한국에서 보다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추진하는 금오도에서 안도 간 연도교 가설공사를 추진하던 중 안도패총이 발견돼 2천950제곱미터에 대한 긴급구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안도패총은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실시한 남해도서 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당시 조사에서 남해안 신석기문화의 특징인 두립문토기, 압날문토기, 압인문토기, 융기문토기, 지두문토기, 주칠토기, 무문양토기 등과 원거리 교역을 보여주는 흑요석 등 특징적인 유물들이 채집돼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당시 밭으로 개간돼 경작이 이루어지면서 패각층의 상당 부분이 훼손돼 다량의 유물들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금오도와 안도를 연결하는 연도가설공사가 추진되면서 이 공사 구간 내의 패총에 대해 국립광주박물관이 긴급구제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안도는 여수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동경 127도, 북위 34도에 위치하며 동도와 서도의 작은 섬으로 연결돼 있다. 안도패총(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1313번지)은 안도리 마을의 서쪽에 해당하는 서도에 있으며 ‘섬의 형태가 기러기 모양 같다’ 해서 기러기 안(雁) 자를 써 안호(雁號)라고 부르다가 ‘살기에 편안한 섬’, ‘태풍 시 선박이 안전하게 피항할 수 있는 섬’이란 뜻으로 안도(安島)라 변경했다.


3개월에 걸친 긴급구제발굴조사를 통해 패각층 내부와 기원전 4천년경으로 올라가는 신석기시대 구지표면 상층에서 토기류, 석기류, 골각기류 등 약 5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불 땐 자리 등이 출토됐다. 이 중에서 주목 받은 것은 몸체 정면을 하늘을 향해 나란히 눕힌 동시대 사람뼈(인골) 2구, 인골의 손에 찬 조개팔찌 5개, 목걸이 2점, 둥근고리(環形), 한쪽을 뚫은 결상이식이라는 옥귀고리이다.


대퇴부를 기준으로 추정하는 신장은 남자일 경우 165㎝, 여자일 경우에는 159㎝ 가량으로 비정됐다. 여성으로 보이는 인골의 오른쪽 팔에는 조가비를 톱니바퀴 모양으로 잘 다듬은 팔찌 5개가 끼워져 있었다. 또 왼쪽 사람의 오른팔이 오른쪽 사람의 왼쪽 팔 위에 놓여 있었다.


조가비 팔찌를 착용한 신석기시대 인골은 경남 통영 상노대도 산등(山登)패총에서 팔찌 3개를 찬 예가 보고됐으나 인골 팔목에서 조가비 팔찌 5개를 착용한 경우는 최초이며 인골의 연대도 1000~2000년 정도 앞선다.


팔찌는 한반도와 일본을 연계하는 중요한 유물로 인식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석기시대 팔찌 착용은 일본 학계에서는 성인식 문화와 연결 짓는데 일본열도 중 규슈지역에서는 10개 이상 되는 팔찌를 패용한 인골이 합장된 예가 다수 보고됐다. 특히 후쿠오카현 야마카(山鹿) 패총에서는 10~20개나 되는 팔찌를 착용한 합장 인골 3구가 보고되기도 했다. 이들 일본 열도 신석기시대 팔찌는 대부분 투박조개를 갈아 만들었는데 안도패총 인골이 착용한 팔찌 또한 투박조개로 한반도와 일본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증거품으로도 이해된다.


안도패총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둥근고리(環形)에 한쪽을 뚫은 결상이식이라는 옥귀고리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간주한다. 그런데 안도에서 외폭 기준 지름 3㎝이며 가운데 뚫린 구멍 지름 1.4㎝의 결상이식이 발견됐는데 이는 중부 이남지역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결상이식이다. 물론 안도패총에서 발견된 결상이식 1점의 재료는 도석제로 산지는 대체로 해남 옥매산, 성산 광산, 완도 노화도 등지로 추정하므로 앞에서 설명한 수암옥은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


우하량 지역에서 꽃피우고 있던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을 대표하는 결상이식과 같은 형태의 결상이식이 한반도 중부인 강원도를 비롯해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대의 홍산문화가 한반도 전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참고문헌>


우실하, ‘홍산문화와 고조선문화의 연계성’, 고조선-홍산문화답사 보고 및 학술발표회, 고인돌사랑회, 2006.11.3.


