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

이종호의 과학이 만드는 세상-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멸망이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던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싸움이 일어나 국가를 당나라에 바쳤다는 데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당나라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을 크게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배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욱이 신라 ‘통일’로 영토의 75퍼센트를 잃어 버렸다는 데는 말을 잃는다.

 

신라 진흥왕 시대인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영토는 41.1만 제곱킬로미터, 백제는 2.9만 제곱킬로미터, 신라는 8만 제곱킬로미터로 52만 제곱킬로미터이다. 현재 남북한의 면적이 22만 제곱킬로미터이므로 한반도 이북의 만주 땅에만 3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한 후인 8세기 중엽 신라의 영토는 13.4만 제곱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신라가 가장 강성했던 진흥왕 때의 면적이 8만 제곱킬로미터였으므로 백제의 면적 2.9제곱킬로미터를 합병하고서도 통합된 면적이 13.4만 제곱킬로미터였다면 신라가 통일 후에 실제로 북방 영토에서 늘어난 면적은 2.5만 제곱킬로미터가 채 되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요컨대 삼국 시대의 총면적 52만 제곱킬로미터가 신라 통일 이후에는 13.4만 제곱킬로미터로 줄어들었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잃어버린 땅은 무려 38.6만 제곱킬로미터가 된다.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멸망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의 ‘역사학자 100인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희노애락’의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설문에서는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 가장 분노했던 순간을 적시했는데 고구려의 멸망은 가장 슬펐던 순간 중 세 번째로 꼽혔다. 한국인들은 가장 슬펐던 순간 첫 번째로 경술국치를 꼽았고 두 번째로 한국전쟁을 선정했지만 이 사건들은 근대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5천 년 역사에서 고구려 멸망을 세 번째로 꼽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멸망이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가장 안타까운 역사의 순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참고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8ㆍ15광복,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6ㆍ10민주항쟁이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5ㆍ18광주항쟁, 삼전도 치욕, 동학농민군 패배이다.

 

함석헌 선생의 “신라는 너무 값비싼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는 한탄이 더욱 가슴에 닿는다. 그 기저에 깔린 아쉬움은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자 정복국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자신감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고대의 전쟁은 그야말로 영웅담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용감한 장수 한 명이 나서서 몰려오는 적병을 줄줄이 베어버리는 것은 물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발사되는 화살 망을 뚫고 달려가 적장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이런 식으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들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사기를 높일 수는 있지만 혼자서 수만 명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두 명의 영웅이 있어서가 아니라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역사상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이 말은 중국처럼 전투에 관한 한 상당한 노하우가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수많은 전투를 거울삼아 전쟁에 관한 한 수많은 전술 등을 비축하였고 이를 상황에 따라 적시적절하게 운용할 기본 자산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중국은 고구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장병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고대 전쟁에서는 장병의 숫자가 전쟁의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전쟁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1세기 중엽에 소국통합을 기본적으로 끝낸 후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고조선 옛 땅의 수복에 착수했다. 고구려는 태조왕 53년(105) 요동군, 현도군에 대해 일대 공세를 취고 요동지방의 6개현을 함락시켰다. 105년에 진행된 고구려군의 요동공격이 후한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가는 106년에 후한이 요동지방의 군현들을 대폭 개편한 데서 알 수 있다.

 

고구려 초창기의 전쟁은 주로 태조왕의 동생 수성(遂成, 차대왕)이 전담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 땅의 넓이와 인구가 한나라에 미치지 못하나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다.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 이를 격멸하면 우리가 중국을 이길 수 있다.”

 

차대왕의 이 말은 고구려가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구려의 인물이 이렇게 호방한 말을 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할지 모르지만 차대왕은 결코 허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118년에는 고구려군이 ‘예맥’의 군사들과 함께 한나라 현도군을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참을 수 없었던 후한의 안제(安帝)는 기원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에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케 했다. 이때도 태조왕은 동생 수성을 보내 역습하게 했다.

 

수성은 기만 작전을 구사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즉 사신을 보내 항복하는 척하면서 풍환과 요광의 군사를 묶어두고는, 비밀리에 잠입한 3천명의 군사로 현도군과 요동군을 기습 공격케 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놀란 요동태수 채풍이 다급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예봉을 꺾지 못하고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했지만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漢)으로서는 치욕스러운 패배였고 고구려로서는 대(對) 중국 투쟁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승리였다.

 

그런데 진수(陳壽, 233?279)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가 적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산과 계곡을 따라 살면서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 농사를 지었지만 배불리 먹기에는 식량이 퍽 부족하다. 그들의 풍속은 음식을 절약하면서 궁전이나 주거지를 성대하게 짓기를 좋아한다. (중략) 그곳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위와 같은 내용대로라면 고구려가 건국되어 멸망할 때까지 거의 700여 년 동안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전투를 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존재했고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싸워 승리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당시의 최첨단 무기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 국가인 동시에 다른 나라가 갖지 못한 전쟁의 잇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鎧馬)’란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개마무사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곳이라는 점에서 유래한 지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마무사라는 단어는 과거에 우리 민족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말과 기사 모두를 강철로 된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이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치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말조차 강철로 된 장비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데 고구려 기병의 경우에는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는데, 고구려와 동 시대에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마를 만들 수 있는 철기문명의 수준과 아울러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소유하고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영유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한국사는 부여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 나와 졸본에 이르러 비류수(지금의 혼강) 위에다 나라를 세웠다’고 했으며 ‘삼국유사’도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북부여’로부터 남하해 비류곡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정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북한측은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설정해 기존보다 240년 올려 잡고 있다.

 

동명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후한서(後漢書)』, 『논형(論衡)』, 『양서(梁書』, 『위략(魏略)』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동명과 주몽이 동일인으로 실려 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추모(鄒牟)로 돼 있다. 주몽과 동명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명칭들은 인명이 아닌 지도자를 뜻하기 때문에 동일인설, 이인설(異人設)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견해가 많다.

 

신형식 교수는 주몽집단이 압록강 일대에 진출해 졸본부여(卒本夫餘) 즉 고구려를 세우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유역으로 남하해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됐다고 설명한다.

 

노태돈 박사는 고구려라는 명칭은 구려(句麗)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高)라는 미칭(美稱)을 덧붙인 것이며 몽고고원의 유목민들은 고구려를 ‘매크리 또는 모크리’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고구려인이 맥족(貊族)이었음을 의미하며 고(高) 대신 맥고려라고도 했다고 적었다.

 

또한 지병목 박사는 고구려의 5부 중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를 제외하고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만 ‘노(奴)’자가 없는 것을 볼 때 계루부만 주몽의 유이민집단(流移民集團)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주몽의 아들임을 자처했던 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은 한 집안인 부여계(夫餘系)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그 왕실의 성씨를 부여(夫餘氏)라 했고 부여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동명묘를 설치했다. 백제는 6세기 중반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南夫餘)라고도 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 고구려에 투항할 때까지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한다. 부여는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단단산문화(西端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면서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한 국가이다.

 

부여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그 일부가 발해만(渤海灣) 일대에서 장춘 지방으로 이동해서 부여를 건국했다고 추정한다. 송호정 교수는 부여는 초기부터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송연평원에 중심을 두었다고 추정한다. 고등학교 『국사』에도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라고 적혀 있다. 반면에 건국전설(동명성왕의 전설)을 근거로 북쪽에서부터 송화강 유역으로 남하한 세력에 의해 부여가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부여가 활동하기 이전에 중국은 흉노(匈奴)라는 거대제국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에서 흉노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전까지 주로 동이(東夷)들이 살고 있던 중국의 동북방지역은 한민족의 원류들이 정착한 지역이며 부여, 고구려 등의 근거지이다. 그러므로 이들 흉노가 부여,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는지 이해한다는 것은 기마민족 고구려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므로 보다 상세하게 적는다.

 

<흉노는 중국보다 3배나 큰 거대제국>

 

흉노는 중국 북방에서 첫 유목민국가를 건설한 국가의 명칭으로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들인 후 점점 강성해졌다.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유목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해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집합체로 부상했다고 적었다. 특히 정벌한 지역이나 투항한 지역의 왕들을 그대로 수장으로 인정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흉노가 강성할 때는 수많은 다민족 국가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기원전 3세기 묵특선우의 흉노가 동호를 격파하고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돼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예맥조선),1)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 이르렀다.2)

 

그러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흉노라는 말에서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며 ‘노(奴)’자는 대체로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음을 볼 때 ‘오랑캐’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흉노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해 부르는 ‘노예와 같은 오랑캐’라는 말이라면 중국보다 3배나 더 큰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흉노가 이를 용납했을 리는 없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土地)’를 의미한다고 지병목 박사는 적었다. 고구려에서의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 흉노(匈奴)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에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의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漢)으로부터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는 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중국과 흉노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 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孤塗單于)’의 약어이다. ‘탱리(撑?)’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으로 흉노의 왕을 뜻한다.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이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때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됐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실현됐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됐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 액은 매년 증가됐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아 맞는 말이다.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으로 당시에 동호(東胡, 동호는 어떤 원어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추정)가 매우 강성했는데 동호가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후 두 나라 사이에는 황무지로 1천여 리의 땅이 있는데 황무지이므로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해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사마천은 동호(東胡)를 예맥조선이라고 적었다. 예맥조선족이 기원전 700~기원전 500년에 있었던 지역은 중국의 고원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으로 추정한다.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패전한 동호를 대신해 흉노가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됐는데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이는 그 영토가 중국의 거의 3배에 가까울 정도의 대제국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는 것은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법종 교수는 고조선은 중국과는 춘추ㆍ전국시대 및 진ㆍ한(秦ㆍ漢) 교체기에 조선이란 존재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조우하며 특히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해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한(漢)이 한반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상천 박사는 위에서 설명한 동호는 북부여를 뜻한다고 주장했고 서영수 박사는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계속)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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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를 다시 본다』, 김상천, 도서출판 주류성, 2003

 

「고조선과 우리민족의 정체성」, 서영수, 백산학보 제65호, 2003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

 

「고조선의 영역과 그 변천」, 주법종, 한국사론 34, 2002

 

한족(漢族)이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劉邦) 이후 60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으로 나섰다. 사실 무제가 즉위했을 즈음, 한나라는 흉노가 소유한 우수한 철제무기를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상태였고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기병 전술과 군대 편제도 상당히 습득한 상태였다. 게다가 군사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니 흉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다. 10년간의 한(漢)-흉(匈)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장한식 박사는 당시 흉노의 전체 인구는 1백만에서 1백5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0년 전쟁 동안 전체 인구의 15~20%에 이르는 20만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적었다.