張敬國 외, 「管形工具鎖孔 之初步實驗 : 玉器雕琢工藝顯鏡探索之二」. 『玉文化論叢』, 문물출판사, 2006


「금오도-안도간 연도교 가설구간내 안도패총 발굴조사」, 국립광주박물관 현장설명회자료, 2007.3.27


翁牛特旗文化館, ‘內蒙古翁牛特旗三星他拉村發現玉龍’, ‘文物’ 1984-6.


孫守道, ‘三星他拉紅山文化玉龍考’, ‘文物’ 1984-6.


劉志雄, 楊靜榮, ‘龍與中國文化’, 인민출판사, 1992.


복기대, 紅山文化와 原始龍에 대한 재검토 ‘백산학보’ 77, 2007.


이형석 외, ‘첫조선(고조선)관련 땅이름과 홍산문화 고찰’, 땅이름 제31호, 땅이름학회, 2006.


‘코리안루트를 찾아서](7) 빗살무늬 토기문화’, 이기환, 경향신문, 2007.11.16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1) 뉴허량의 옥기묘’, 이기환, 경향신문, 2007.12.15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에 버금가는 유적은 중국 최초의 원시 종교 유적으로 간주하는 동산취(東山嘴)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79년에 발견됐는데 약 5500년 전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동산취는 우하량 유적지에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객좌현 동산취촌(객나심좌익몽고족자치현, 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에 있다.


<중국 제단 기원 동산취(東山嘴) 유적>


이곳은 남쪽으로 대릉하와 인접해 있고 동,서,북쪽으로는 황토로 된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길이 60미터, 폭 40미터의 총 면적은 2천400제곱미터이다. 돌로 쌓은 유적은 돌의 가공기술과 축조기술이 상당히 발달된 수준으로 큰 돌을 쌓아 올린 건축유적으로, 남쪽은 둥글고 북측은 네모나며, 중심양측 대칭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바깥쪽에는 돌을 하나하나 교착시켜 쌓았다. 또한 기다란 기단석은 돌을 떼어 내어 각 모서리가 돌출돼 있고 표면은 넓다.


동산취 유적에는 장방형 대지에 직경 2.5미터의 원형 제단이 있으며 모두 가공한 돌(아란석, 鵝卵石)을 사용했다. 제단 부근에서 시체를 묻은 묘장(墓葬)이 발견됐고 이곳에서 대량의 도기, 석기, 골기, 옥기, 석제 장신구, 도인상 등이 출토됐다. 도기는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것으로 제기의 일종인 그릇, 항아리, 잔, 병, 접시 등이 포함돼 있는데 두께 1.3센티미터의 “채도왕(彩陶王)”이라 불리는 채도도 있다. 도안이 간결하며 모두 삼각형 문양이나 평행선 등 기하학적인 문양이다. 또한 다량의 돼지 뼈와 사슴 뼈가 발견됐다.


이 유적이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은 특정 정교예의(政敎禮儀)가 이곳에서 시행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병기는 유적지의 위치 및 출토된 여신상과 방형, 원형제단 등을 근거로 고대 생육숭배, 농신숭배, 지모(地母)숭배, 산천숭배의 장소라 보았고 장박천 박사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단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방단(方壇)이라고 주장했다.


전광림은 이들 주장보다 보다 진전시켜 동산취 유적이 초기 사(社)숭배유적지라는 데 동의하면서 동시에 홍산문화인들이 몇 개 부락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천지, 조상, 산천 등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더불어 홍산문화인들의 옛 땅에서 발전한 오환, 거란, 몽골 등 북방 민족의 사만교 제천 풍속의 근원이 이것에 기원할 수 있다고 적으면서 그 중요성을 더욱 높게 평가했다. 동산취 유적이 실질적으로 예제(禮制) 전통에 있었으며 결코 무술(巫術)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중국 고대의 제사예의를 원시적 종교이론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동산취제단이 당시의 홍산인들의 취락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천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공 제사활동의 대형 유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동산취에서 발굴된 유물의 대다수는 제사활동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마제석부(磨製石斧). 마광석부(磨光石斧), 타제 아요석부(打製亞石腰斧) 등이 발견됐는데 이들은 전형적인 제기(祭器)로 분류된다.