 

흉노가 다시 일어선 것은 무제 말기였다. 위청과 곽거병이 이미 사망했으므로 무제는 기원전 99년, 이광리로 하여금 3만 명의 기병으로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이광리의 손자인 이릉(李陵)에게 보급품 수송을 맡겼으나 전투에 나서기를 원했으므로 무제는 이릉에게 별도로 5천명의 군사를 주어 이광리를 돕게 했다. 처음에 이릉은 몽골 초원 깊숙이 들어가 10만명의 흉노군과 싸워 승리를 했지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흉노에게 포위되자 이릉은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한군은 400여 명의 군사들만이 탈출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정도로 대패한다.

 

당시 사마천은 기록을 관장하는 태사관이었는데 포로가 된 이릉의 용감성을 변호했다. 무제는 항복한 이릉(흉노에 의해 왕으로 봉해짐)을 변호하는 것에 분을 참지 못하고 사마천에게 궁형(거세)과 함께 삭탈관직한 후 투옥했다. 사마천은 이 고통을 디디고 중국 사서로 위대한 ‘사기’를 편찬한다.

 

이 전투 후 무제가 죽자 흉노와 한 양측 모두 다시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한나라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흉노와 한의 휴전은 큰 틀로 보면 대략 300년(전한-후한 시대)에 걸쳐 중국과 흉노가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지낸다.

 

한과 흉노 두 제국의 평화 공존 중에 흉노와 한은 해체의 길로 나가는데 우선 기원전 57년에 흉노는 동서로 나뉘어진다. 분리된 흉노 간에도 전쟁이 일어나 서흉노의 선우인 질지는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배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 산맥 너머 씨르다리아 강 중류에 이르렀다. 이 서방이동 중에 정령, 호게, 견곤, 강거, 대완(大宛, 페르가나), 대하(大夏) 등 서역제국을 공략하고 병합해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운다. 이때에 벌써 흉노가 서방 세계에 근접한 아랄 지역에 도착하는데 이를 서양에서 흉노 제국이 출현한 기원으로 인식하며 흉노의 제1차 서천이라고 부른다.

 

349년, 후조의 석민(石閔)이 정권을 잡자 한인(漢人)들이 흉노를 포함한 유목민들에게 원한이 많다는 것을 알고 한인들을 부추켜 흉노(갈족 포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일어났을 때 무려 20여만 명이나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350년, 기(祇)가 한인(漢人)들에게 학살당한 원한을 갚고자 흉노들을 규합해 후조에 대항했으나 또 다시 패배하면서 흉노는 중국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흉노는 큰 틀에서 350년까지 4차에 걸친 서천이 이루어지며 375년에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해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켜 사실상 현대문명의 기초를 닦게 만든다. 한편 훈족의 지배집단과 동일한 또 다른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해 가야, 신라 등의 지배자가 됐다는 것이 새로운 자료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설명한다.

 

<고구려왕은 선우>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는 고구려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그런데 중국이 고구려를 흉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중요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중국 중원이 오, 촉, 위의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로 호칭한 것이다.

 

중국은 후한이 망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로 유명한 위나라(220-265), 촉나라(촉한 221-263), 오나라(222-280)의 대립시기였다. 서기 237년 공손연은 위나라와 오나라 간의 대립을 이용해 자립해 국호를 연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이때 위나라의 왕은 조조의 아들 조비였다.

 

조비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임명해 공손연을 공격케 했으나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동천왕의 협력을 약속받은 위나라는 238년 제갈량의 숙적이자 위나라 최고의 전략가인 태부 사마의를 파견해 동천왕이 파병한 고구려군과 합동으로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삼국지』의 주역 중에 한 명으로 볼 수 있는 사마의의 자는 중달(仲達)로 진왕조 건국 뒤에 고조선제(高祖宣帝)라고 추존됐으므로, 사마선왕(司馬宣王) 또는 진나라의 고조선제라고도 부른다. 처음에 조조(曹操)의 측근으로 들어가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 文帝)가 위나라를 세운 뒤에는 명제(明帝)·제왕(齊王) 등 3대 황제를 섬겼다. 그동안 대도독(大都督)이 돼, 위나라의 군사를 통솔하고 그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때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일으키는 터전을 닦았다.

 

그의 주요한 업적은 조비의 유언을 받아 명제 및 제왕을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 정립의 위기에 처해 외적을 물리친 일이다. 특히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오장원(五丈原)에서 막아, 그의 의도를 꺾었으며 요동(遼東)을 정벌해 공손연(公孫淵)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위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바로 이때 동천왕의 개마무사가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런데 동천왕이 위나라와 손을 잡기 전에 먼저 고구려에 손길을 보낸 것은 오나라의 황제 손권이었다. 손권은 오나라의 북부에서 공손씨가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자 연의 동쪽에 있는 고구려의 동천왕(234)에게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양국에 적대적인 공손연을 협공하자고 한다. 공손연은 237년 위로부터 이탈해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고 연호를 소한(紹漢, 한나라 왕조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라 했다.

 

공손연이 오나라의 북방에 위치하므로 원래 오(吳)의 손권은 이들을 달래려고 233년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돼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구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놀랍게도 고구려의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로 책봉(冊封)하고 의복과 보물 등 예물을 보냈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왕에게 흉노의 수장을 칭하는 선우로 책봉하면서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가 북방 기마민족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즉 주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책봉이란 뜻은 정식 수교(修交)의 관례적인 형식일 뿐 반드시 주종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신들이 도착한 항구를 압록강 하구에 있는 안평구(安坪口)라고 적었는데, 안평구의 인근에 천혜의 요충지 박작성(현 호산(虎山) 장성으로 중국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주장함) 등이 있으므로 고구려와 오나라가 연합하면 요동의 공손연을 공략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런데 손권의 정략은 실패한다. 동천왕은 손권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고 236년 오나라가 보낸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다. 또한 238년 위의 태위 사마의가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까지 했다.

 

그러나 동천왕이 손권의 제휴를 뿌리치고 조조의 손을 들어 사마의와 함께 연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사건은 동천왕의 기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협조로 연나라를 멸망시켰음에도 위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까지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239년부터 240년 사이에 요동군의 북부와 남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42년에는 요동군 서안평현에 다시 진격해 현성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현재의 신의주 바로 건너편인 요녕성 단동현 구련성공사 첨고성(尖古城)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북한과 요동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지금도 이곳을 따라 심양과 장춘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놓여 있을 정도로 중국에게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중국의 길목을 점령당한 위나라는 곧바로 관구검으로 하여금 즉시 반격해 고구려 정벌에 나서도록 했다. 이 당시에 현도태수 왕기와 선비족 계통으로 유명한 흉노계열의 오환의 병력도 합세했다. 이들에 대항해 동천왕은 철기군(개마무사) 5천명을 포함해 2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이들을 격파했다. 고구려가 막강한 개마무사로 당대의 패자 중에 하나인 위나라를 격파한 것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1차 저지선은 양맥 지방이었는데 관구검의 군대는 이곳을 쉽게 통과한 후 비류수(혼강 상류)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고구려군에게 대패해 3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오던 길로 후퇴했다. 고구려군은 위군을 추격해 양맥 골짜기에서 다시 위군 3천여 명을 섬멸하면서 계속 추격했다.

 

이때 고구려로서는 천추의 한이 될 대악수를 두었다. 동천왕이 위군의 추격에만 급급해 철기군 5천명만 데리고 쫓아가다가 위군의 역습을 당해 대패한 것이다. 원래 대오를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군대를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보병진지에 정면 돌격한다면 상황이 어떻든 항상 위험해진다는 것이 전투의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동천왕은 위군이 궤멸 직전이라 판단하고 기병만으로 추격에 앞장섰다가 위군의 역습을 받아 대패한 것이다.

 

고구려의 철기병은 구성 요원 자체가 고구려의 상층부 인원으로 고구려의 주력부대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 패배는 고구려로서는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관구검도 고구려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는 점이다.

 

하나 관구검은 다음해 10월 군사를 재정비한 후 또 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점령되고 동천왕은 국가 지도부만 데리고 곧바로 함경도 산맥지역인 옥저로 피신해 고구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몰렸다.

 

승세를 잡은 관구검은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킬 기회라고 판단하고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기의 추적은 집요해 드디어 동천왕은 황초령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왕기의 한 부대에게 포착됐다. 공격을 받은 고구려군은 산산이 흩어졌다.

 

이때 고구려의 유유가 거짓 항복한 후 적장을 찔러 죽이겠다고 동천왕에게 허락을 요청했다. 동천왕이 허락하자 유유는 위나라 군중(軍中)에 들어가서 거짓 항복을 했다. 적장은 유유의 항복을 진심으로 믿고 그를 맞이하자 유유는 음식을 꺼내면서 그릇 속에 감추었던 단검을 꺼내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지휘관을 잃은 현도군은 후퇴했고 동천왕은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유유의 계교에 의해 적장이 살해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왕기는 그 뒤에도 동천왕을 계속 추격했다. 그러나 험준한 고구려 땅에서 동천왕을 추격했지만 숙신 땅의 경계(간도 지방으로 추정됨)에서 회군했다.

 

왕기가 철수하자 동천왕은 수도로 귀환했으나 고구려의 근거지인 국내성과 그 일대는 크게 파손된 상태였다. 새 근거지를 위해 동천왕은 평양을 개발ㆍ확대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위나라는 259년에도 울지해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했지만 양맥골짜기에서 고구려 5천 기병의 공격을 받아 8천여 명이 살해되는 등 대패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위나라와 쫓고 쫓기는 혈투를 계속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동북 지역에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참고문헌

 

『쟁점으로 푸는 역사이야기』, 윤여덕, 심학당, 2006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 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호, 2004

 

고구려가 중국과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갖고 있는 고구려 나름대로의 노하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양국은 전투 방법부터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중국은 중국 나름대로의 전투 비법이 축적되어 있었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비장의 전투 기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투 방법에 대해 김운회 박사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한다.

 

중국은 기원전 1028년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백대, 용사 3천명, 갑사 4만5천명을 거느리고 위수를 따라 동쪽으로 출발하여 맹진(孟津)에서 여러 부락과 연합한 후 은나라 주왕(紂王)을 공격했다고 사마천은『사기』에서 적었다.

 

당시의 전쟁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주례(周禮)』에 의하면 병사 5명을 오(伍)라고 하고 5오를 1량(兩), 4량을 1졸(卒), 5졸을 1려(旅)라고 하였고 5려를 1사(師)이라고 하며 5개의 사를 군(軍)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1량(兩) = 25명, 1졸(卒) = 100명, 1려(旅) = 500명, 1師 = 2천500명, 1군 = 1만2천500명이 된다. 근래 사용되는 여단(旅團)이나 사단(師團)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중국의 전투는 주로 전차전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차 1대에 보병이 30명씩 호위하였다. 이 때 사용된 전차(戰車, 또는 兵車)는 크게 공격용 전차인 치차(馳車)와 수비용 전차인 혁차(革車 : 가죽전차)로 나눠진다. 치차는 공차(攻車) 또는 경차(輕車)라고 하는데 대개 경차 1대에서는 말이 4필, 갑사 3명, 병졸 72명이 따라다녔다. 혁차는 수차(守車), 또는 중차(重車)라고 하는데 혁차 1대에는 4마리의 소와 25인의 병졸이 따랐다.

 

이 당시의 전쟁들은 대부분 전차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주로 전차가 거동하기 편리한 지역을 전쟁터로 선택했다. 그러므로 주로 넓은 평원이 있는 곳에서 국경지대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당시의 전쟁을 ‘강장지사'(疆場之事, 국경의 일)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에 들어서자 철기의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보병들에게도 질이 좋은 무기들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질 좋은 철기는 무기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당시에 주력 무기는 강한 쇠뇌(弩)였는데 사정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한(漢)나라의 경우 6백보까지 쏠 수 있는 노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산악 작전이나 경사지 등에서 전투를 할 수 없는 전차전보다는 보병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보병들이 밀집대형으로 화살을 발사할 때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하던 전차 진영(車陣)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 405년, 단구(亶丘) 전쟁에서 ‘전차 2천대를 노획하고 3만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보병은 인원만 많다면 산악지나 구릉지, 평지 등 전쟁터에 제한을 받지 않으므로 전쟁터의 범위가 넓어지고 작전을 펼치기가 유리했다.

 

『순자(荀子)』 의병편(議兵篇)에 의하면 위나라(조조의 위나라가 아님)에서는 보병을 선택할 때 ① 세 가지 물건으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했고, ② 12석(石)의 힘을 가진 쇠뇌를 쏘는 것은 물론 쇠뇌살 50수를 등에 질 수 있고 ③ 무기를 휴대한 채 3일간의 식량을 짊어지고 하루 1백리 길을 달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즉 이 정도의 능력이 있어야 정규 무졸(武卒)에 합격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당시 보병이 상당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는 춘추전국 시대까지 기병(騎兵)이 단독 병종으로 편성되지 않고 전차병과 혼합작전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차츰 전쟁의 양상이 복잡해지자 기병이 독립 병종으로 발전하지만 그래도 기병은 고작 5천 필~1만 필에 불과했다. 중국의 장점은 장병 수이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는 각국의 영토가 확장되고 관료기구도 발전하였고, 초모제도(招募制度)를 실시하면서 경쟁적으로 국방을 강화했으므로 십만 명의 병력은 보통이었고 한 전쟁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형태는 예전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국경에 관문을 만들어 방어하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평소에 대병력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이 침공해올 때에 한해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갈수록 격화되자 보병전 위주로의 전투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지형에 따라 성을 방어진지로 삼아 공격군으로 하여금 소모전을 펼치게 하므로 당연히 성(城)의 공격과 방어기술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군대가 상주하고 정(亭, 변경의 토담 위에 설립된 감시용 건축물)이나 장애물 등이 건축되고 봉화 설비도 갖추면서 성이나 요새를 서로 연결한다. 이것이 유명한 만리장성의 시원이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자 전쟁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곧바로 멸망하고 한나라가 건국된다. 진나라의 전투 방법을 계승한 한나라는 전략 전술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나타낸다. 유명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한 초한전(楚漢戰)을 보면 조직과 지휘 면이나 보급 문제가 매우 진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번의 전투가 전체 국면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대치와 수비, 공격 등에 대한 다양한 전술이 구사된다. 이것은 전쟁터가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어서 여러 방향에서 하나의 전략적 목표를 중심으로 작전이 수행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중국이 사용한 대규모 보병전은 가장 작은 단위 부대인 소대(小隊)의 경우에 앞줄에 궁병(弓兵) – 창병(槍兵) – 칼과 방패를 가진 보병(步兵) 등의 순서로 정렬했다. 이것은 일단 화살로 공격해오는 적을 공격하여 예봉을 꺾은 후 계속하여 적들이 공격해오면 창병들 간의 교전을 벌인다. 상황에 따라 밀집 보병이 투입되어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이때 대규모 보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진법(陣法)이 사용되었다. 진법이란 전쟁시 병력 배치의 방식을 말하는데 진법 가운데는 팔진법(八陣法)이 대표적인 것이다. 64개의 소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고 적과 교전을 할 때는 정면과 측면을 지키는 부대로 나머지는 예비 병력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팔진법은 사령관이 군대의 정중앙에서 중군(中軍)으로 전체 병력을 지휘하는 것으로 이 중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네 개의 방향과 북동ㆍ북서ㆍ남동ㆍ남서의 사유(四維)에 여덟 개의 예하 부대를 두는 병력 배치법이다.

 

『삼국지』에는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고안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전부터 운영되던 진법이다. 그것은 제갈공명 이전에도 팔진법에 대한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여하튼 팔진법은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전투병과 지원팀이 매우 효율적으로 짜여 있어 최적의 공격 및 방위 진형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도 발견된다. 한식궁은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이다. (계속)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써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로 하여금 기마술에 있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케 하는 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탔다고 볼 수 있다. 말 타는 기술이 수준급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상대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 데 능하다’고 적혀 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온달장군의 아내인 평강공주는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일렀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말사육의 실제적인 기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일상 생활화했음을 암시해 준다.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전쟁을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은 이와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 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단원은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 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런 밀집대형도 로마군단의 변형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

 

로마군은 그리스 대형에 맞서기 위해 먼저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투창병을 내세웠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투창은 끝이 무겁기 때문에 그리스 진형의 앞 대열에서 장창을 사용하더라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투창병들이 방진의 앞 대열과 중간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사이, 키가 작은 로마 군병들이 작은 단검을 들고 방진 밑으로 침입하여 공격한다. 이 때문에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의 주력군이 돌진하여 방진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은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소대형과 백인대 등의 작은 부대로 구성된 집합체로 이들의 역할과 간격을 적절히 배치해 마케도니아의 밀집대형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의 승리는 아무리 견고한 방진이라도 침착하게 맞선다면 이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에 따라 변형 작전을 구사하였고 후대에는 귀갑형(거북형)이라는 유명한 밀집대형을 발명한다.

 

그러나 이들 귀갑형도 100전 100승을 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계속)

 

<참고문헌>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이진수, 고구려연구회 논문자료, 2003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김성남, 수막새, 2005

 

대열을 만들 때의 또 다른 장점은 대열에 묶여 있는 병사들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열 중에 있는 병사가 도망가려면 주변 전우들의 행동과 반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열에서 한두 명이 이탈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명령불복종이나 탈영자 등으로 낙인 찍혀 현장에서 곧바로 처형되기 일쑤다. 탈영자가 생길 경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지휘관들이 본보기로 처단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보병의 중요성은 보병 개개인은 전투력과 기동력에서 기병보다 떨어지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보병은 기병과 달리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경보병과 중장보병으로 분류한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맨 도부수이다.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갑옷은 창과 화살같이 찌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베거나 도끼와 같은 강한 충격을 동반한 공격에는 취약하다.

 

반면에 중장보병은 기병과 같이 갑옷을 입고 창과 길쭉한 방패를 들었다. 이들은 최정예군으로 경보병처럼 밀집대형을 이루며 보병대열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창은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보병이 중장기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기병은 말이라는 동물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은 장애물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다. 그러므로 말은 아무리 기수가 명령을 해도 자신을 겨누고 있는 창날이나 장애물 앞으로 무모하게 돌격하지 않는다. 또한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에 의해 인명이 살상될 경우 전진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 「간디」에서 인도의 무저항 시민들이 영국의 기병이 돌격하자 말들은 절대로 사람을 밟고 넘어가지 않는다며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말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개마무사들이 돌진하면서 적진을 돌파하려 해도 수비군이 밀집중장병대로 구성되어 개마무사의 공격에 대항한다면 기병의 특성상 오히려 개마무사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앞에 설명한 동천왕의 무적 개마무사가 관구검의 군대에 패배한 예로서도 알 수 있다. 관구검의 군대를 계속하여 격파한 동천왕은 승세를 굳히기 위해 철기군 5천명만 데리고 쫓아가다가 위군의 역습을 당해 대패했는데 원래 대오를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군대를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보병진지에 정면 돌격한다면 역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군이 철수하면서도 밀집방형진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즉 관구검군은 무질서하게 평야를 향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전을 펼치기 위한 장소로 퇴각하는 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승승장구하며 위나라 군을 쫓고 있던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밀집대형의 장창 앞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관구검군의 밀집대열이 똘똘 뭉쳐 전진하기 시작하자 고구려 기병들은 장창에 쓰러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서 위군의 기병들이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삽시간에 와해된 것이다.