또한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것으로 제기의 일종인 그릇, 항아리, 잔병, 접시 등 도기제품이 발견됐는데 두께 1.3센티미터의 ‘채도왕(彩陶王)’이라 불리는 채도도 있다. 도안이 간결하며 모두 삼각형 문양이나 평행선 등 기하학적인 문양이다. 또한 다량의 돼지 뼈와 사슴 뼈가 발견됐는데 이는 오랫동안 제사활동을 거행한 흔적으로 추정한다.


제단 북부 서쪽의 방형기초유적은 유적 중 중첩돼 있는 유일한 예의 성격의 유적이며 남부에서 발견된 몇 개 원형 단형(壇型) 건축물도 시간적으로 중첩됐다. 이는 이곳 유적지들이 장기간에 걸쳐 고정적으로 예의 장소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산취제단이 석재로 수축된 군체(群體)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유적지는 약 60 x 40미터 정도로 동산취 산등성이의 가운데 완만하게 돌출된 평지 위에 있다. 그런데 이들 건축물들의 분포가 균일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어 높은 건축 설계와 시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방형과 원형 제단은 모두 황토 위에 건축됐고 특히 남쪽에 있는 몇 개의 원형제단은 백회암석을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다. 그 위에 강에서 옮긴 작은 자갈을 한층 깔았다. 북쪽의 방형제단은 전체 유적지의 중심부로 몇 줄의 방형 입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석주(石柱)로 추정한다. 그러나 모든 제단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점으로 보아 이들 제단이 노천건축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방형제단 밖으로 돌담 기초 흔적이 있는데 이는 제단의 외면을 둘러싼 담장의 유적으로 인식한다.


이 중에 두 구의 소형임산부 소조상이 유명하다.


조상은 모두 임신부의 모습으로 나체며, 체형은 비대하고 윤택해, 왼팔을 가슴 앞에 굽히고 있고 아랫배가 튀어나왔으며, 둔부는 비대하고 돌기돼 있고 뚜렷한 음부를 나타낸다. 하지는 약간 굽어 있고, 머리와 오른팔과 발은 모두 훼손됐다. 그 중 하나는 온몸을 갈아서 윤을 냈는데, 채색화한 듯하고, 높이는 5~5.8센티미터이다. 이를 동방유납사(東方維納斯)라고 부르는데 이 입상은 실지로 걸터앉은 형태의 좌상으로 본다. 특히 이 조상이 발견된 위치가 원형 제단 위임을 감안해 이는 남부 원형제단의 신주(神主)로 간주한다. 즉 동산취 제단이야말로 중국 요서지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선사시대에 천지에 제사를 지내던 사단(社壇)이라는 뜻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 부근 산봉우리에서 옥기가 수장돼 있는 초기 홍산문화 적석총군을 발견했는데 7개의 고분이 산등성이를 따라 불규칙하게 배열돼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직경 6~7미터로 상부는 적석으로 이루어졌고 하부는 웅덩이를 팠다. 이들 묘지는 일반 주민들의 묘지가 아니라 소수의 특정 상층 계급의 묘지임을 증명해준다. 특히 M5묘지는 돌로 원형을 쌓았는데 이는 홍산인들이 돌로 원형을 쌓는 것은 지위가 가장 높은 조상신령을 숭배하는 형식으로 추정한다. 이것이 후기의 홍산문화에서 산 위에 돌무덤을 쌓은 후 무덤 위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신주(神主)를 숭배하는 형식으로 변한다. 또한 묘지 앞에서 토기 신주와 석제 조각 신주가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이는 묘지 앞에서 신주를 모시는 예의(禮儀)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만 모여 ‘가주(家主)’에만 제사를 지내지만 각자의 거주지역을 떠나 교(郊) 가운데의 ‘사(社)’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혈연 관계에서 벗어나 일종의 지역적 성질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산취 유적을 포함한 우하량 홍산 유적이 ‘신비한 왕국’ 또는 ‘여왕국’을 구성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하량에 존재한 국가>


우하량 홍산 유적은 전체적으로 여신사당을 중심으로 피라미드형 무덤을 전면에 두고 여러 산들의 정상이 돌무덤들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이다. 이와 같은 배치는 남북 10킬로미터, 동서 50킬로미터의 광대한 면적 안에 각 시설들이 일정 계획에 따라 건설됐음을 의미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신사당이 전체 배치에서 중앙의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홍산 문화에서 거대한 여신사당, 원형과 방형 제단, 거대한 돌무덤, 엄청난 양의 옥기들이 발견되는 것은 지금까지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야만 국가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구석기시대는 인간생활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석기시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 원시적인 농경이 시작되고 일부 지역에서 목축을 하는 정착생활이 이루어졌다. 신석기시대인들이 일정 지역에서 정착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획기적인 발명품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간석기(마제석기)와 토기의 등장이 그것이다.