 

고대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을 격파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 이유이다. 더구나 지형에 따라서는 기병의 활약이 크게 제한되므로 오히려 보병이 전투를 주도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막강한 동천왕의 개마무사가 패배한 것을 거울삼아 개마무사의 약점을 경기병이라는 또 다른 기병을 투입하여 보완했다.

 

<경비병의 활약>

 

보병과 중장기병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경기병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고대 전투에서 현대의 고사포를 발사하는 역할의 궁수가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궁수는 보병과 기병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보병과 기병은 양 군이 접근하기 전까지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한다. 반면에 궁수는 적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화살을 발사하여 공격할 수 있다. 즉 궁수는 보병과 기병만으로 구성된 적의 부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궁수는 공격 때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갖는다. 고구려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전열에 서거나 또는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고구려군이 접근하면 2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영화에서 보병이나 기병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자주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군사강국이었던 가야가 고구려에게 패배한 요인이다.

 

아직까지 가야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상태이지만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연맹국가로 500년 이상 존속했고 한때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노리던 군사강국이라는 점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학자들은 신라와 가야가 존속했던 초기, 해당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신라보다 가야가 더 컸다고 인식한다. 이와 같이 가야가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철 생산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가야는 병력의 대부분을 우수한 철제무기와 보호구(갑주, 투구)로 무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가야는 기마부대에 철갑을 공급해 중기병을 양성했다고 김성남 박사는 적었다.

 

그러나 가야의 중기병은 고구려와 차이가 있다. 고구려는 말까지 갑옷을 입힌 개마병사인 반면 가야는 그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갑옷 형태인 찰갑이 아니라 판갑을 착용했다.

 

찰갑은 피갑 즉 가죽 위에 쇠를 덧씌운 것이고 판갑은 큰 철판을 앞뒤로 이어 몸을 둘러싸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갑을 착용한 부대를 단순히 중기병이라 하고 찰갑을 사용한 부대를 중갑기병이라고 한다.

 

찰갑은 창검에 대한 방어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쇳덩이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착용하고도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반면에 판갑은 무기에 대한 방어력은 뛰어나지만 기동력에는 제한이 있다.

 

가야의 주력군은 기마병이었으며 왜(倭)군을 용병으로 이용했다. 『삼국사기』에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이유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장갑보병들이 앞에 서고 기마병들이 그 뒤를 이었으며 용병인 왜군과 궁병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므로 가야와 왜의 연합군은 경무장의 궁병과 창병, 중무장 보병과 중기병이 혼합된 탄탄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여러 해를 거쳐 신라를 공격하던 가야는 마침내 399년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 가야의 동맹인 왜는 울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태화강구에 상륙하여 막강한 가야의 중기병과 함께 신라군을 거의 멸망의 단계까지 몰아갔다.

 

이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정예병을 급파했다. 고구려의 남쪽 전진기지인 남평양(현재의 평양)에서 경주지방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530킬로미터인데 고구려군이 경주지방에 도착했을 때 왜군은 신라를 약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고구려군은 곧바로 이들을 격파하여 왜군은 극소수만이 살아남아 도망칠 수 있었고 가야군은 왜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급히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고구려군과 가야의 중기병이 격돌했다.

 

그런데 가야는 고구려의 기본 전력을 간과하고 동천왕이 실패한 전철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고구려군을 발견하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수천 명의 중기병으로 돌격하게 했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 나선 것은 고구려의 역전의 명사 개마무사가 아니라 맥궁으로 무장한 고구려 궁사들이었다. 가야의 중기병들은 고구려의 화살들이 판갑옷을 관통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가야군들이 고구려가 자랑하는 활의 위력을 무시한 것은 곧바로 치명상이 되었다. 가야의 중기병들은 하나둘씩 쓰러졌고 결국 무방비 상태가 되자 개마무사들이 뛰쳐나와 가야군들을 공격했다. 이 전투의 결과 가야군은 중기병과 보병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병력을 잃었다고 김성남 박사는 설명했다. 이 전투를 남해안대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투를 통해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금관가야는 하향곡선을 그리며 현 부산지역에 해당하는 영토를 신라에게 빼앗긴다. 이 지역은 상업을 위주로 성장한 금관가야의 무역 중심지이기도 하다.

 

멸망 직전의 신라는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고 영남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결국 후일에 삼국을 통일하는 강력한 국가로 발전한다. (계속)

 

<참고문헌> 『전쟁과 역사(삼국편)』, 임용한, 혜안, 2002

 

가야는 고구려 활의 위력을 몰라서 패배했지만 중국은 활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기병의 약점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러한 기병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해 기병들은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다 화살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군마의 부상은 기병에 치명상을 주므로 고구려가 개마로 말의 외부를 감싸도록 해 부상을 방지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궁수를 동원하더라도 활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개마무사의 장점이다. 개마의 효용성은 궁수가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미터이고 절대 살상거리는 3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일단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 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화망을 뚫기만 하면 궁수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궁수들이 개마무사들에게 집중해 화살로 공격하더라도 한두 번밖에 화살을 발사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기병은 5미터나 되는 창을 갖고 있으므로 궁수나 보병과의 간격이 20~30미터 거리로 좁혀지면 기병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개마무사가 화살을 피하는 순간 이미 궁수에게 다가와 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가야는 고구려의 위력을 간과해 패망했지만 중국의 경우 고구려와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즉 궁수의 역할에 한도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또 다른 방비책을 준비하곤 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지만 화살망을 뚫고 중장기병이 공격해 오면 20~30미터 정도의 저지선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해 함정에 빠지도록 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의 중장갑기병이 돌진하자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해 대비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장기병의 경우 장갑력은 강하지만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진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진격이 저지되면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나 준비된 기병들이 역으로 공격에 나선다. 중장기병이 육박전에 휘말리게 되면 오히려 패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개마무사에 대한 중국의 대비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경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병은 대체로 중무장하지 않고 말의 기동력과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하는 임무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연합하더라도 보병 밀집 대형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경기병대는 주로 맥궁으로 무장한 후 적군의 궁수와 보병을 상대로 활을 발사해 적진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임무를 갖는다. 맥궁의 사정거리가 중국 활보다 긴 것은 물론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했으므로 어느 장소에서건 재빠르게 화살을 발사하고 빠지는 데 적격이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경기병대가 공격해오면 이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체력을 소모해야 하므로 대형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만약 적진이 완강해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경기병대는 무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이럴 때 고의적으로 후퇴하는 위장술을 겸용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공격해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집요한 매에 당해 낼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수비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면서 약점을 보이면 준비된 개마무사가 출동해 승부를 결정짓는다. 훈족(흉노)이 막강한 로마군을 비롯한 게르만 족을 격파한 비법은 바로 기동력을 기반으로 공격과 후퇴를 번갈아 가면서 승리할 때까지 고삐를 늦추지 않는 데 있었다.

 

중장기병대와 경기병대는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출동해야만 전투 효과가 배가되므로 군의 체계에 따라 중장기병과 경기병대 숫자를 조정했다.

 

고구려보다 후대이기는 하지만 금나라는 아예 기병대 자체를 20명의 중장기병과 30명의 활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섞어 편제했다. 고구려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를 운용했을 것으로 임용한 박사는 추정했다.

 

중장기병대는 다른 병종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선발된다. 말과 갑옷이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군마는 소처럼 여물을 먹이지 않고 반드시 생초나 곡물을 먹여야 한다. 더구나 기마술을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장기병은 전쟁에 나갈 때에도 종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마무사의 장점은 철이지만 철의 약점은 녹이 잘 쓰므로 갑옷을 매일 닦아주고 기름 치고 조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중장기병대는 보병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 대 1 정도이며 또한 중장기병을 전체 기병의 40퍼센트(금나라를 계상) 정도로 설정한다면 전체 병력의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튼 고구려는 기병과 보병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고구려가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무모하게 개마무사 등 최정예 부대들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당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력부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할 만큼 최첨단 군수품으로 무장했고 적절한 작전을 구사하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장병들의 전투력 즉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뜻한다. 개마무사가 승리의 보증수표였음은 의미한다.

 

<개마무사는 철기 생산이 확보돼야>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해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개마무사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마병을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기병은 북방기마민족들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또는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했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음에도 개마무사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들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뉘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됐다.

 

성질이 다른 철을 만드는 기본 제련 방식은 유사하다. 과거에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로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쯤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괴련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고대 사극에서 자주 보이는 것은 좋은 칼을 만들기 위해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쇠를 두드리면 단단해지는 것은 쇠의 금속 성질 때문이다. 쇳덩이를 현미경으로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네모, 육각형, 오각형 등 모양만 다양한 게 아니라 크기도 제각각이다. 당연히 이런 조직들이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두드리는 동안 괴련철 속의 규소 등 이물질이 압출되고 조직이 치밀해진다. 그리고 이물질 중 배출되지 않는 것도 조직 안에 고루 분산되므로 조직이 균일화되고 전체적 강도가 높아지게 된다. 또한 가열된 괴련철을 숯에 넣으면 숯의 탄소가 철에 흡수돼 자연스레 철의 표면은 적당한 탄소를 함유한 괴련강(塊鍊鋼 : wrought iron)이 되며 이를 침탄법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쇠의 날과 등의 두께를 달리하면 쇠의 성질을 인공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쇠의 색깔이 황혼 빛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안쪽 날부터 시작해 등 부분까지 순간적으로 물에 담그는 것을 반복했다. 날 부분은 갑작스레 담금질하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에 손끝에서 나오는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하면서, 날 부분은 강하게 만들고 가운데와 등 부분은 약하지만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칼은 칼의 표면 부분만 탄소가 함유된 강철이고 그 안쪽은 여전히 연철이므로 칼을 사용함에 따라서 표면의 강철은 부서지게 되고 칼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쉽사리 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인력이 너무도 과다하다는 점이다. (계속)

 

참고문헌

 

「고구려를 다시보자(2) 벽화로 본 고구려」, 이태호, 동아일보, 2004.03.22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 아침, 2007

 

침탄법으로 철을 만들 수 있지만 청동처럼 철을 주물로 부어 칼의 형태를 만들고 마무리 단조를 통하면 칼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이를 선철(주철, cast ir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순철의 경우 1천535도 이상이 돼야 하는데 고대에 1천500도 이상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장인들은 용융점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 비결은 철에 탄소가 함유될수록 녹는점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때의 연로로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제련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천50-1천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돼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가 1천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분리된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데 이때의 선철은 약 3~4퍼센트의 탄소가 함유돼 있다.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돼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1천130도로 가장 낮은데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쇳물을 그대로 주형에 부어 칼을 만들면 외형은 나무랄 데 없는 칼이지만 나무 등을 세게 치면 곧바로 깨져버린다. 날을 세우려고 망치로 두드려도 깨져버리고 숫돌로 갈아도 워낙 경도가 높아 제대로 날이 서지 않는다.

 

관건은 주철에서 탄소를 적당히 제거하는 것으로 비밀은 주철을 고열에서 일정시간 가열해 주는 것이다. 주철 표면의 탄소가 산소와 결합하여 제거된다. 또한 철은 온도 변화에 따라서 탄소함유율이 낮은 페라이트상과 탄소 함유율이 높은 오스테나이트상을 오가므로 이 과정에서 철 내부의 탄소가 유리돼 한 곳으로 뭉쳐 흑연덩어리를 형성해 철 자체의 탄소량이 감소한다. 이렇게 가열가공을 거쳐 탄소량을 2.3~3.4퍼센트로 만든 전성주철(展性鑄鐵) 혹은 가단주철(可鍛鑄鐵)은 연성이 있어 어느 정도의 단조작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는 재가열 과정에서 철이 산화되는 것은 물론 탄소량의 감소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철 내부의 흑연괴로 인한 경도 약화로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고강도의 철 즉 강철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고강도의 철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소위 선철에서 손쉽게 탄소를 제거하는 방법인데 가장 먼저 개발된 방법은 초강법(炒鋼法)이다. 초강법은 녹은 상태의 주철에 고운 흙이나 산화철 가루 등 탈탄제(脫炭劑)를 넣고 저어서 주철의 탄소가 철광석 가루와 결합하여 제거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탄소가 제거되면 철의 용융점이 높아져서 곧 굳게 되므로 잘 저어주고 센 불로 계속 가열하여야 한다. 이 경우 약 2퍼센트의 탄소를 함유하는 비교적 고품질의 강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탄소 함유량을 정확히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의 방법은 관강법(灌鋼法)이다. 주철과 순철(연철)을 함께 섞어 열을 가하면 탄소함유율이 높은 주철이 1천200도 내외에서 먼저 용해된다. 순철은 주변의 주철로부터 탄소를 흡수하면서 용융점이 낮아져 1천300-1천400도에서 녹아 주철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탄소량이 과다한 주철은 탄소를 잃고 탄소량이 부족한 순철은 탄소를 얻게 돼 적절한 탄소량을 가진 강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강법은 초강법에 비하여 탄소량의 조절이 보다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은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돼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지만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제강법은 단철을 여러 번 불에 넣어 단련함으로써 강철을 얻었으므로 백련강(百鍊鋼) 천련강(千鍊鋼)이란 명칭만으로도 그 제조의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조에 의해 생산되는 철제무기는 매우 고가여서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됐으므로 정작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통일제국 성립 후까지도 여전히 청동제 무기만을 사용했다. 청동을 사용하는 진나라가 철기를 사용하는 열국들을 격파한 것은 고대사의 미스터리 중에 하나이다.

 

초강법(炒鋼法)이나 주철탈탄강법(鑄鐵脫炭鋼法)을 사용한 강철은 한나라 초기인 기원전 1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나며 이후 더 이상의 제철기술 발전이 미미하여 문화혁명기까지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제철이 이루어진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문화가 진전됐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됐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됐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됐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의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천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다.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중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강철다운 강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천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의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 등 덕분이다.

 

고조선 영역의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율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이 출토됐다. 또한 『고광록』에는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 있다.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오늘날의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 등 철 생산지가 많다.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도 연철제품이 발굴됐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강철은 기원전 2-1세기에 제련됐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돼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2001년과 2004년 아차산 제4고구려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를 대상으로 최종택, 박장식 교수가 금속학적 미세조직을 분석한 결과 연철을 대상으로 한 침탄제강법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관강법(灌鋼法)으로 강철을 만든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고구려에서 고대 철기기술의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 제강법은 물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제강법을 사용하여 각 제품에 알맞은 철기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고구려 독자의 철강 기법으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고구려의 철기문명 수준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천 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앞선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의 저력은 중국보다 앞선 철기문명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려할 때 최근 인기 있는 TV 역사드라마에서 부여가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초강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절절 매고 있을 때, 중국의 한나라는 철기군을 운용하고 있는 모습은 실제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우리 민족은 중국 한(漢)족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속)

 

참고문헌

 

『조선기술발전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4

 

고조선에서의 제철 및 철재 가공기술의 발전, 박영초, 조선고고연구, 1989년 1호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이종호, 컬쳐라인, 2000

 

『조선광업사』, 리태형, 공업종합출판사, 1991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장한식, 풀빛, 1999

 

「환도산성과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철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철기기술」, 박장식, http://blog.naver.com/bestchoi21?Redirect=Log&logNo=20013974168

 

사상 최강의 고구려를 이끈 개마무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느냐에 의문이 있는 모양이다. 어느 발명이나 마찬가지로 개마무사가 고구려에서 갑자기 탄생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 속의 중장기병>

 

일부 학자들은 중장기병의 뿌리를 기원전 7~6세기경의 아시리아로 추정한다. 아시리아 기병의 말에 천이 씌워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에도 중장기병을 보유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의 근위기병들의 경우 말에도 보호장비가 있었다고 적었다. 그에 의하면 말 머리에는 청동제 금속판이 씌워져 있고 말 가슴에도 청동제 아프론(Apron)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의 기원을 그리스에서 찾는다. 영어에서 중장기병을 의미하는 ‘cataphracts’라는 말도 고대 그리스어 ’Cataphractii’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신재호는 중장기병의 기원을 그리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중장기병은 알렉산더 대왕 시절 마케도니아의 중기병(Companion)을 제외하면 그렇게 강력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의 주력은 환타생을 구성한 중장보병(Hoplite)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중장기병의 기원을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스키타이로 간주한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부터 현 동유럽 지역에서 공포의 기마민족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므로 이들과 인접해있던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등이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스키타이를 이은 사르마타이도 중장기병을 보유했다.

 

로마도 중장기병이 있었지만 이들은 로마인이 주축이 된 병종은 아니었고 사르마타이를 비롯한 식민지 병사 혹은 용병들로 구성됐다. 최초로 사르마타이 기병이 로마군에 포함된 시기는 기원 65년 무렵이며 기원 365년 콘스탄티누스 2세도 중장기병을 보유했다고 한다.

 

개마무사에 대한 유물이 많지 않다는 것은 개마무사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리스의 유적인 유프라테스 언덕(Eupharates)에서 개마가 출토됐는데 이 유적은 기원전 4세기경에 건설되고 기원후 256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된 곳이다. 그러므로 개마의 하한선은 기원후 3세기로 볼 수 있는데 이 마갑은 전형적인 철갑 형태이며 안면부, 목,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몸통 부분은 말 전체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안장의 앞부분 절반만 감싸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같이 말 몸통 전체를 철갑으로 두른 정통 중장기병이라 보기는 어렵다.

 

유럽에서 정통 중장기병이 일찍이 태어나지 못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이다.

 

우선 당대에 고구려와 같은 중장기병으로 무장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존 워리 박사는 그리스의 중장보병(Hoplite)이 갑옷 한 벌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이 현대로 치면 자가용 1대 가격이 되며 중장기병의 경우 최소한 보병보다 2~4배의 비용이 든다고 추정했다. 그러므로 그리스의 중장기병(Cataphrcatii)은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엘리트 병종으로 추정한다. 페르시아의 경우 대제국이므로 중장기병으로 무장할 저력은 충분하나 보병과 궁수들을 선호했으므로 중장기병을 크게 육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중장기병이 육성되지 않은 보다 큰 이유는 개마무사를 철갑으로 무장하기 위해 이들 철갑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유럽의 제철 기술은 동양에 비해 매우 낙후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히타이트에서 발명된 저온환원법에 의한 괴련철(iron bloom) 제조 방법으로 철을 만들었으며 완전히 철을 녹여 강철을 생산하는 방식의 제철은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 유명한 중세시대의 기사들은 모두 이들 기법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고구려의 경우 고조선부터 철기에 관한 기술이 독자적으로 전수됐고 또 만주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생산됐으므로 철제 기술은 당대 세계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고구려의 국력은 차대왕 때 이미 중국을 공격할 저력이 있다고 호언할 정도이므로 고구려의 주력부대를 당대의 첨단무기인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독창적인 고구려의 개마무사>

 