토기의 등장은 인류를 구석기시대와 결별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그 전에는 늘 먹어야 할 식량을 확보하면서 살아야 했지만 토기에 물이나 식량 등을 저장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다음 달 또는 다음 해를 생각하면서 정주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축과 정주생활이 가능해지자 자연적으로 인간의 창발적 아이디어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인간사회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신분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무덤의 차별화가 시작됐으며 사회가 더 복잡해지자 청동기가 등장한다. 소위 씨족사회를 거쳐 국가의 조건이 조성되는 청동기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다.


역사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 시대로 들어선 경우에 비로소 그 민족이 국가라는 틀을 구성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는 청동의 사용과 바퀴의 발명으로 기동력이 생긴다. 특히 문자의 발명이라는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문자는 국가 체제 유지에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청동기가 고대 국가의 절대적인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중남미의 경우 석기만 갖고도 고대국가를 건설했고 바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남미 국가에 대해 청동기가 나타나야만 고대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승복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세계 4대 문명지로 알려진 이집트의 경우도 그곳에서 발견된 도끼, 단검, 나이프, 침 등의 고대 청동 제품이 그 나라의 토착 제품이 아니라 북방으로부터 전해진 교역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된다. 인도 문명도 청동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왕조가 성립됐거나 번성한 것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청동기가 나타나야만 고대국가가 성립한다는 학설은 적어도 국제적으로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청동시대라 하면 모든 기구가 동제품으로 제작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청동의 나라로 알려진 은나라의 경우 최전성기에도 농경 기구는 주로 석기였다. 가격이 비싼 청동으로는 중요한 무기나 제기를 만드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는 청동기 문화를 성립시킨 생산 기반은 신석기 시대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청동무기 소지자들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김철준 박사는 청동기 문화는 그 생산기술을 본질적으로 개혁함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청동기라는 신무기의 위력으로 정복과 약탈의 범위를 확대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계속)


참고문헌


『中國考古謎案』, 耿建軍, 山東畵報出版社, 2006년


‘황하에서 한라까지’, 심백강, 참좋은세상, 2007, 135~136쪽


「홍산문화의 제단과 중국고대의 교사지예의 기원에 대한 연구」, 전광림, 2회동북아평화정착을 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 국학학술원, 2007


‘한국 고대사 연구’, 김철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5~9쪽.


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홍산문화가 광대한 지역에서 통일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인구가 폭발적인 증가를 갖고 왔다는 점이다. 오한기(敖漢旗) 일대에서 발견된 홍산문화 유적지는 502곳에 달하며 전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규모가 커졌는데 대형 취락군의 경우 6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흥륭와와 조보구문화의 유적지도 대하연안(大河沿岸)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인구가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조직도 상응해 복잡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하량 홍산 유적지에서는 발견되는 여신전, 원형과 방형 제단, 거대한 돌무덤과 이들의 체계 있는 배치 등은 당시에 계급이 분화돼 있었고 대단위 동원체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산문화에서 대량으로 출토되는 옥기는 조형이나 가공 솜씨를 볼 때 모두 고도로 통일된 규범을 갖고 있다.


이것은 과거 신석기시대로 간주하던 5~6천 년 전에도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국가 추형(雛形, 모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으며 ‘중화문명5천년’을 들고 나온 근거이다.


최근에 중국사회과학원의 왕웨이(王巍)는 홍산문화의 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 의해 문화 발전이 낙후된 곳이라고 여겨졌던 중국 동북 지역의 서부에서 지금으로부터 5천여 년 전에 발달한 문화가 꽃피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로써 선사 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사회와 발전 수준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홍산유적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 문명을 삼황오제시대가 전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고고학회 상임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의 글로서도 알 수 있다.