고구려에서 개마무사가 언제 출현했고 독창적인 발명품인지 또는 다른 곳으로부터 전래받은 것인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인철 박사는 동천왕의 철기병을 근거로 적어도 서기 3세기 중반부터 고구려에 출현했다고 적으면서 개마무사는 전연으로부터 동수(안악3호분 벽화의 주인공으로도 추정됐음)와 같은 인물이 망명해옴에 따라 전연으로부터 무기는 물론 제작기술이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한 것을 볼 때 안악3호분 벽화에 보이는 개마무사는 의전용일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이 박사는 고구려에서의 진정한 개마무사 출현은 광개토대왕대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 박사의 주장 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고구려가 개마무사로 무장한 이유 중에 하나로 당시 중국에서 발달한 쇠뇌를 들고 있다. 중국에서는 후한말~삼국시대까지 쇠뇌의 보급이 대폭 확대됐는데 이는 기병들에게 큰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즉 쇠뇌에 제압되지 않기 위해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의 조전경일(?田耕一)이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고구려가 백제에 패배한 이유가 고구려의 무장 수준 특히 쇠뇌조차 만들지 못했다는 설명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고구려보다 앞선 고조선에서 쇠뇌로 무장했음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규 박사는 중장기병의 기원을 북중국에서 찾았다. 그는 중국의 개마무사가 후한 말경(위, 촉, 오의 『삼국지』 시대)에 나타난다고 적었다. 서기 200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한 관도전투 당시 원소군은 개마 300필, 조조군에는 10필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개마는 상급자의 신분과시용이거나 호위부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4세기 이후부터 중국에서 개마무사가 대대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여 박사는 3세기 중엽에 동천왕이 5천 명의 개마를 보유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며 고구려의 개마무사 기원을 4세기 초에 선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선비의 단부가 서기 312년에 개마 5천 필을 보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와 함께 전연의 극성을 포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수를 비롯해 북중국, 선비계열 왕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망명객들이 고구려에 중장기병을 전한 장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인철과 여호규 박사 모두 고구려의 중장기병의 기원을 북중국 내지 선비족 국가들에서 찾고 있다. 그 근거로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중국의 개마무사가 거의 동일하므로 이들이 각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기보다는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래됐다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반면에 네티즌 ‘대막리지’는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중국에서 전래됐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 적었다. 중국에서의 개마무사 출현이 대략 서기 3세기 초이고 고구려의 경우도 동천왕대가 3세기 중엽이므로 선후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서기 4세기 초에 선비족이 최소한 5천명의 개마무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이보다 약간 앞서 동천왕 시절에 고구려가 5천명의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가정이 무리하지 않다고 적었다.

 

그런데 선비와 중국이 개마무사로 무장했다고 해서 이들로부터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도입했다는 것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상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족은 선비(鮮卑)이다.

 

선비는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농업(粗放農耕)을 하던 목주부농(牧主副農)의 몽골계 유목민족이다. 선비는 흉노에게 격파된 동호에서 오환과 분리된 후 북중국을 통일해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 남량(南凉),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이며 선비의 문화는 당대(唐代)까지 존재했으므로 중국역사상 끼친 영향이 매우 크며 이들이 할거하던 시대를 중국은 오호16국(五胡16國)이라고 한다. 특히 동호가 예맥조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비에 의해 세워진 이들 국가들은 한민족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선비가 한민족과 특별한 유연관계에 있는 것은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만드는 등 고구려의 활동과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참고적으로 북한 측은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삼국사기보다 240년 앞선 기원전 277년으로 인정하며 유리왕 11년을 기원전 249년으로 추정한다).

 

고구려가 선비를 통합한 지역은 류하(휘발하 지류) 일대로 비정한다. 모본왕2년(49) 고구려군은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 방어선을 하북, 산서, 협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이에 당황한 후한의 광무제는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군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고구려가 부용 세력화해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해 고구려로부터 이탈케 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의 이런 조치에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이다.

 

박경철 교수는 태조대왕 3년(55)에 더 이상 선비족이 이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동 왕 69년(121)에는 기지건, 단석괴(基至?, 檀石槐)의 선비세력과 합세해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해 고구려의 군사행동의 폭을 확대시켰다.

 

이 당시 단석괴(檀石槐)는 북흉노의 일부를 흡수하고 고원의 여러 세력을 합쳐 동쪽은 만주에서 서쪽은 준가르까지 이르는 대판도의 선비를 구축해 통치 영역을 세 부(중, 동, 서)로 나누고 각부에 대인(大人)을 두고 다스리는 등 위세가 높았지만 고구려의 세력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공동 작전으로 요동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단숨에 와해되고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는 지도자 없이 일시 분산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등 혼란된 시기로 들어간다. 한편 중국의 중원에서는 후한이 붕괴하고 소위 삼국(위, 초, 오)시대가 시작돼 중화 재편을 위한 다툼이 벌어진다.

 

이 당시 삼분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동북방의 세력은 둘이 있었는데 첫째는 거란의 원조(遠祖)로 불리기도 하는 가비능(軻比能)이 오환과 연합한 구 선비세력이고 둘째는 고구려이다.

 

당시 오, 위, 촉으로 분리된 중국은 한 치도 알 수 없는 전쟁의 와중에 있었는데 오나라와 위나라가 두 개의 동북방 세력을 다루는 방법은 매우 달랐다. 위나라와 오나라는 오환과 선비세력은 철저히 분쇄하는 반면 고구려와는 화친을 맺고자 했는데 고구려가 오환과 선비의 후견인 같은 역할을 하는 강대국이므로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우군으로 묶어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고 지배선 교수는 적었다.

 

이것이 앞에 설명한 오나라 손권의 동천왕에 대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손권을 배제하고 조조와 연합하게 되는 배경이다. (계속)

 

참고문헌 : 『한국 7대 불가사의』, 이종호, 역사의아침, 2007

 

아시아 동북방에서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대에는 더욱 활발한 정복 정책을 추진해 선비의 후예인 거란을 정벌하는 등 서부지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해 당시 중원의 최강세력인 북위(北魏)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개마무사는 강력한 전력의 방편>

 

거란은 가비능을 원조로 하는 선비의 분파로서 원래 시라무렌(Siramuren) 유역과 라오-사무렌(Lao-Samuren) 유역인 요해(遼海) 지방에 거주하면서 수렵, 어로 및 말 사육에 종사하던 유목민족으로 훗날 ‘요(遼)’를 세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자신들의 주체적인 생존조건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시키는 데 주력해 ‘전사국가(戰士國家)’화 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하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 사회적인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 나갔다. 이런 내외의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군사국가(despotic military state)’에서 탈피해 동북아시아 일대에 독자적인 생존권(lebensraum)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고 박경철 교수는 주장했다.

 

박경철 교수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여기에서 흉노는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한다)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과의 관계가 부용관계였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부용(附庸)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대국(大國)에 복속돼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를 포함한 피정복 이민족과의 관계도 이런 보호ㆍ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 같은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즉 그들 고유의 생존영역을 비호 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동력과 군 병력을 확보했다. 김광진 박사는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로 파악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앞에서 개마무사로 무장하려면 경제력과 개마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선비가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가 이들에게 개마를 공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오환돌기를 장갑기병으로 보는데 이들 역시 선비의 세력이라면 고구려의 부용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개마무사를 채택한 것은 개마무사를 도입한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한나라군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추정의 근거로는 한나라군에 중장기병으로 반드시 무장하고 있어야 할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등자는 개마무사가 중무장을 한 후 진격할 때 안정적으로 말을 타기 위해 필요한 마구이다. 기마민족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등자의 발명이다. 이를 보면 MBC-TV의 드라마 「주몽」에서 한나라군이 개마무사를 동원하는데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개마무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은 개마무사는 북방기마민족에 의해 등자가 개발된 후에 고구려와 같은 철기 제작기술이 앞선 국가에서 발명됐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개마무사는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병종이라는데 의문이 생긴다. 고구려는 개마무사가 무한대로 활동하는 평야에서의 전투보다는 산성전투의 이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거점 중심의 전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순수한 기마민족인 경우 중기병은 보유하지만 개마무사를 보유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초원을 바탕으로 하는 기마민족의 경우 정주국가에 비해 항상 수적으로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히트앤드런(Hit and Run)식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면에서 개마무사가 기마민족의 전투 속성을 감안하면 적합한 무장 체계가 아니라는 지적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특히 기마민족은 장거리 이동이 주무기이므로 개마는 신속한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단점도 있다.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아틸라나 칭기즈칸이 중장기병보다는 경기병을 선호한 이유이다.

 

그러나 활과 산성 전투를 중시하는 고구려에서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사실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고구려가 산성 전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개마무사가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핵심이 될 수 있다. 적군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공해 오더라도 곧바로 성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공격 장비들을 점검한 후 각종 장비와 인원을 동원해 공격에 임한다. 중국의 경우 고구려의 수성작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최첨단 공성용 공격 장비를 휴대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공격군이 진을 완전히 만들기 전 또는 약점이 보일 때 성문 주변에서의 제한적인 기습작전이나 추격전에서 중장기병은 커다란 이점을 보일 수 있다.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개마무사가 활약한 것도 이와 같은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적어도 중국과는 달리 북방기마민족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마무사를 채택했다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제일 먼저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무순의 신성(고이산성)을 부단히 점령하려고 한 이유이다.

 

필자는 신성을 찾아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원래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고 중앙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산성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세워져 있고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관광지 개발에 따라 지형이 완전히 변형돼 있어 조그마한 산성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했으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현지 중국인 안내원을 통해 수소문을 했지만 중국인들조차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같은 장소를 뱅뱅 돌면서 한나절에 걸쳐 일일이 수소문한 결과 저녁 무렵에 과거 산성의 입구라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신성의 입구는 찾는 도중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인데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10여 미터의 토성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전에는 입구임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었다는 말에 주위를 세밀히 살펴 어렵게 찾아낸 석비는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돼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동양보다 낙후된 서양의 철 생산 기술>

 

동양에서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하면 말의 몸통 전체를 둘러싼 정통 개마가 서양에서는 언제 등장했는지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개마는 동천왕보다도 거의 1천년 후인 십자군 전쟁 때부터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십자군 시대의 기병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체인 메일을 걸치고 있으며 투구는 노르만헬멧을 사용했다가 나중엔 헬름이라는 양동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투구를 사용했다. 말을 탈 때는 창을, 말에서 내려서 싸울 때는 70~80센티미터 길이의 검을 사용했다.