‘우하량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인들이 전설로 간주하던 오제와 연관이 있다. 예를 들면 곰(熊) 숭배를 하나의 증거로 본다면 역사(‘신선통감’)에 기재된 “황제는 원래 웅씨였다”는 것을 연상케 한다.’


중국의 고고학자 소병기(蘇秉琦)는 홍산문화를 ‘중국문명의 서광’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홍산문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황제 시기의 활동중심은 홍산문화의 전성기와 맞물린다. 홍산문화가 곰과 용(熊龍)을 주요 신으로 숭배한 증거들이 보다 많이 발견된다면 오제전설(五帝傳說)에 관한 기록이 사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옥웅조룡(玉熊雕龍)이 황제(黃帝) 또는 오제전설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는 홍산문화를 갖고 있던 고대국가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중화오천년’ 옛 국가의 상징이다. 또 한 여신상은 홍산인의 여자 조상인 동시에 중화민족의 공통의 조상이다.’


<동이족의 곰>


중국인이 그동안 자신들은 용, 동이족은 곰의 민족이라고 부단히 선전해왔다. 그러더니 근래 그들의 시조라고 인정하는 황제가 곰의 민족이라고까지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산문명에서 발굴되는 것 중에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곰 형태의 각종 유물이다. 우하량 16지점 3호 무덤에서 발견된 쌍웅수삼공기(雙熊首三孔器)라고 불리는 짐승머리형 옥기는 두 마리의 곰과 3개의 구멍이 뚫린 옥기이다. 중국에서는 원래 동물의 모습을 돼지라 했다가 곰으로 바꾼 것이다.


돼지에서 곰으로 바뀐 것은 매우 큰 의미가 들어있다. 원래 중국은 ‘용의 자손’이라 해 용(하늘과 물을 상징)을 추앙했고, 또한 농경생활과 관계가 깊은 돼지를 의미 있는 동물로 인식해 곰을 도외시했다. 특히 홍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된 옥룡들의 원형은 돼지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요하 문명 지역에서 곰 관련 옥기와 곰뼈가 잇달아 쏟아진데다가 곰을 홍산문명의 대표 토템이라 할 경우 용과 더불어 곰도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옥으로 만든 용 조각품은 그 형태를 대략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앞에서 설명한 C자형과 결상이식이다. 중국학자들은 이 C자형 옥룡의 근원을 돼지 또는 사슴뿔이라고 설명하며 결상이식의 원형은 곰(熊)이라고 설명한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잇달아 출토된 곰뼈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우하량 2지점 4호 적석총에서는 완벽한 형태의 곰아래턱 뼈가 나왔다. 여신묘의 주실(主室)에서 확인된 동물의 양발도 영락없는 곰의 발이었다.


이런 곰 숭배 전통은 훙산문화를 이은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BC 3000~BC 2500년)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내몽고 오한기(敖漢旗) 백기랑영자(白斯郞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곰머리 채도(熊首彩陶)’가 대표적이다.


또 하나의 예는 츠펑현에서 수집된 곰머리형 채도단지인데, 몸체엔 곰머리와 툭 튀어나온 주둥이 형상이 붙어있다. 이 모두 곰의 특징이며, 곰 모양의 제기(熊尊)라 불린다. 현재 웅룡(熊龍)은 훙산문화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은데 한 20여건이나 보고된다. 웅룡은 말굽형 베개, 구름형 옥패, 방원형 옥벽(玉璧) 등과 함께 훙산문화 옥기의 4대 유형 중 하나로 꼽힌다는 설명이다.


웅룡은 우하량뿐 아니라 오한기, 시마무렌 강 이북의 파림우기(巴林右旗)와 파림좌기(巴林左旗), 하북성(河北省)의 위장(圍場)현 등 폭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양저(良渚)문화 옥기에서 보이는 신인(神人)의 발톱도 곰의 발톱으로 밝혀졌다. 특히 죽은 자의 가슴팍에 놓이는 옥기는 가장 등급이 높은데 우하량 제2지점 1호총에서 옥룡이 가슴에서 보인다. 이것은 옥룡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동이족으로 인식되는 상나라에도 홍산문화 옥조각 웅룡의 전통은 당연히 이어졌다. 상나라 유적인 안양(安陽) 은허(殷墟)에서도 홍산문화와 유사한 결상이식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곽대순은 다음과 같이 우하량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에서 곰 형상이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홍산인이 숭배한 동물신은 여러 신(神) 가운데 으뜸인 주신(主神)이었을 것이고, 홍산인은 바로 곰을 숭배한 족속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학자 이실(李實)의 설명이다. 그는 홍산문화 영역에서 확인되는 곰의 흔적을 근거로 홍산인들은 곰을 숭배했고,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사에 기록된 ‘유웅씨(有熊氏)’라는 것이다.


이실의 주장은 중국학자들을 강타해 홍산문화의 곰을 황제와 본격적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이북, 즉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치부하던 곳에서 곰의 흔적이 쏟아지니 중국학계가 이를 인정하되 황제와 연계시키는 것이다.


‘황제가 곰(熊)족’이라는 기록은 사실 궁색하기 이를 때 없지만 그들이 갑자기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사마천의 『사기』이다. 『사기』에 ‘황제를 유웅씨라 불렀다(又號有熊氏)’는 기록이 있고, 서진(西晋· 기원전265~316년) 때 학자 황보밀이 쓴 제왕세기(帝王世紀)에도 ‘황제는 유웅이다(黃帝爲有熊)’라고 표현돼 있다.


근래 중국인들의 새롭게 변하고 있는 시각이 어떻든 곰 숭배가 동북아시아의 종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부연할 필요는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대표격인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은 환웅과 웅녀의 이야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근래 중국이 그동안 주창하던 역사관을 버리면서까지 ‘황제=곰 숭배=홍산문화의 주인공’이라 단정하려는 것은 그만큼 홍산문화의 중요성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한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소위 동북공정은 물론 ‘서북 서남공정’의 실체이다. 간단하게 말해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중국 문명의 서곡은 우하량에서 열렸다>


현재 중국은 우하량 홍산문화 유적지를 중국 상고시대의 사회발전사, 전통문화사, 사상사, 종교사, 건축가, 미술사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화하족의 조상을 제사지냈던 성지로 간주하면서 동방문명의 빛이라고 자랑한다.


중국인들이 홍산문화를 중국의 역사로 인정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홍산문화 유적의 발견으로 요령지역이 먼저 발전돼 중국 문명의 뿌리가 됐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홍산 문화가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했으며 황화문명과 홍산문화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과 다름 아니다.


또한 앞에서 설명한 우하량 홍산문화 지역에서 제단, 돌무덤은 물론 신석기시대로 간주되는 빗살무늬토기, 청동시대의 비파형동검 등이 발견됐다는 것을 볼 때 이들 문화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더구나 이지역의 토템이 곰이라는 것은 한민족에게 많은 것을 연상케 한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는 중국학자들을 놀라게 했고 결국 중국대륙의 앙소-용산문화와 전혀 다른, 요령지역의 홍산문화 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비파형 동검’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곳에서 ‘중국문명’이란 ‘황하문명’을 의미한다.


홍산문화가 중국이 견지했던 중국문화와 전혀 다른 동이족의 문화이며 연대도 앞선 것이 분명해지자 중국의 태도는 돌변한다. 과거에 동이 즉 북방 민족의 유산을 부정하던 인식에서 탈피해 이들 문화를 중국문화의 틀 안에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변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종래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지만 근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강조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른바 중화문화(中華文化)의 다원화(多元化)로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을 대두시켰다. 또한 우하량유적에서 발견된 옥기(玉器)와 제단(祭壇)이 그 후의 왕실건축(王室建築)의 기원이 됐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이 중화문명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면서 접목돼간다는 주장했다. 즉 홍산문화는 앙소문화 계통의 원시문화로서 결국은 앙소문화의 변형체로서 중국문화발생의 한 근원이 되기 때문에 요하유역은 중국문명발상지의 하나가 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홍산문화는 황하문명과는 특징이 다르지만, 중국의 역사 속에 편입해 중화문화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홍산문화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서자봉(徐子峰) 적봉대학교 교수는 황하문명은 농업 중심의 문화였고, 요하문명은 신권 중심의 복합문화였지만 요하문명과 황하문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설명한다. 그 단적인 예가 동이계의 대표인 치우와 중원의 황제가 싸웠다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국학계가 문명의 서곡을 연 주체는 동이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요하문명이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중화문명의 일부임을 천명한다. 중국이 요하문명으로 ‘전설상의 5제시대’를 역사시대로 끌어올리고 있지만 이지역은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등 우리 민족은 물론 선비, 거란, 말갈 등 서로 피를 나눴거나 이웃으로 지냈던 이른바 동이족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무대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그 무대는 요하 유역뿐 아니라 중국의 하북성, 요령성, 내몽고(內蒙古)자치주, 길림성, 흑룡강성은 물론 중국의 산동반도, 그리고 한반도까지를 포함한다. 이형구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중해 문명이 서양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했듯, 동이족이 발해연안에서 여명을 연 문명은 중국문명은 물론 요동과 만주, 한반도, 일본의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