 

말까지 중무장시킨 십자군의 유럽 기병은 아랍인들이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장을 자랑했다. 아랍군의 활은 십자군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도 우수한 기병 덕분이었다.

 

유럽의 개마무사가 동양과 조우한 것은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을 때인데 이때를 서양에서 개마무사가 나타난 시초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의 개마무사는 몽골 기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골은 유럽 기병의 약점을 파고들어 러시아는 7일, 헝가리는 5일 만에 정복했다. 독일에서 온 3만 명 가량의 튜튼 기사단도 전멸시켰다.

 

아랍인들도 십자군의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도입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맘루크로 불리는 이슬람 노예기병이다. 이들은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검을 사용했는데 사라센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군대로 십자군 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실제로 이들은 이집트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 기병들을 무찌른 적도 있다.

 

중세시대에 장갑기병이 태어난 이유는 강력한 쇠뇌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영화 「쟌다르크」에서도 주력 무기의 하나가 쇠뇌였다. 쇠뇌는 일 분에 3발 정도 발사할 수 있었음에도 강력한 위력으로 활보다 장병과 군마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그러므로 쇠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30킬로그램짜리 갑옷을 입고 말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무게의 마갑을 착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무장을 한 덕에 충격력은 대단했지만 단점도 매우 많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 방향을 신속하게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투구의 무게도 상당해서 앞은 볼 수 있지만 고개 돌려 바로 옆을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눈구멍과 숨구멍만 뚫려 있어 시야도 좁았다. 또한 시종이 없다면 갑옷을 입고 벗는 것은 물론이고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전투 도중 낙마할 경우 포로가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유럽의 제철 기술이 동양에 비해 매우 낙후했기 때문에 강철다운 강철로 만든 철갑은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동양으로부터 전수된 화약무기에 의해 곧바로 사라지고 만다. (계속)

 

참고문헌 : 「한국의 산성, 고구려 고이산성(古爾山城, 신성)」, sycjs, http://blog.naver.com/sycjs, 2004.10.27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무기와 장비를 이용해 중국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것만으로 영광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의 청야전투>

 

고대사를 보면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한 만큼 중국도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전반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의 막강한 공격에 몇 번의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연개소문의 아들이 나ㆍ당 연합군에게 국가를 내줄 때까지는 패배라는 것을 거의 몰랐다.

 

그런데 중국과 고구려의 전투를 보면 고구려가 마냥 강력한 전력으로 일대일 백병전을 벌려 이들을 격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다른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침공을 할 때는 월등한 전력을 확보해야 한다. 지리에 어두워 곳곳에서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고 전투가 장기화될 경우 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장기간의 원거리 원정을 떠날 때에는 특히 장병들이 먹어야 할 식량과 식수의 보급이 절대적이다.

 

반면 수비 측에서는 침공군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스스로 철수하게 만들고 철수할 때 틈이 있으면 이들을 공격해 다시는 침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책이다.

 

고구려는 다른 국가들이 사용하지 못한 두 가지 전술을 도입했다. 첫째는 잘 알려진 청야전투이고 둘째는 산성전투이다. 청야전투를 먼저 설명한다.

 

나라와 시대는 다르지만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막대한 인원과 장비를 동원하고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요인은 여러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유달리 추웠던 러시아의 겨울 기후를 주범으로 들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원정 때도 그랬지만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때에도 침공군은 날씨가 예년에 비해 유달리 추워 이런 돌발 변수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제물에 붕괴됐다.

 

그런데 러시아가 나폴레옹 또는 히틀러 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하게 찾아 온 혹한에 큰 덕을 보긴 했지만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기후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러시아를 공격할 때 광대한 영토로 진격하면 당연히 전선이 길어지고 보급에 문제가 생기며 여차하면 겨울의 덫에 걸릴 수도 있음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잘 무장된 군인과 첨단 장비를 동원해 전격 작전을 벌리면 겨울이 오기 전에 러시아의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러시아는 막강한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해 유별나게 추운 날씨가 닥쳐오도록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침공군에게 최대의 타격을 줄 수 있는 러시아 특유의 전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외적이 침공했을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청야작전’이다.

 

원래 공격군은 신속한 진격을 위해 꼭 필요한 일정량의 식량과 무기만 휴대한다. 그러므로 적국으로 진격해 전투를 벌여야 할 경우 전격작전을 구사해 적을 패배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는 군수품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러시아가 구사한 청야작전이란 적군과 맞붙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작전상 후퇴하면서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것을 말한다. 즉 공격군이 진입하더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식량과 물자는 모두 불태우므로 공격군은 모든 보급을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더구나 러시아가 무작정 후퇴만 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에 진입한 공격군에게 보급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도록 곳곳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식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사람들의 끈질긴 게릴라전은 효과를 보아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의 패배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몰락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고구려도 중국의 침략해 오면 러시아처럼 청야작전으로 중국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가장 먼저 신경을 쓴 것은 원활한 군수품의 보급이다. 사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이므로 기본 전력이 부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선 인원이 상대국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언제든지 소위 인해전술이 가능하며 농업국답게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의 이런 물량작전에 고구려는 중국의 주력부대와 정면 대결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승리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우선 고구려는 전략 거점이 되는 산성을 중심으로 버티면서 장기전을 유도했다. 즉 중국의 주력부대가 고구려 영토 깊숙이 진격할 경우 소규모 전투를 벌여 패하는 척하면서 유도 작전을 펼쳤다.

 

특히 고구려는 유인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국군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이나 물자를 청야작전에 따라 철저하게 파괴했고 배후에서 보급을 차단해 보다 큰 피해를 주었다. 중국도 고구려의 전략을 잘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겨울이 닥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청야작전에 휘말리면서 번번이 시간을 놓쳤다. 중국의 역대왕조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도 가을이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면 곧바로 철수 작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수많은 전투 기록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영토에서 퇴각한다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퇴각하는 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전력이 저하된 상태이므로 이때 고구려가 자랑하는 개마무사 등을 동원해 침공군을 섬멸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 실패와 그 피해는 국권마저 당나라에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구려의 지정학을 이용한 산성전투>

 

고구려가 외적이 침입했을 때 사용한 또 다른 전술은 청야전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산성전투이다.

 

러시아나 스키타이의 전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야전투는 자유자재로 공격을 하는 동시에 불리한 경우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라는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러시아나 스키타이(헝가리를 포함한 동구권 거의 전 지역)처럼 광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전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청야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험준한 산악을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설명된 것 것처럼 지리적 특징이 매우 뚜렷한 지역 중 하나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넓게 탁 트인 벌판이 적다는 이야기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지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활을 주요 무기로 채택했다. 험한 지형을 이용해 멀리서 쏘아대는 활은 개활지에 비해 위력이 배가될 수 있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면 소수부대로라도 지형지물만 잘 이용하면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활은 적의 접근을 막아주는 지원 세력이 없이는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더구나 활이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에 부합하는 무기라고 해도 항상 고구려의 입맛에 맞게 천연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고구려라 해서 평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궁수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인공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다. 간단한 목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마름쇠 같은 것만 뿌려놓아도 적 기병이나 보병이 신속하게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는 산성(山城)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활이나 노 같은 무기들은 성에 의지해서 싸울 때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성을 공격하는 적의 보병과 기병은 성에 닿을 때까지 거의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성안에 있는 수비군들의 활이나 노 등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노출된다. 가공할만한 위용을 보이는 공성(攻城) 무기 등도 성문 또는 성 자체를 파괴할 때까지는 공격 측이 거의 일방적으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고구려가 사용한 전형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적군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든 주민들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의해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들이 입성할 때 청야작전에 따라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이 기본이다.

 

고구려의 자랑은 산성으로 철수할 때 큰 짐을 갖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산성에는 항상 외적이 침입할 때 들어가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전략 물자 등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는 고구려가 항상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성이 점령되면 모두가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러므로 산성에 들어가면 군ㆍ관ㆍ민 모두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한데 힘을 모았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런 작전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외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더라도 해를 넘기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만주지역인 고구려 영토에서 원정군이 혹독한 겨울 기후를 버티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고구려는 중국군이 지쳐 철수할 때 경기병이나 개마무사들은 풀어 이들을 추격해 섬멸했다. 중국이 고구려의 이러한 작전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각종 중국 측 자료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주서』도 고구려의 전술은 ‘성안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킨다’고 기록했다. 성안 농성이 주 전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성을 공격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산성이 절대적인 위용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산성이 견고한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화 강 유역의 평지에 황토를 층층이 다져 성곽을 축조했다. 이에 따라 평지에 쌓은 사각 토성이 중국 성곽의 기본형이 됐다. 고구려보다 늦게 만주를 호령했던 여진족의 금도 이를 받아들여 평지 토성을 축조했다.

 

반면, 고구려는 평상시에 들판에서 농사를 짓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험준한 산으로 대피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을 쌓았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적석총을 만들면서 터득한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했다. 산에다 쌓은 석성(石城)은 고구려의 고유 브랜드인 셈이다.

 

물론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돌로만 쌓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도성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쌓았는데 평원지대에서는 구하기 쉬운 흙으로 토성을 많이 쌓았다. 특히 평지성이나 토성을 축조할 때는 중국의 축성술을 도입해 활용하는 등 고구려 특유의 전통과 신기술을 접목시켜 성의 나라를 건설했다.1)

 

고구려의 산성의 특징과 축조 방법은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1~6)」, 국정브리핑(www.news.go.kr), 2005>에서 다루었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계속)

 

참고문헌 : 「성(城)의 나라, 고구려」, 여호규, 경향신문, 2004.09.10

 

고구려는 중국이 침공했을 때 흔히 산성전투와 청야작전으로 맞섰다. 이 때 중국군에 허점이 보이면 그 유명한 개마무사와 경기병 등을 투입해 침략군을 철저히 응징했다.

 

고구려의 이 같은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 동북방의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중국 세력에 직면해 고구려는 한편으로는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고구려인다운 자살>

 

중국이 타국에 비해 우월성을 보이는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數)이다. 물론 전쟁은 장병의 수만 많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에서 볼 때 대규모 인해전술과 물량작전을 펴서 실패한 경우는 퍽 드물다.