<신비의 왕국 이제 시작이다>


중국이 그동안 얻은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고대국가 문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학자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갖고 오게 했다. 이를 역으로 설명하면 홍산 문화 지역에서 동이족의 국가 즉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중국학자들이 증명해 준 것이다. 즉 중국이 주장하는 ‘중화5천년’이야말로 바로 한민족의 역사가 5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적석총과 석관묘의 진원을 시베리아로 보지만 홍산문화지역에서는 이보다 2000년 앞서 같은 유물이 나왔다. 이는 우리 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제를 같이 썼다는 것은 문화 및 인류의 동질성까지 유추할 수 있다.’


라는 이형구의 언급은 우리나라의 역사도 시베리아와 같은 북방계기원설 외에도 발해연안설(渤海沿岸說)로 설명된다. 이는 한국문화의 시원도 북방시베리아설, 요하발해연안설, 그리고 남방기원설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고학계의 한창균과 윤내현 이후 복기대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조선민족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맥족 문화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홍산문화로 대표되는 요하지역의 선대문화가 고조선 문화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동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단군조선의 실체여부를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들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문제는 물론, 요하문명론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도 된다.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등을 필두로 중국의 중원이나 장강지역보다 앞선 신석기문화는 요하 일대에서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펼치면서 요하문명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를 제치고 1만 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 최고의 문명으로 정립하고 있지만 이들 주도 세력은 황하문명을 이끈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요서, 요동을 포함한 만주-한반도를 이어 일본으로까지 이어지는 문화권은 세계적으로 신석기 문화권을 대표하는 (1) 거석문화권, (2) 채도문화권, (3) 빗살무늬문화권이 수용되고 융합되는 유일한 지역이다. 이것은 채도문화권만을 수용한 중원 지역과는 처음부터 이질적인 문명권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기원전 4000년경에는 중원 앙소문화의 채도문화권도 요서지역과 교류를 하지만 그전에 이미 요서지역에는 독자적인 문명권이 형성돼 있었다. 예맥계의 우리 민족은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3천 년 경에 이미 국가(신비의 왕국)를 형성해 중원문화에 영향을 주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었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연결되는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토대로 요하문명론을 개발해 자신들의 역사를 확장하는데 주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만을 수용하는데 급급해 우리의 역사를 도외시하는 우를 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시원문화로서 요하 일대에서 발달된 독자적인 문명권이 있었으며 그것도 단군조선보다 거의 1천 년 전에 ‘신비의 왕국’ 또는 ‘여왕국’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요하일대에 살았던 사람들 일부가 중국의 선조가 됐을 개연성도 마냥 부정만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주도 세력의 일부가 예맥의 선조들이며 그 주맥이 4700년 전의 치우, 기원전 2,333년의 단군조선으로 이어져 꽃을 피웠다는 것이 결코 상상의 일만은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현대의 민족이라는 개념에만 천착하지 않더라도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민족의 선조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여하튼 한민족의 고향으로도 알려진 홍산문화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가 우리들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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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공동체’, 베네딕트 앤더슨, 나남출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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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ciencetimes.co.kr/news/%ed%95%9c%ea%b5%ad%ec%9d%b8%ec%9d%98-%ea%b3%a0%ed%96%a5-%ec%8b%a0%eb%b9%84%ec%9d%98-%ec%99%95%ea%b5%ad-%ec%b0%be%ec%95%98%eb%8b%a4i/?cat=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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