 

하나 중국은 고구려를 상대해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중국보다 우수한 장비를 부단히 공급할 수 있었고 산성전투와 청야전투 등을 활용하면서 공격군에게 치명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도 초창기에는 고구려에 장비가 다소 뒤졌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지』에도 자주 나온다.

 

이는 장수끼리의 일 대 일 대결에서 일부러 등을 보이며 도망가다가 몰래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재빨리 돌아서서 적을 쏘는 것인데 이를 타도계(拖刀計)라 한다. 상대가 바짝 뒤쫓아 와서 창으로 막 찌르려는 순간 뒤돌아서 활을 쏘는 것이다. 화살이 급소를 비켜 간다고 하더라도 화살을 피하려는 동작 때문에 말에서 떨어지기 십상이다. 뒤쫓아 오던 자가 자주 포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고구려가 중국의 물량작전에 강인하게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전술의 복합적 구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중요 요인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의 평소의 삶과 정신세계이다. 우선 고구려인들은 기본적으로 상무적(尙武的)이었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결혼과 더불어 수의(壽衣)를 만들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이러한 풍습을 중국인들이 매우 놀랐다고 하는데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국가적 대의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전투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태자였던 해명(解明)의 예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유리왕 27년(8), 태자 해명이 힘이 세고 무용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황룡국왕이 사자를 파견해 강궁을 보내 주니 해명은 그 사자를 만나자 그 앞에서 활을 당기어 꺾으며 말하기를 “내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굳세지 못하다” 했다. 황룡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해 “해명은 사람의 자식이 돼 불효하니 청컨대 과인을 위해 그를 죽여 달라”고 했다. 그러나 태자를 만나 본 황룡왕은 감히 해를 가하지 못하고 예로서 그를 돌려보냈다.

 

유리왕 28년(9) 3월, 왕은 사람을 해명에게 파견해 말하기를 “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의 기업(基業)을 굳게 하고자 하는데 너는 나를 따라오지 않고 힘의 굳셈을 믿고 인국과 원한을 맺으니 사람의 아들 된 도리로서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느냐”며 사자에게 칼을 주어 보내어 스스로 자결하게 하라 했다.’

 

사자가 해명 태자에게 유리왕이 자결하라고 했다는 말하자 신하가 해명 태자에게 왕의 뒤를 이어야 하며 또한 사자가 자결하라 한 것이 거짓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해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자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나에게 보냈기에 나는 그가 우리나라를 가벼이 볼까 염려해 활을 당겨 꺾어 버림으로써 이에 보답했는데 뜻밖에 부왕께서는 이를 책망했다. 지금 다시 나를 불효라 해 칼을 주어 자결하라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해명 태자의 자살은 그야말로 고구려인다웠다. 그는 여진동원(礪津東原)으로 가서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달려 창에 찔려 죽었다. 그때 그 나이가 21세였다. 고구려의 태자가 말을 달려 자신이 꼽아 놓은 창에 찔려 죽었다는 것을 음미하면 고구려인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죽어도 사는 고구려인>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벽화는 기원전 27세기에서 11세기까지 그려진 이집트 고분벽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만들어진 이탈리아의 폼페이 유적의 벽화, 기원후 4세기에서 7세기까지 만들어진 고구려의 벽화, 기원후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만들어진 중국의 돈황 벽화 등이다.

 

이 중에서 폼페이 벽화는 꽃과 과일나무, 새로 가득 찬 즐거운 정원 풍경, 연극 장면 등이 신화나 설화와 어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은 당대의 그리스ㆍ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아 폼페이 시민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돋보이게 하는 목적으로 그려졌다.

 

돈황의 벽화는 실크로드를 지나는 상인들과 불교도들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재현하면서 당시의 종교관과 동ㆍ서문화의 교류상을 담고 있다. 수많은 돈황의 석굴사원은 하나하나가 작은 미술관이라고 할 만큼 수많은 회화와 장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일반적으로 1천개의 동굴이 있고 한 동굴마다 1천의 불상 또는 부처 그림이 있다고 추정) 천장을 메운 장식이나 선인의 모습이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고구려와 서역의 폭넓은 교류를 엿보게 한다.

 

그런데 필자는 폼페이, 돈황, 이집트와 고구려 벽화를 현장에서 직접 보면서 폼페이와 돈황 벽화와는 달리 이집트 벽화가 고구려 고분벽화의 소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집트의 벽화나 조각의 내용들은 그들이 체험했던 과거의 경험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농사짓고 고기를 잡으며 포도주를 만들고 빵을 굽는 것은 물론 머리를 깎고 면도하는 장면도 있었다. 무용은 물론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까지 실생활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고분의 벽화만으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 모두 매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묘사된 압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집트인이라면 죽음의 관념에 항상 사로잡혀 있고, 감독의 난폭하고 잔인한 채찍 밑에서 평생 거대한 돌덩어리를 끌면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불쌍한 민족이라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에 산재한 수많은 유물들을 보고 그러한 생각이 선입감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집트인은 어느 민족보다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신이자 통치자인 파라오의 강력한 지배하에 살았지만 이집트인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불행한 생활은 아니었다. 물론 3천2백 년의 역사 동안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평온한 생활을 영위했다.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의 계급이 세대를 내려가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가계에서 파라오가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며,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배출됐다. 벽돌공이나 상형문자를 새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됐다.

 

파라오라는 절대 통치자의 세습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파라오가 임명하는 재상이나 장군도 한 가문에서 계속 이어받는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파라오는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을 언제든 임의대로 재상이나 장군으로 임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이집트 격변기를 제외하고 장구한 이집트 역사에서 이러한 파격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앞에 정해진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파라오는 파라오며, 재상은 재상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놀이도 할 것이므로 그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하고 물고기나 가축도 길러야 했다. 죽어서 신하나 하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살아 있을 때 잘해주어야 했다. 공연히 제도적인 틀을 바꾸어 잡음을 일으킴으로써 신하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특이한 제도 중에 하나는 장례법이다.

 

이집트인들은 육신은 영혼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이므로 영원한 삶은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몸을 떠난 죽은 자의 영혼이 언제라도 육체에 돌아오게 하기 위해 시신을 썩지 않는 미라로 만들었다. 인간이 죽으면 태양이 뜨는 동쪽에서 태양이 지는 서쪽으로 옮겨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피라미드 및 무덤은 나일강 서쪽에 건설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음의 신인 아누비스 가면(늑대 혹은 자칼 머리 모양)을 쓴 신관이 시신을 미라로 처리하지만 내장 등은 카노픽이라는 항아리에 따로 보관한다.

 

장례를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나면 나일강 동쪽 항구에서 나일강 서쪽 무덤까지 태우고 갈 장례배에 안치하는데 이 의식 전에 가족 중에서 최상급자가 사자에 대한 공개 재판을 주재한다. 만약에 사자의 생전 행적에 대해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반대 증언을 하거나 죄상을 성토할 경우 장례를 집전하는 가족의 최상급자가 사자의 유해를 준비된 장례배에 태우는 대신 나일강 동쪽에 매장하도록 명령한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사후관에 비추어볼 때 사자의 영원한 삶을 근원적으로 막는 사실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자신이 사망하자마자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일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서 영원한 삶의 터전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집트인에서 노예제도가 없었다는 것도 이런 믿음에서 기원한다(이집트에서 노예라는 말은 가사 노동을 의미함). 사자에 대한 생전의 공과로 재판을 한다는 것은 이집트인들이 생전에 선행을 하도록 유도하는 제도로서 크게 인정받았다.

 

또한 무덤 속에는 죽은 자가 저승에서 환생할 때까지 사자가 사용했던 모든 것을 함께 묻는데, 특이한 것은 무덤 속에서 환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주인 대신 노역을 담당할 우샵티 혹은 샤웁티라는 인형을 반드시 넣었다.

 

이와 같은 인형을 매장하게 된 동기는 이집트 역사상 몇 번에 걸쳐 외적의 침입이 있었는데, 이 동안에 귀족이 망해 천한 직급이 되고 노예가 상급자가 되는 등 하극상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볼 때 고귀한 직분의 사람도 사후에 천한 직급으로 신분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저승에서 부릴 사람들을 애초부터 데리고 갔다. 인형의 숫자는 신분 혹은 재산에 따라 달라지는데 유명한 투탕카멘의 묘에서는 400여 개 이상이 발굴됐다.

 

이집트가 다른 나라보다 전력이 강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파라오를 위해 싸우다가 사망하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 파라오가 사망한 후 영원히 파라오의 신하로서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고구려 벽화에서도 이집트와 마찬가지의 사후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전통과 풍습은 물론 종교도 다르고 또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벽화만을 놓고 볼 때 이집트와 고구려의 차이점은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무덤을 죽은 자의 집으로 여기고 죽은 후에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점은 두 사회의 공통점이었다. 고구려인들도 이집트인처럼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의 삶이 천상에서 이어진다고 믿었다.

 

고구려인들이 내세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집트와 같이 벽화의 내용이 매우 밝고 힘차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고구려 벽화에 베를 짜는 여인이나 부엌, 고깃간, 방앗간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사냥을 하는 장면, 무용하는 모습 등 무덤의 주인이 체험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벽화의 특징으로 사신과 도깨비 귀신, 하늘을 나는 신선과 용, 학, 봉황, 기린 등이 등장하지만 사악한 신이나 지옥의 풍경은 그리지 않았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고구려인들은 내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데다 설사 전투에서 죽는다하더라도 보다 좋은 영원의 세계로 간다고 생각하는 고구려인들에게는 전쟁도 살아가는 삶의 일종이었다.

 

고구려가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보다 열악한 상황이었음에도 중국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경쟁을 통해 한민족의 기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정신 무장과 과학을 배경으로 하는 최상의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

 

참고문헌 :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출판, 1988

 

중국을 이길 수 있다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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